자본주의 리얼리즘 (1)
요 책을 9월 한달간 열심히 읽다가 추석 이후로 흐름이 끊겼다. 오늘 다시 펼쳐보니 전에 읽은 내용조차 기억이 잘 안 나서, 챕터별로 조금씩 요약과 정리와 잡담을 해보기로 했다.
자본주의적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쉽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게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
- 자본주의는 모든 문화적 대상에 화폐적 가치를 부여한다. 단순하게 미학적인 것으로만 여김
- 알랭 바디우는 이것이 자본주의의 미덕이라고 말한다. 믿음 자체의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광신을 배제할 수 있어서.
- 어라 근데 요 몇년간 한국의 모습을 봤을 땐 광신이 전혀 배제되지 않은 거 같은데;
- 우리의 민주주의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피의 독재보다는 낫다. 우울증자의 암울한 관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 더 이상 자본주의+민주주의에 도전할 수 있는 이념체제는 없다! 체제의 역사는 이제 종결됐다! 는 선언
- 비록 지금은 조소거리일 뿐이지만 당시 후쿠야마가 저 말을 했던 게 단순히 낙관에 가득 차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체제의 역사가 끝난 이 도시에 유령이 출몰할 거라는 표현을 썼음. 이때 이 유령은 마르크스적인 유령 (= 공산주의) 이 아니고 니체적인 유령.
- 역사의 과잉으로 인해 시대는 자신에 대한 아이러니 라는 위험한 분위기로 빠지고, 나아가 더 위험한 냉소주의의 분위기에 젖게 된다.
- 무심한 방관주의가 참여와 개입을 대체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이 처한 상태.
대안적, 독립적 문화는 정말로 대안적, 독립적인가
- 자본주의가 사람들이 꿈꾸는 삶을 식민지화 해왔다는 건 이제 당연한 사실. 오히려 눈여겨 봐야 하는 건 자본주의 문화가 욕망과 갈망, 희망 등을 선제적으로 구성하고 형성하는 사태다.
- 모든 반항과 논쟁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커트 코베인, 너바나, 갱스터 영화와 힙합.
- ‘우리는 세상을 향해 반항한다’는 메세지를 전파하는 듯한 모양새를 통해 더없이 자본주의 친화적인 형태로 녹아들고 있음.
- 나도 내가 인디 마이너 취향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독립서점에 꽂혀있는 책들을 보면 어떤 기시감이 들 때가 있다. 독립서점에 꽂혀있을 법한 책들만 꽂혀 있다는 느낌.
- 락 음악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 다 부수고 탈출하고 쾌락을 누리고 등등의 속 시원한 가사들이 많지만 그건 그런 가사와 이미지가 잘 팔리기 때문이고.
- 우리는 다 반항을 좋아한다. 근데 진짜로 대혁명을 일으키는 건 쫄리고 대상도 명확하지 않으니 혁명의 카타르시스를 대신해 줄 무언가가 필요하고, 그런 니즈를 자본주의는 너무나 잘 캐치한다.
여러분이 시위를 조직하고 모두가 참여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자본주의는 반자본주의를 포함한다
- 할리우드 영화에서 악당은 매번 ‘악한 기업’으로 등장한다. 이런 반자본주의적 몸짓은 오히려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강화시킨다.
- 영화가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 반자본주의를 상영하고, 우리는 양심의 가책 없이 계속 소비할 수 있다.
- 심지어 이젠 그런 악역에서 착즙거리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미움받는 조연 캐릭터를 권력으로 찍어누르는 게 사이다 서사로 포장되거나.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게 되었다
- 사람들은 더이상 이데올로기적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 하지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사물의 실상을 은폐하는 환영 수준이 아닌 우리의 사회적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환상 수준에 있다.
- 자본주의를 우리 사회에서 벗겨냈을 때 어떤 모양새가 될 지 감이 잘 안 온다. 또 지금의 우리가 어떠한 체제에 속해 있다는 감각도 별로 없다. 자본주의는 너무나, 숨쉬듯이 자연스럽다.
- 자본주의가 나쁜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자본주의적 교환에 가담할 수 있다. 화폐가 무의미 하다고 믿지만 실제론 마치 신성한 것처럼 대한다던지.
반자본주의 운동의 실패
- 관된 정치경제적 모델을 대안으로 내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추진력을 모으지 못했고, 또 정치적 조직화보다는 항의를 무대화하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스스로도 이게 받아들여지리라는 생각을 안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피해가지 못했다.
-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항의는 기이한 항의다. 가난에 찬성하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 60s 시기의 반자본주의 운동에서는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모두 뺏어간 ‘악한 아버지’ 형상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이 같은 아버지 형상에 의지하는 쪽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항의 자체다.
- 강자의 정체를 모호하게 흐리는 건 누구에게 좋은 일인가?
- 라이브에이드 콘서트 이후, 정치적 해결책이나 체계의 재조직화 없이 ‘개인들에 대한 보살핌’이 직접 기아를 종식시킬 수 있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 결국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가 유일한 게임임을 현실적으로 수용한 것.
- 콘서트의 수익금이 훌륭한 명분에 쓰인다는 사실만 확신시키고 자 이제 돈을 소비하시면 됩니다! 로 결론 내버렸으니까.
- 서구의 소비주의가 지구 전체의 체계적 불평등에 내재적으로 연루되어 있기는커녕 그 자체로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
자본주의와 실재
실질적인 저항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자연화되기 전까진 진정으로 성공할 수 없다. 사실이 아니라 가치로 생각되는 동안에는 자연화할 수 없다.
- 이데올로기를 타파하려면 이걸 사실이 아닌 가치로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시
- 환경 재앙
- 기후 변화나 자원 고갈 위험은 억압되기 보다는 오히려 광고나 마케팅에 사용되고 있다.
- 자원은 무한하고, 지구라는 틀은 우리 기술만 발전하면 언제든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며, 어떤 문제도 시장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
- 정신 건강
- 이제 정신 건강의 문제는 날씨 같이 자연적 사실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우리는 날씨조차도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 이 모든 건 다 개개인의 질환으로 취급된다. 그렇지만 심리적 문제를 개인의 스트레스 탓으로,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 특히 이토록 많은 청년들이 아프다는 걸 이 시대가 어떻게 용인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 관료주의
- 신자유주의는 관료주의를 옛 시대의 유물, 한물 간 것으로 여겼지만 관료주의는 여전히 일상의 큰 일부다.
- 이는 자본주의의 실제 작동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제시한 그림과 달랐다는 증거가 된다.
반성적 무기력, 안정 지향, 자유주의적 공산주의
두 가지 유형의 무죄 판결
-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에서 카프카가 제시. 실질적인 무죄 판결은 한때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불가능하다.
- 표면적 무죄 선고 (일단 무죄 드리는데 나중에 바뀔 수도 있어요) 와 무한한 지연 (피고는 계속 재판에 참여하고 판결은 영원히 미뤄짐)
- 들뢰즈는 카프카, 나아가 푸코와 윌리엄 버로스가 제시했던 통제 사회가 무한한 지연에 기반한다고 생각했다.
- 지금의 우리는 평생 교육을 받는다. 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교육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직장을 구한 후에도 일을 위한 훈련 역시 평생 받는다.
포스트 훈육 시대
- 요즘 10대들은 자극이 너무 많아서 집중할 수 없다. 엔터테인먼트 매트릭스에 걸려들면 초조해 하고 불안해 하는 상호수동성, 전념하고 집중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른다.
- 시간을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통합하지 못한다. 이들의 경험에서 시간은 언제나 디지털의 극소 조각으로 이미 잘려 있다.
- 글쓰기는 결코 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심오하게 반문자적이다. 전자 언어는 목소리나 글쓰기의 방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안정 지향
- 프랑스 10대들의 시민 운동에서 드러나는 안정 지향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의 실천과 거울상을 이룬다.
- 안정 지향자들은 자본주의에 저항할 수는 있지만 극복할 수는 없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자선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도덕적 과잉을 상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움을 적극 수용하고 유연성과 노마디즘을 강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건 오늘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이루고 있다.
- 아이러니하게도 이걸 반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저는 유연성과 탈중심화에 반대합니다’는 말을 어떻게 하지?
동기부여/동기상실의 이분법에서 벗어나기
- 통제 프로그램과의 탈동일시가 낙담에 빠진 무관심과는 다른 무언가로 등록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
- 내 자아성찰이 항상 저 둘 중 하나로 귀결됐었다. 요즘 왜 이렇게 의욕이 없는지 고민하거나 이제 좀 의욕이 난다고 신나하거나.
- 근데 실은 둘 다 나를 깎아먹는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자기통제다. 그리고 이런 통제를 멈추면 그것조차 의욕을 내기 위한 발판으로 수용되거나 (주말엔 바깥 공기도 좀 쐬어야 다시 일 열심히 하지~) 끝없는 무기력의 늪으로 통한다. (왜 이렇게 허무하지…?)
1979년 10월 6일 - 어디에도 정 붙이지 마.
포스트 포드주의적 재조직화
- 장기적인 것은 없다. ‘유연성’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이는 당연히 영구적인 불안정성을 수반한다.
- 새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삶이 기대는 의무, 신뢰, 헌신 등은 철지난 가치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불안정성을 벗어나는 일시적 출구로서 필요하다.
- 즉 자본주의는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돌보는 수단으로,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방책으로) 가족을 요구한다. 바로 자신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만들고,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 스트레스를 부과하면서) 가족을 침식해가는 그 순간에.
일과 삶은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
- 이제 사람들은 예견할 수 없는 사건에 대응하는 능력을 기르고 전면적인 불안정성 속에서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 부분적으로는 노동자들 스스로의 욕망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 같은 공장에서 40년동안 일하기는 싫으니까… 자본은 판에 박힌 포드주의적 노동에서 해방되려는 욕망을 부추겼다.
- 옛 스타일의 계급 갈등에도 관심 있지만 자신의 투자 수익을 최대화하는 일에도 관심 있는 노동자의 심리학. 이제 식별할 수 있는 외부의 적은 없음.
정신적 고통의 증가
- 자본주의는 다른 어떤 체제에서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기분에 의존하고 이를 재생산한다. 망상과 자기확신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기능하지 않는다.
- 양극성 장애는 자본주의의 내부에 고유한 정신 질환이다. 특히 성취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부추긴다.
- 기업가적 환상 사회에서는 누구나 빌 게이츠나 앨런 슈거가 될 수 있다는 망상이 조성되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공산이 1970년대 이래 감소해 왔다는 사실, 가령 1958년에 태어난 사람은 1970년대에 태어난 사람보다 교육 등을 통해 계급 상승을 이룰 개연성이 더 높았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 포드주의의 끔찍한 불안정성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정신 질환의 화학-생물학화는 당연히 그것의 탈정치화로 이어진다. 이건 자본주의에 이득을 준다.
- 원자적 개인화를 향한 자본적 추진력 강화
- 다국적 제약 회사에 수익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