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

일반적으로 말해 지금은 과학, 특히 자연과학 연구가 사회적으로 제도화되었고 과학자가 그 체제에 완전히 편입되어 실재로 거액의 자금이 정부나 기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그와 같은 현실 속에 있으면서 과학 연구는 정치와 관계가 없다고 하며 논의를 가로막고 비판을 차단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고의든 무의식적이든 극히 정치적인 자세다. 군의 자금을 거부한다고 결의하는 것이 정치적이라 한다면, 그것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정치적인 판단이다. 따라서 한편에서 기정사실을 만들었으면서 다른 한편에서 정치적인 논의를 끌어들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항의 정치성을 은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가 된 것은 정치성의 내실이지 정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정치성을 선택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과거의 전쟁에 관하여 자신들이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책임, 일본이 아시아 각국을 침략한 데 대한 반성이 아니라 패배한 원인을 우선 문제 삼고 역부족이었던 것을 반성하는 태도에 커다란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데, (중략) 그것은 또한 일본의 패배가 정확히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의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국에 대해서만 패배한 것처럼 잘못된 이해를 초래함으로써 그 이전에 일본이 중국에 패배했다는 사실, 얕보았던 중국인들에게 졌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본의 지배계급이 데모크라시를 허용한 건 처음부터 그것을 혁명에 대한 안전밸브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적인 동안에는 데모크라시가 일본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일본에 뿌리를 내리자 데모크라시는 보수적이 되었다.

메모

자본을 독점하는 지배층에 저항한다는 견해

대미종속 강화와 미국 정책에 휘말려드는 걸 막아야 한다는 견해

하지만 대중은 이런 견해 차이나 의미 부여보다는 기시 노부스케라는 인물에 대한 반감으로 움직였다.

직후의 이공계 붐. 원자과와 전자과가 생겨났는데, 연구교육기관의 내재적 논리가 아닌 정치적 목적. 체제의 컨트롤에 너무 따르다 보니 연구자의 자주성을 잃는 일도 생김

인공위성을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성공시키고 미국에선 달만큼은 우리가 먼저 가야한다는 여론이 발생. 이처럼 과학이 자꾸 정치외교적 의미를 가지게 됨. 지금도 위성은 군사용이 압도적.

62년 대학관리법. 대학은 국가사회의 요청과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교육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해야 한다. 경제성장에 부응하도록 + 학생운동을 억제하겠다는 뜻이 다분했다. 교수의 독재와 기득권 등의 전근대적 요소가 남아있을 때였기 때문에 찬성하는 교수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무산. 총장의 협상한 결과 대학에서 알아서 ‘자치’ 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단어만 보면 더 좋아진 것 같지만 실제론 교수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선택) 시위하는 학생들을 보며 대학은 상아탑 같은 곳이고 속세와 떨어져 있는 곳이라 타이르는 교수도 있었지만, 이미 대학도 정치에 침범당한 뒤므로 논리에 맞지 않는다. 심지어 그 교수는 지구과학을 하는 사람인데, 일본에서 기상예보는 원래 군사목적으로 시작되었음.

과학전쟁에서 패배했다는 패러다임을 계속 주입시킨 결과 과학을 맹신하고 진보를 무조건 긍정하는 풍조가 생겨남. 거기에 과학자만이 근대적이고 정치가는 무지하고 기술에 몰이해하다는 류의 자만심, 연구에 충분한 지원이 되고 있지 않다는 피해 의식 등이 쌓였다. 자연과학 연구를 절대적인 선으로 보는 인식.

60년대 안보 투쟁에선 “미군의 군사행동으로 일본의 평화가 침해받는다”는 의식이 강했지만 67년 베트남 반전 운동은 “일본이 전쟁에 가담하고 있는데 이걸 용납할 수 있느냐”하는 가해자로서의 자각에 입각해있다. 중요한 인식 변화.

68, 69년의 도쿄대 전공투. 대단히 미화되어 있지만 여전히 정치에 입각해 있고 60년 안보 투쟁의 인원이 많이 참가했음.

과학기술의 시작. 영어로는 어디까지나 과학과 기술이다. 원래 별개였음. 과학은 철학과 가까운 귀족적인 학문이었고 기술은 하층계급의 노동. 둘이 연관이 있고 상호작용을 한다는게 밝혀진 건 16세기부터. 19세기부터는 과학과 기술이 산업혁명의 필수 요소가 되어 생산체제 속에 편입되고, 과학이 공업사회의 생산력으로 격화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의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이는데 그 타이밍이 엄청 절묘하다. 이제 겨우 교과서도 완성되고 과학자란 단어가 막 생겨나고 제도가 잡혀가던 때이기 때문. 이 때 메이지 유신을 하지 못했더라면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거라는 의견이 있을 정도. (더 빨리 했다면 체계가 부족했을 거고, 더 늦게 했다면 따라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강력하게 주도했다. 그래서 대부분 군사 목적에 편중되었음. (처음엔 식산흥업 부국강병 이었는데 갈수록 식산흥업은 수단이, 강병이 목적이 됨.) 또 당시엔 일본의 전통 장인의 일과는 분리되어 있었다. 상인의 기예를 천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회유해서 끌어모아야 했기 때문. 그래서 더 과학기술이란 말을 강조했는지도.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인문사회는 점점 침체. 일본의 천황 시스템과 맞지 않으니 자꾸 불온 서적으로 금지처분되고 사직되는 일이 반복됨. 그놈의 국체 정신. 반면 이공계는 특별대우를 받기 시작함. 그래서 연구자들은 자진해서 군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 연구비가 풍족하니 윤택하긴 했겠지만 자율이 없다는 점에서 연구의 자유가 있진 않았던 상태.

전시 때는 아예 군 요청으로 학과가 생기고 군 요청으로 졸업 시기가 앞당겨지는 등 완전히 군학협력이 이뤄짐. 그러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 반성이 이뤄지진 않음. 오히려 전쟁 후에 폐지된 제2공학부의 자원을 누가 가져갈 거냐로 이권 다툼 시작. 졸업생들에 대해서도 일본 과학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평 일색. 전쟁에 가담했던 과학자로서, 지식인으서의 반성은 찾아볼 수 없음.

메모2

1960년대 초 이후로 평화, 민주주의, 과학기술은 무조건 긍정적인 의미였으나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 환경 공해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미나마타병 환자도 이때 등장. 민주주의가 소수자를 배제하는 절차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의식하기 시작. 과학자들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음. 가령 실험을 끝내고 남은 화학물을 그대로 하수구에 버린다던지. 이때 차곡차곡 쌓이던 의심 내지는 부정적인 의견들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정점을 찍게 됨.

원전의 안전성은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가 없다. 다양한 조건 하에서 실험했을 때 단 한 번이라도 예상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중대 사고로 직결되기 때문. 따라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밖에 테스트할 수 없는데, 이건 사실 학술 논문에 쓰이는 그럴듯한 증거로서만 기능하지 그 이상의 현실적인 의미를 갖지는 않음.

방사성 폐기물 문제. 인체에 극도로 유해한 방사선을 몇 년에 걸쳐 방출하기 때문에 폐기물이라도 일반 환경에 버릴 수 없음. 하지만 일본에서 처음 원자력발전에 대해 논의했을 때 (1953년) 이런 문제는 전혀 관심 밖이었다. 인위적으로 물리적/화학적 방법으로 무독화할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에 10만년에 맞추어 인류에 영향이 없는 형태로 보관해야 하는데, 사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그게 정말로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인지 체크가 불가능. 더구나 일본은 지진도 많이 발생하고 연평균 강수량도 높기 때문에 여러모로 지하에 위험한 걸 보관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님. 원자력 공학에서도 이 문제를 교묘하게 학술적으로 포장하여 모른 체하고 있음.

1969년, 도쿄대 원자력공학과 학생들이 직접 산학협동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시작. 진짜 정말 대놓고 돈을 받아먹었다; 2012년에 당사자였던 마다라메 교수는 ‘연구 장려를 목적으로 기부금을 받았으나 특별히 문제는 없다 (심사에 영향은 없었다)’고 말했다. 심사에 영향이 실제로 있었나가 문제가 아닌데..

가토 근대화 노선. 도쿄대 투쟁의 특징 중 하나는 비판이 자신들 자신에게도 향한다는 사실을 자각했다는 것. 도쿄대학 해제, 제국대학 해체가 모토였는데 대학은 대학생 개개인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니까. 도쿄대 투쟁의 목적은 대학의 연구와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1968년 가토 이치로가 총장대행으로 앉게 되는데, 이전에 비해 그닥 개선되지 않은 학교 측 제안 + 자꾸 이러면 유급시킬지도 모른다는 협박이 세트로 날아옴.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가토 이치로가 총장대행 자리에 앉으면서 평의회에 내걸었던 조건들이 총장대행의 권한을 계속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이게 싫으면 자기는 손을 떼겠다는 가토의 협박과, 심각한 문제에는 손을 대고 싶지 않고 귀찮은 것에는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교수회의 책임회피와 권한포기의 상호작용이었다. 귀찮은 관리상의 일에서 해방되고 싶기도 했던 교수회 대중은 권한을 포기했고, 이리하여 총장실 단독체제가 만들어짐.

가토 근대화 노선은 결국 대학생과 대학원생의 자치회를 공인한 후에 그들의 운동을 모두 자치회의 틀 안에 몰아넣고, 자치회의 틀을 넘는 형태의 이의 제기에 대해서는 자치회 자체의 자주규제에 맡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데도 여전히 그 틀을 넘는 자에 대해서는 형사처분에 맡기겠다는 의미. 정치적으로는 ‘가토 제안’을 수용하는 학생 일부하고만 흥정하여 그들에게는 동맹휴학 해제의 구실을 부여하는 동시에 당국이 전공투에 기동대를 투입하는 데 대한 대중용 변명과 학생 측으로부터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학생 참가’는 대기업이 기업 내 노동조합을 끌어안고 전투적 일부를 힘으로 제압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로, 형식적 민주주의에 의한 지배의 통상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도 형식적, 제도적으로 민주화된 사회에서 단순히 민주적이라는 것은 체제순응적이라는 의미다. 체제의 변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때로 그 민주적 질서에 항거해야만 한다는 건 전후 30년 가까운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다.

1969년 1월, 결국 기동대 투입. 기동대 투입을 정당화할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 투쟁을 일관되게 적대해 온 학생들 / 빨리 투쟁을 종식시키고 싶어하던 학생들, 즉 민청과 우파 야합집단이 실체를 이루는 ‘7학부 대표단’과 거래를 했다.

도쿄대 전공투만으로 좀 더 대중적인 형태를 만들어 냈다면 좋았을 텐데.

경찰과 매스컴의 협력 관계. 무죄 추정의 원칙은 정말 원칙일 뿐이었다. 이것이 다소 개선된 계기는 1994년 사린가스 사건에서, 사실은 피해자였던 인물이 매스컴에서 흡사 범인처럼 취급된 것에 대한 반성으로 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