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그랬다.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다. 어딘가 가까스로 도착한 느낌. 중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튕겨진 것도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안도가 밀려왔었다. 우리 분수에 이 정도면 멀리 온 거라고. 욕심부리지 말고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영우가 떠난 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조용해진 이 집에서 아내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도배지를 들고 있자니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절벽처럼 가파른 이 벽 아래였나 하는. 우리가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 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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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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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참 남의 얘기 열심히 듣는 나이인 거 같아.
네?
애들 말이에요. 선생 대우해주느라 그냥 듣는 척하는 건진 몰라도. 같은 척이라도 내가 하는 거랑 다르다니까. 술자리서 교수들이 떠들 때 나는 느슨하게 들어요. 음, 저 말은 지루하군. 음, 저 얘기는 건질 만하네. 골라가며 듣는다고. 근데 애들은 안 그래. 똑같이 지루한 얘길 들어도 더 열심히 지겨워하고 더 열심히 저항한단 말이야.
그렇죠.
그죠? 그게 젊음이지. 어른이 별건가. 지가 좋아하지 않는 인간하고도 잘 지내는 게 어른이지. 안 그래요, 이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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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오래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자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병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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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어릴 땐 집 현관문을 닫으면 바깥세상과 자연스레 단절됐는데, 지금은 그 ‘바깥’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하는 모양이다. 아직까진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모바일 게임을 하고, 실시간 인터넷 방송을 즐겨 보는 정도 같지만, 가끔 아이 몸에 너무 많은 ‘소셜’이 꽂혀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온갖 평판과 해명, 친말과 초조, 시기와 미소가 공존하는 ‘사회’와 이십 사시간 내내 연결돼 있는 듯해. 아이보다 먼저 사회에 나가 그 억압과 피로를 경험해본 터라 걱정됐다. 지금은 누군가를 때리기 위해 굳이 ‘옥상으로 올라와’라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이니까. 아이가 지금 나와 식사를 하는 중에도 실은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얻어맞으며 피 흘릴지 몰랐다. 재이는 틀림없이 이런 나를 고루하다 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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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보면 눈에 파란 물이 들 것 같은 하늘과 테두리가 선명한 뭉게구름, 초원 위에 드문드문 솟은 풍력발전기를 보자 ‘평화로운 해양성기후’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이 섬나라 하늘이 언젠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본 하늘, 전쟁에 지친 병사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며 회상한 풍경과 닮아서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앞의 ‘청명’이 남의 집에서 떼다 붙인 커튼처럼 느껴졌다. 눈앞에서 아름답게 펄럭이는 ‘현재’가 좋았던 과거 같고,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한데, 뭐가 됐든 내 것 같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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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이 된 건 아니었다.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다거나 감동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리로부터 당시 내 주위 인간들에게선 찾을 수 없던 한 가지 특별한 자질을 발견했는데, 그건 다름아닌 ‘예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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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이 논문이 너무 안 써진다는 말을 덧붙이며 엄살을 부렸다. 나는 맑은 파랑을 등지고 앉은 현석의 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백파이프의 깊고 단단한 소리가 아주 먼 곳까지 퍼져나갔다. 현석에게 긴 유학생활에 생기는 이지러짐, 욕망을 너무 오래 유예한 사람의 보상 심리랄까, 복수심이 자라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이십대 때 섬세함은 까다로움으로, 정의감은 울분으로, 우수는 의기소침함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염려했는데, 주제넘은 생각이었다. 변한 건 내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