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듣는 시간
“너는 어떻게 말해? 고맙다는 말?”
처음이었다. 나의 언어로 고맙다는 말을 어떻게 하는지 묻는 사람은. 그냥 고맙다고 말하면 되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엄마와 나만의 약속인 수화로 가득찬 마음이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 이후로 쓴 적이 없는 수화였는데 갑자기 튀어나왔다. 손으로 상대방을 가리킨 다음에 심장 근처로 가져가 원을 그리며 쓰다듬는 일련의 동작을 그 애는 천천히 정확하게 따라 했다. 그것은 이제 지구상에서 단 세 명만 알고 있는 단어가 되었다.
-
사람들은 내가 대충 눈치로 소리를 맞혀서 이해하는 걸 완벽히 들어서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사람들은 나를 훨씬 덜 배려했다. 나는 수술 전에 외로웠고 수술 이후엔 더욱더 외로웠다.
-
“나한테 그동안 왜 얘길 안 했니. 네 인공 와우 장치로는 음정을 못 듣는다고.”
나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민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몰라서 내가 청각 장애반 선생님께 물어봤어. 적어도 나한테는 얘기해 줬어야지.”
“너랑 같이 밴드 하고 싶었어. 이제는 내가 소리를 듣는다고 다들 나보다 더 기뻐하고 들떠 있는데 그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
“수지야. 아냐.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네가 소리를 듣건 안 듣건 상관없어. 하지만 밴드는 아니지.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밴드 만들자고 설쳤잖아. 왜 내가 널 괴롭게 만들도록 내버려 두었어?”
“괴롭지 않았어. 음정을 못 들어도 음악은 음악이지. 나는 전혀 못 들을 때도 음악이 좋았어. 앰프 앞에 있으면 진동도 느낄 수 있고, 네가 연주하는 모습, 노래 부르는 모습이 좋아. 그때 내 머릿속에는 나만의 음악이 나와. 나는 정말 나만의 음악을 듣고 있어. 다들 결국에는 머릿속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듣는 거잖아?”
한민의 선글라스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말했다.
-
“일단 스물일곱 살까지는 살아야지. 그게 제일 어렵다고.”
한민이 말했다.
“스물일곱 살이라니. 그때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어른이 되기는 할까? 어른이 되면 자아 발견도 하고 그러는 건가? 나는 그러기 싫은데. 안 그래도 된다고 말해 주는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냥 내가 누군지 모른 채로 살아도 되는 거잖아? 그런데 어른들은 맨날 대학 얘기만 하지. 거기 가면 다 자아를 찾아 나오는 것처럼. 가 봤자 젊음의 무덤밖에 없을 텐데.”
“수지야, 나 대학 갈 거야.”
“무덤 파러?”
-
“면접이 정말 거지 같았어. 장애인 수시 전형이었거든.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다는 말이 제일 싫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똑같지 않다는 걸 강조할 뿐. 그런 말이 필요 없는 세계를 만들어 주지 않을 바에는 아무 말도 안 했으면 좋겠어.”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한민이 그렇게 열받은 모습은 처음 봤다. 그냥 들어 주어야만 하는 시간 같았다.
“면접관이 뭐라는지 알아? 베토벤은 귀머거리지만 훌륭한 곡들을 많이 남겼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베토벤은 청력을 잃기 전에 이미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고, 청력을 잃지 않았다면 훌륭한 곡들을 더 많이 남겼을 거라고 대답했어. 왜 내게 극복을 강요해? 대판 싸우고 싶었는데 참았지.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는데 붙었어. 그게 가장 짜증나. 경영학 좆도 관심 없는데.”
-
“수지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너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네가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행동하는 방식대로 너 자신에게 행동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너 자신과 친구가 되고 나면 너 자신을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거야. 불필요한 위로를 하지 않게 되지.”
-
“친구가 데리러 올 거에요. 어떤 사정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울고 싶으면 더 울어요. 나도 오늘 점심시간에 점심 안 먹고 화장실에서 울었어요. 우는 게 더 급해서.”
-
나뭇잎을 나무의 자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내 것이 아니라고 미련 없이 나뭇잎들을 떨궈 버리는 나무들도 있겠지. 나뭇잎을 싫어하는 니무는 어떻게 살까? 나는 계절이 바뀌는 내내 나뭇잎을 지켜봐야 하는 나무의 고독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하나가 음이어서, 나무만 들을 수 있는 긴 노래 한 곡을 사계절 내내 연주한다면 어떨까, 그래도 나무는 고독할 것이다. 나무를 오래오래 바라보면서 문득 시를 쓴다는 건 결국 태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시선과 태도의 문제다. 시도 사랑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