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인용
장애를 받아들이는 일은 장애를 어떤 가치 있는 산물이라고 믿는 일과는 다르다. 장애권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 내용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내용이다.
장애나 질병을 수용하는 것과 소아성애를 수용하는 것은 뭐가 다른가? ㅡ 수용은 그럴만한 이유도 별로 없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별로 유용하지 않을 때조차 삶의 전반적인 기획의 일부로서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기꺼이 감당하는 결단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정체성을 수용한다는 말은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심리적인 이해가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감당하고 책임지겠다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나는 나의 몸과 정신의 상태를 극복할 수 없으니 몸과 정신에 따른 결과를 책임질 필요가 없고, 책임질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내 몸이 자유롭고 존엄하고 가치 있어야 한다는 책임을 지기로 결단한다. 장애로 인한 삶의 결과를 나는 책임질 수 있었다고 간주한다. 이것을 깨달을 때만이 자유로워질 수 있고, 어른이 된다는 건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인생을 돌아보며 구축한 가상의 자아는 그 이야기의 일관성,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미래의 우리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자기 서사의 신뢰성을 위해 그에 맞춰서 행동하고 살아간다면, 가상으로만 존재하던 자아는 실재가 된다.
뉴욕대 로스쿨 교수 켄지 요시노는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 소수 인종, 성적 소수자등을 대놓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 사람들에게 주류 집단에 동화 되기를 요구하는 이른바 커버링 압력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커버링은 말하자면, 자신이 가진 비주류적인 특성을 ‘티 내지 말라’는 요구다. 여성을 차별하지는 않지만 여성의 몸이 가진 특별한 상황 (생리나 출산 등)을 티내지 말 것을 암묵적,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조직 문화,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지만 장애로 인한 특성을 숨기기를 원하는 사회 분위기 같은 것이 그 예다.
괴물이 될 필요는 없다. 당신의 자녀나 형제에게 장애가 있고 당신이 그를 수용하기 어려워하더라도, 그들은 어머니, 아버지, 누나, 동생인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당신이 장애를 수용하고 역경을 돌파하는 당당한 삶을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부모, 형제, 연인, 친구, 이웃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좋은 이유를 가질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삶이 존중받을 만하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입증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투쟁 속에서 어느 순간 강인한 투사의 모습이 아니라면 결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외로운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좋다. 장애를, 예쁘지 않은 얼굴을, 가난을, 차별받는 인종, 성별, 성적 지향을 지닌 채 살아가면서도 모든 것을 당당히 부정하고, 자신의 결핍을 심층적으로 수용하고 법 앞에서 권리를 발명하는 인간으로 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게 서야면 우리가 존엄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수용하고 돌보려 노력하지만 결코 완전하지는 못할 이 ‘취약함’이야말로 각자의 개별적 상황과 다른 정체성 집단에 속해 있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공통분모일 것이다.
메모
믿음과 수용. 수용은 철저히 자발적인 선택이다. 또한 객관적 근거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음주운전하다가 뺑소니를 친 사람을 대할 때 판사와 뇌과학자의 수용은 다르다. 그리고 수용은 내 자발적인 선택이기 때문에 내 삶의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동권을 사회권으로 볼 것인가 자유권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가 해답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