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속은 자와 속인 자: 국적 은폐의 내셔널리즘

1960년대 말부터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우리나라에 방영되기 시작. 하지만 일본 국적은 방송국에 의해 효과적으로 은폐되었다. 오프닝/엔딩 등의 주제가, 등장 인물의 이름 등이 전부 로컬라이즈 되었기 때문. 그리고 1980년대에 이르러 60년대의 어린이들이 20대로 성장하고 VTR 이 보급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비공식 경로로 입수하기 시작.

이는 여러 모로 충격이었는데, 첫 번째 이유는 기성 사회의 이중성. 정부가 표면적으로는 (90년대 말까지 정부는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일본 문화 배급을 전면 금지했었음) 일본 문화를 규제하면서 실질적으론 그렇지 않았다는 점.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 없이 일본 문화를 좋아했다는 사실의 자각. 갑자기 자기 자신을 검열대에 올려놔야 하는 신세가 됨.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미디어에서 일본 문화의 흔적을 지우는 건 과거의 청산을 위한 과정이었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선 정부 정책 하에 일본 미디어에서 국적을 은폐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 1990년대엔 이런 반향도 약화되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것이지 일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는 방어 전략도 불필요하게 돠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데, 위와 같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커밍아웃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서 수십 년 동안 그것을 얽매어 온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거꾸로 재빠르게 포기되거나 침묵 속에 은폐되는 현상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대한 이 포기와 침묵은, 한국인으로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심미적 선택과 실천에 대해 여전히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내면화된 내셔널리즘의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 보려는 시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불행하게도 그러한 시도는 결국 또 다른 기만을 초래하기 쉽다.

1.2 재패니메이션과 아니메 - 호칭의 이데올로기

재패니메이션이란? 일본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인가? 투자된 자본의 출처? 감독의 국적? 재일교포인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일본에서는 엄연히 일반 명사인 단어의 본래 현실을 일방적으로 무시한 채 지역적으로 또는 국가적으로 특수화시켜 그것의 이국적 발음과 철자와 뉘앙스를 흡수, 소비하는 일은 서구 세계의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과 관련되어 있다. 이 서구 중심주의 이데올로기는 아니메라는 말을 애니메이션으로서 공유하는 언어 공동체의 정체성을 왜곡시킨다. 예컨대 서구 사회에서 어떤 일본 사람이 ‘나는 아니메를 많이 본다’라고 말할 때, 화자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녀/그는 어디까지나 ‘일본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서구 언어의 제국벅 보편성은 ‘동양=오리엔트’의 언어를 파편적으로 흡수해 가는 동시에 방언으로 만들어 버린다.

1.3 오타쿠에 대하여 - 전자 자궁과 미디어 사이보그

1983년 ‘만화 부릿코’라는 잡지에 나카모리 아키오의 글에서 처음으로 만화 팬들이 오타쿠로 불렸으며, 그 전에 코믹 마켓이라 일컬어지는 공개적 모임에서 서로를 오타쿠로 지칭하던 경향이 있었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사이라도 단지 취미 대상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익명성을 유지하며 소통하기 위한 언어적 장치.

나카모리 아키오의 글은 만화 팬들 사이의 호칭은 오타쿠에 부정적인 함의를 부여했는데, 오타쿠를 타자로 설정하고 이들로부터의 차이화를 통해 정체성을 획득하려는 전략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그런 전략을 내세운 사람들은.. 바로 신인류!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타쿠라는 단어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미야자키 츠토무. 특히 1980년대는 경제 호황이었기 때문에 메인스트림에 녹아들지 않는 오타쿠의 생활 양식이 더 이상하게 보였음. 그리고 1960년대를 거치면서 여성의 순결과 함께 남성의 동정은 부정적 가치로 전락했는데, 1990년대에는 이게 오타쿠와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음. 거부당하고 상처받고 싶지 않은 심리 -> 커뮤니케이션 공포증 -> 오타쿠 같은 흐름.

다시 1990년대. 에반게리온 등의 애니메이션이 서구권에서 인정 받으면서 오타쿠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다. 갑자기 일본 문화라는 틀에 끼워 은근슬쩍 찬미하기 시작.

여기에서 우리는 오타쿠가 산업이라는 이름 아래 내셔널리즘으로 회수당하는 입장에 직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 함정으로부터의 감성적 반발이야말로 오타쿠의 실존적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식하지 못한 채 역으로 기존 체제에 이용당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폴커 그라스묵 (Volker Grassmuck)./ 오타쿠가 언더그라운드이지만 시스템에 반항하지 않으며, 기성품들을 변화시키고 조작하고 전복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소비주의의 신격화이자 동시대 일본의 자본주의를 위한 이상적 일꾼이라고 표현. 정보 페티시즘. 미디어와 테크놀로지의 어린이. 미디어 사이보그. 전자 자궁 안의 에일리언.

1.4 애니메이션은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다? - 성장의 히스테리

아직도 애들처럼 만화를 보냐는 논쟁. 그런데 여기서 대립하는 두 입장이 정작 어린이에 대해선 완전히 일치하는 견해를 갖고 있다. 어린이를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의 교묘한 합의가 이뤄지고 있음.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린이에 대한 개념은 놀랍게도 근대 이전엔 존재하지 않았다. 서구에서는 19세기 초까지, 일본에선 19세기 말까지 어린이는 그저 작은 어른으로 간주되었다. 19세기 초엔 젊은 층을 공장 노동자로서, 공동체 구성원으로 다시 생산할 필요가 있어서 의무 교육과 징병제를 도입했는데, 이를 위해 어린이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하고 무지한 대상으로 규정한 다음 성장이라는 과제를 부여했다. 그러나 개개인의 성장은 제도에 의해 완수되는 게 아니었기에, 오히려 갖가지 성장의 제도적 기준들은 성장 자체를 한 사람의 삶에서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아직도 애들처럼 만화를 보느냐’라는 식의 담론은, 그렇게 말하는 주체가 자신을 더 이상 미성숙한 ‘어린이’가 아닌 성숙한 ‘어른’이라 생각하(고 싶어하)는 심적 태도에 근거한다. 하지만 성숙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성숙 자체가 완성될 수 없는 목표이기에 그와 같은 개인적 믿음은 늘 위태로운 처지에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미성숙으로의 전략에 대한 불안은 끊이지 않는다. 요컨대, 격리된 어린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을 지향하기 때문에 미성숙한 것이다.

이 성장의 히스테리에 있어서 어린이는 어른이 어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게 해 주는 타자로서 이용되고 또한 애초부터 그럴 목적으로 발명/발견되었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는 바로 그런 ‘어린이’를 찾아 내고 만들어 내는데 효과적인 물질적 실마리로서 채택되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의 담론이 실은 미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말 그대로 성년자와 미성년자의 관계는 다수자와 소수자라는 권력의 문제이다.

1.5 폭력의 이미지. 이미지의 폭력

일본 애니메이션이 폭력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1. 어린이를 폭력으로부터 떨어져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어서. 하지만 어린 시절의 갈등이나 폭력 요소를 제거한다고 그것이 꼭 올바른 성인을 키워낸다는 보장은 없다 (프로이트 이론의 잘못된 실천) 또한 이미 오늘날의 어린이들은 각종 종류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음. 소수자를 향한 다수자의 폭력. 이렇기 때문에 오히려 애니메이션이 일종의 자기 치료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음. 신흥 종교도 비슷한 느낌.

또한 재패니메이션에서 폭력이 이야기의 구조를 이룬다는 건 20세기 일본 사회의 대규모 폭력들 (치안유지법, 태평양 전쟁, 국가 총동원 체제, 원자 폭탄) 등을 생각해 봤을 때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님.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한 작품으로 디즈니를 많이 거론하지만 사실 디즈니 작품들도 매우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다. 디즈니가 지향해 온 이른바 보편적인 가치들은 미국 백인 이성애자 남성 부르주아 입장에 서 있을 때만 가장 유리한 가치들이기 때문. 지역, 문화, 인종, 계급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야기들.

1.6 재패니메이션 신화와 한국 문화 산업의 욕망

재패니메이션이 세계를 제패했다! 90년대에 우리는 IMF 위기에 처해있었는데 일본은 애니메이션으로 경제적 성과를 이뤄내니까 너도나도 세계를 제패했다는 표현을 쓰며 찬양하기 시작. 그런데 그 세계란 대체 어디를 가리키는가? 바로 미국이나 유럽. 서구권.

메이지 유신 후의 일본은 구미 열강에 의해 식민지화될 지도 모르는 위기적인 상황에 스스로를 문명의 서양과 야만의 동양 사이에 위치하는 반개로 설정하면서 자발적 의지인양 ‘문명 개화’라는 슬로건으로 구미 열강의 모방에 내재하는 자기 식민지화를 은폐, 망각하였으며, 그럼으로써 식민지적 무의식이 구조화되었다.

구미 열강보다도 더 구미 열강다워지는, 모방으로의 과잉 욕망 => 일본에서 한때 디즈니를 모방하려던 시도로 연결지을 수 있음. 우리나라도 비슷한 시도를 했었고. 따라서 재패니메이션이 세계를 제패했다 -> 일본만큼 고속 성장을 이뤄낸 한국도 비슷한 걸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는 phrase 였던 것.

그러나 재패니메이션이 정말 세계를 제패했나? 디즈니조차 그러지는 못했다. 결국 “한국 애니메이션이 앞으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는 제국주의적 꿈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의 아시아적 모델로서 재패니메이션이 지금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는 신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재패니메이션에 잠식당할까 두려워 하면서도 재패니메이션처럼 세계를 제패하고 싶어하는 모순.

하지만 도대체 재패니메이션답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재패니메이션이 그러한 식으로 말하질 만큼 어떤 단일한 대상일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재패니메이션은 하위 문화가 낳은 새로운 상상의 지리학, 다시 말해 서브오리엔트 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