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애니메이션에 있어 만화란 무엇인가

영화는 여러 장의 사진으로 이뤄져 있지만 사진과 영화를 같은 종류의 예술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만화와 애니메이션도 다른 장르의 예술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스콧 매클루드 - 만화의 이해. 만화를 ‘정보를 전달하거나 보는 이에게 미적인 반응을 일으킬 목적으로 그림과 그 밖의 형상들을 의도한 순서로 나란히 늘어놓은 것’ 이라고 표현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한 칸 그림인 ‘카툰’은 만화에 속하지 않는다. 카툰은 화법, 즉 그림을 그리는 양식이고 만화는 그런 기법을 채택한 미디어다.

모든 미디어에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담론이 존재한다. 문학적 재현에 동원한 언어, 그 언어를 배열한 순서와 방법, 어조, 작가가 취하는 입장과 태도 등등. 그래서 만화를 원작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도 두 작품의 담론은 같을 수 없다.

카툰은 애니메이션 산업에 있어 심미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갖는데, 대량 생산의 필수 요건인 ‘분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 애니메이션에서의 카툰은 ‘선’이라는 조형 요소로 이루어지므로 단순화와 단위화가 비교적 쉬운 성질을 내포한다.

클레이 애니메이션보다 셀 애니메이션이 더 오래 살아남은 것은 일반 관객의 취향 차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상업적으로 더 효율적인 방식이었기 때문. 미학이 아닌 경제학의 논리로 결정된 부분.

2.2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예술과 기술

한국에서는 애니메이션을 기술력으로 판단하는 일이 매우 빈번하다. 그 작품은 셀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은 쉽게 하지만, 그 작품은 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졌다고 표현하는 일은 잘 없다.

근대적 예술 개념의 기초를 제공한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은 예술과 실용적 기술 사이의 구별을 하지 않았다. 예술과 기술이 오늘날에 가까운 의미를 갖게 된 건 르네상스 시기.

예술 / 기술의 개념은 우리가 추측하듯이 항상 일관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시대에 따라 큰 변화를 겪어 왔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따져 볼 때 양자가 오랫동안 서로 구별되지 않았다는 것, 또는 적어도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곧 예술만이 아니라 기술도 충분히 ‘예술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 이후 19세기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노동과 더불어 기술은 빠르게 분화되어 갔고 그리하여 철저히 산업 자본의 이윤추구를 위한 도구적 지식으로 전락해 버렸다. 오늘날 아무리 전문화된 고급 엔지니어로 할지라도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라기보다는 기업의 신상품 개발을 위한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다.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vs 풀 애니메이션. 우주 소년 아톰의 예시. 1960년대의 일본 관객은 이미 디즈니 작품을 극장에서 많이 접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의 고전적인 테크닉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사진의 슬라이드 쇼에 가까웠던 아톰에 열광한 이유는? 그러한 단점을 상쇄시킬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이야기라서? 하지만 테크닉이야말로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실질적인 방법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몇 장의 그림을 동원했냐고 묻는 건 음악에서 몇 개의 음표를 썼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질문. 중요한 것은 드로잉의 단순한 매수가 아니라 이미지들이 어떻게 배치되어 어떤 화음을 보여주는 것인가이다.

2.3 가부키, 에마키, 모노가타리 그리고 사소설로서

피터 정. 미국에서는 애니메이션을 인물, 캐릭터의 연기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개념은 동작이나 연기보다는 그림 위주. 이러한 차이는 일본식 연극과 서양식 (특히 그리스) 연극의 차이로 거슬로 올라갈 수 있다.

일본과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은 그림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지만, 체코에서는 애니메이션과 연극이 밀접한 관계에 있어 인형 등의 입체적 조형물을 많이 사용한다. 체코의 역사와도 관계가 있는 부분 - 인형극은 17세기 이후 검열을 피해 독일어가 아닌 체코어로 즐길 수 있던 유일한 예술이었다.

일본 전통 미술의 특징 살펴보기. 다만 어떤 지역의 문화 예술이 갖는 특성이란 대개 역사적/사회적으로 형셩된 것이므로 이것을 일본 전체의 특성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실제로 19세기까지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는 당시의 일본에 속해 있지 않았다.

인상성 - 자연으로부터 받은 주관적 인상을 나타내는 태도 장식성 - 대소의 비례를 무시하고 자연물을 대담하게 변형시켜 도식화하는 표현 상징성 - 조형적 분석으로는 어려운 정신주의적 측면 감상성 - 센티멘탈리즘을 넘어선 정감성과 정취성의 표현

연인이 보일듯 말듯 걸어가는 풍경에 벛꽃이 휘날리는 장면 - 벚나무 꽃잎으로 다른 모든 설명을 대신하며 감정을 강렬하게 형상화한다.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미덕. 운동의 인상주의.

서양 회화가 클로즈업에 의한 한 점의 응시와 집중화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일본 회화는 전체적 화면 구성에 의한 원거리 촬영을 기조로 하여 같은 화면 안에 여러 중심으로 전개된다. (미조구치 겐지) 에마키. 내레이터의 보이스 오버.

재패니메이션의 미소년, 미소녀 캐릭터 -> 가부키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호한 성 정체성과 성 역할을 지닌 캐릭터들이 대중 매체 산업의 성 상품화 이전에 일본 문화의 한 전통으로 존재하여 왔었음을 시사한다.

모노가타리. 특히 귀종류리담 (영웅이나 신처럼 신분이 높은 주인공이 천한 신분이 되어 타지를 떠돌며 시련을 겪다가 결국 극복하고 영광을 회복한다는 설화의 유형)의 유행.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 속에서 꽤 긴 폭에 걸쳐 있고, 특히 패전의 역사와도 연관되어 있음.

사소설. 사소한 신변사의 의미를 반추하는 일에 집중하는 장르. 일본 문학은 물론이고 천황제로 대표되는 일본의 권력 구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라타니 고진 -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 ‘귀를 기울이면’ 같은 작품에서, 매우 사실적인 이미지와 현실에 가까운 풍경을 그려내지만 거기엔 ‘기법적으로 얻어진 현실’만 있을 뿐 그 현실을 구성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는 결여되어 있다. 인물들은 대체로 가정이나 교실 같이 이미 주어진 한정된 공간에만 머물고, 감독의 시선은 그들의 삶을 이루는 실질적 조건들에 무관심하다. 이런 작품 안에도 ‘나’는 물론 존재하지만, 근대적 관점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나’이다.

2.4 ‘무국적적’이라는 것에 대하여

왜 재패니메이션에는 무국적적이라는 말이 자꾸 붙을까. 디즈니를 보면서 무국적적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디즈니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유럽 동화에 기초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유럽=보편이라는 제국적인 등식. 바깥의 모든 것을 자신의 보편성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점에서 디즈니는 지극히 미국적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재패니메이션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기에, 이런 차이를 은폐하기 위해 ‘무국적적’이라는 심미적 담론을 확대.

일본의 문자 체계. 일본은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의 세 가지 문자를 사용하는데 이처럼 어떤 말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문자 조직이 천 년 이상 지속된 곳은 일본이 유일하다. 추상어의 외래성을 끊임없이 명시하고 사람들이 이를 민감하게 대함. 즉 일본 사회의 고유한 특성은 외래적인 것이 결코 내면화되지 않는, 내부화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한편 일본과 한국의 애니메이션에 한하여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무국적성의 양상은 서로 아주 유사하게 서구 중심주의, 혹은 오리엔탈리즘의 전도된 형태인 옥시덴탈리즘으로 수렴한다.

아니메가 무국적으로 되었다는 것은 그림을 그린다는 의도적인 행위 속에서 나온 것이므로 반드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이 무심코 어떤 귀여운 여자의 얼굴을 그리려고 한다고 할 때 (나의 경우는 금발이었는데) 대개 우리가 늘 보는 일본인의 얼굴은 아닐 것이다. 늘 보는 얼굴이 가장 그리기가 쉽기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애니메이터가 그릴 때에는 일본인의 얼굴을 단연코 그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지금만큼 일본인이 일본인인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시대도 드물다. 다이쇼 모던 시절부터 일본인이 일본인인 것을 어딘가에서 기피하기 시작하고 있다. (오시이 마모루)

2.5 머리카락 색깔의 무국적 논쟁

다양한 머리 색깔의 캐릭터들이 나오는 걸 자유롭고 개방적인 표현의 자유로 볼 수도 있겠지만, 검은 머리색의 캐릭터를 기피하는 애니메이터들은 왜 그런 것일까. 검은 머리색이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독특한 컬러가 되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 전 시대에 흑백 애니메이션을 볼 땐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다른 예술에서도 검은 머리 캐릭터가 불편하다는 주장은 제기된 적이 없다.

재패니메이션의 이미지가 현실의 색채에 좀 더 가까워지자 그 속에 잠재해 있던 일본 사회의 어떤 무의식이 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 사회가 스스로를 (또는 아시아를) 부정해 가는 과정에서 검은색 머리카락이 일본 고유의 것 또는 아시아 고유의 것으로 이해됨으로써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모든 캐릭터가 검은 머리여야 한다는 말이 전혀 아님. 무조건적으로 획일적인 자기 긍정은 파시즘의 잠재성을 안고 있으며, 솔직히 머리색이 뭐가 중요하겠어.)

디즈니도 늘 가족과 PC 를 얘기하지만 한번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본 적이 없다.

오시이 마모루의 고민은 결국 ‘왜 일본인 캐릭터의 머리색을 검은색으로 하지 않는가’가 아니라 ‘일본인이란 누구인가’로 이어지는 근본적인 것.

2.6 연출, 감독 그리고 작가

감독보다 프로듀서가 영화에 대해 더 잘 아는 모순, ‘관객들의 해석에 맡긴다’는 대답을 내놓는 무책임함. 1920년대부터 이미 할리우드의 감독들은 최종 편집에 대한 권한이 없었다. 할리우드의 장편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 모두들 인어공주, 알라딘 등에 대해 디즈니의 작품이라는 사실만 기억하지 시나리오를 누가 썼고 감독은 누가 했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재패니메이션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일본의 경우 만화 문화가 너무나 지나치게 발전하게 되어서 만화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일이 많고, 따라서 애니메이션에 일차적인 오리지널리티를 창조하는 부분을 만화 작가 쪽에게 내맡겨 버리고 있다. 그렇게 하면 제일 중요한 부분을 남의 손에 넘겨 버린 까닭에 연출 기술은 무척 능숙해지고 그림도 무척 좋아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에서 과연 무엇을 그려낼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 자주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일차적인 과제는 그것이 과제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가와모리 쇼지)

오리지널리티를 고민하지 않고 시나리오의 힘에 의존하는 감독과 그걸 탈피하고자 하는 감독들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누군가는 ‘왜 한국 애니메이션에는 그런 감독들이 나타나지 않느냐’고 탄식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탄식이야말로 한국 애니메이션의 좀처럼 변하지 않는 구조에 기여하고 있다. 마치 실천을 하는 자가 늘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애니메이션 영화의 관객인 동시에 다른 애니메이션 영화의 스태프가 될 수 있으며, 또한 하나의 예술 작품은 창작자의 활동에 의해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의 참여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어 가기 시작한다.

2.7 비평 = 비판이 없는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