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제국 -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 애니메이션
3.2 다이쇼 낭만주의와 제국주의 환상 (1917 ~ 30)
최초의 애니메이션. 심지어 이때 평론도 존재했다. 하지만 내셔널리즘과 서구 미학에 입각한 분석이 주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다른 나라들처럼 애니메이션이 선전/계몽을 위해 사용됨. 대외적으로는 러일 전쟁에 이겨 자아 도취에 가까울 정도로 근대화의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음. 다이쇼 로망, 다이쇼 데모크라시.
일본이 어떻게 아시아를 벗어나 세계로 진출하여 서구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인가에 대한 의식과 욕망을 아주 잘 확인할 수 있다. 서구 스포츠를 소재로 하는 애니메이션도 많아짐. 여기서 등장인물의 신체는 각 개인의 신체가 아닌 국가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날조되었다. 신체가 곧 이데올로기의 스크린으로 사용됨.
다이쇼 말기에는 ‘만화 영화가 돈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져 문부성에서도 더욱더 박차를 가해 계몽을 위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 이때를 애니메이션의 개화기로 칭하는 사람도 있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애니메이션이 이만큼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건 당시 문부성이 어린이들의 영화 관람을 금지시켰었기 때문. 과연 이게 좋은 일이었을까?
3.3 팽창과 전향의 시대로 (1930 ~ 40)
미국의 작품들에 점점 밀리기 시작! 낮은 가격에 흥행이 보장되어 있으니까. 오늘날의 한국의 TV 방송국들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선호하는 이유와 완전히 같음.
애니메이션 영화에서도 다른 예술 영역에서처럼 그 미학은 테크닉 / 테크놀로지만이 아닌 경제의 문제였다. 이런 점에서 신세계의 개척 내지는 프론티어 정신이라는 날조된 명분 하에 토착민들을 대량 학살하고 나서 손에 넣은 대량의 자원, 그리고 이어서 물밀듯 유입되는 저임금 이민 노동력에 기초한 미국의 경제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셀 드로잉의 풀 애니메이션처럼 막대한 물자와 노동에 기초했던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미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제국주의 일본도 북으로는 홋카이도를, 남으로는 오키나와와 타이완을, 그리고 이어서 대한제국까지 식민지화했지만 그것이 곧바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자들을 위한 혜택으로까지는 되어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에 새로운 흐름이 생겼는데, 바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애니메이션. 20년대 후반의 일본은 공산주의 붐이었다. 세속적 성공을 거부하고 반전 메세지를 담은 애니메이션이 등장. 그러나 1932년 치안 유지법 통과로 더 이상 공개적 장에서 상영할 수 없게 됨. 생각보다 유행이 빨리 끝나버렸다.
군사적 색채가 유독 짙어지기 시작. 1933년엔 영화 국책 운동이 시작됐다; 점점 자본에 흡수되어 간다.
위와 같은 경향의 작품들 속에서 완료 시제의 인간화된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현재 진행 시제로 인간을 모방하고 있을 뿐인 원숭이라는 동물은, 서구의 인간 이데올로기 안에서 19세기 말의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야만의 아시아로부터 문명의 유럽으로 향해 가는 중간 단계의 ‘반개’로 규정했던 일본을 가장 잘 재현하고 있는 아이콘이었다. 동물과 인간의 중간인 원숭이가 말 그대로 유인된, 즉 유사 인간이라는 점에서 이 아이콘은 양심을 가진 유사 인간의 전후 버전인 우주 소년 아톰보다 훨씬 앞서 나타난, 아마도 일본 애니메이션 최초의 인조 인간, 또는 안드로이드였다. 더 나아가 <헤엄쳐라>에서 원숭이가 자신의 승리를 위해 착취하는 야만의 괴물 갓파란, 일본이 서구 열강과의 패권 경쟁 속에서 획득한 아시아 식민지이거나 근대화 이전의 일본 그 자신일 수 있었다. 원숭이는 자력으로 승리하지 못한 것에는 부끄러워 하지만, 자신이 괴롭힌 갓파에게는 미안해 하지도 않고 사과하지도 않는다.헤엄쳐라>
3.4 태평양 전쟁과 국책 애니메이션 (1940 ~ 45년)
1939년 영화법 제정. 본격적인 나치 따라하기.
‘총동원’이라는 요소 정도만 제외하면, 위의 규정은 희한하게도 오늘날까지 여전히 통용될 수 있을 법한 건전한 내용뿐이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마치 ‘국민’이라든가 ‘민족성’이 본래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그러한 가치들에 맞춰 문화 영화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역으로 문화 영화가 바로 그 국민과 민족성을 만들어 내는 데에 기여하였고 또한 이를 위해 문화 영화가 강제적으로까지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도화된 폭력이었다.
필름을 군수품으로 지정해 민간인은 사용할 수 없게 만들고, 1941년엔 내무성이 중심이 되어 ‘일본선화협회’를 설립. 영화 제작사들을 흡수/합병하고 나중엔 분야별 제작 회사를 3개로 한정지어 버린다.
쇼와 시대에 접어들어 군부는 군의 통수권이 천황에게 있다는 헌법의 조항을 방패로 삼아 천황의 군대라 자처하며 통수권의 독립까지 주장하였고, 정부의 국무에 개입할 만큼 이미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대체적인 플롯이 소년 -> 군입대 -> 대활약 or 소년 -> 군입대 -> 새사람! 관객으로 하여금 서구와의 전쟁과 아시아에의 침략을 긍정하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제국주의적 주체로 일어서도록 고취하는 의도. 영국과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영미인을 ‘뿔이 달린 도깨비’로 그려내고 간첩 신고를 장려하는 내용도 늘어남.
파시스트 애니메이션의 정점에 선 모모타로. 이전에도 영웅 캐릭터로써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했던 모모타로가 점점 변질되어 간다.
7년 전에 등장했던 ‘해국 다로, 신 일본 섬 만세’에서도 시골 마을을 떠나 남태평양으로 출정하여 현지의 토착민들을 원조하고 이들의 자발적인 노동력으로 금광 채굴소를 비롯한 공장을 세운다는 제국주의/식민지주의 서사를 날조한 적이 있었지만,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은 한 발 더 나아가 총동원령하의 자국 내 농촌 지방을 ‘낭만의 땅’으로서 식민지화하고, 그곳으로부터 징병된 무수한 삶들이 전쟁에서 뛰어드는 집단적 대규모 살육을 ‘숭고한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점에서 파시즘 미학의 정점 같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작품이 개봉됐을 때 스태프 중 남자들은 군대로, 여자들은 군수 공장으로 징용되어 반밖에 남지 않았었다. 폭력을 일본인 안에서도 자행되었다.
전쟁에 협력하지 않으면 삶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고 말하며 파시즘과 전쟁을 ‘주어진 조건’으로서 긍정하는 사람도 있음. 하지만 주어진 조건하에서도 그 조건 자체에 저항한 이들은 언제나 어디에든 존재했으며, 작품 안에서 가치를 찾아내지 못하고 비판자의 자격을 운운하는 점에서 초점도 벗어나 있다.
이 시기의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이해했던 것 같지도 않음. 현실 파악이 안 됨.
패전의 기색이 점점 짙어져 가던 1944년 3월에 결전 비상 조치 실시령에 의해 문화 영화의 강제 상영이 중지되고 자포자기식의 분위기 속에서 그때까지 문화 영화에만 배급되던 생필름이 동화 영화, 즉 애니메이션 부문에도 허용되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자들은 당장 눈 앞의 제작 환경이 좋아진 줄로 착각하여 “드디어 우수한 만화 영화가 나오겠다, 국민도 그것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라든가 “이제부터의 일본 만화 영화는 미국의 만화 영화를 능가하여 동아시아 십억의 갈증을 해소한다” 라는 기대로 가득 찼다고 한다. 문화 산업 시대의 한국 사회에도 이와 같은 종류의 꿈을 꾸는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이 적지 않아 보이기에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