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점령 하에서 (1945 ~ 52년)

전쟁이 끝나고 그 해 9월 미국 정부가 대일 점령 정책의 실시 기관으로서 GHQ 설립. 1952년 강화 조약이 발효될 때까지 이 상황이 계속되었다. 검열을 받는 건 똑같은데 주체만 미국으로 바뀜. 그래서 별다른 이야기 없이 음악과 시를 주제로 한 낭만주의적 애니메이션이 생겨남. 또 GHQ는 검열에 그치지 않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계몽/고취시키는 영화 제작을 장려.

한편 약육강식과 강자 약자 관계를 다루는 방식도 많이 바뀜. 승전국 군대를 향한 패전국 국민의 입장. 협동을 강조하거나 강자의 온정을 바라는 내용이 늘어났다. 그간 원숭이가 일본을 상징하는 동물 캐릭터로 많이 쓰였던 데에 비해 이 시기엔 여우가 많이 등장. 원래 여우는 일본에서 오곡을 관장하는 신의 사자로 여겨져 왔고, 그러므로 농경 사회에서 풍작을 중재하는 긍정적 존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쟁 직후부터 특정 시기까지 여우는 약삭빠른 변절자 캐릭터로 많이 사용됨. 패전 후 미국이라는 새로운 권력에 기대어 재빠르게 브로커 역할을 하기 시작한 일본의 자본가를 상징.

‘버려진 아이’ 서사가 꾸준히 반복되기 시작. 어떤 사정으로 인해 부모(가족) 로부터 버려지거나 헤어진 후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든 ‘비정한 현실’ 속을 살아 가면서 때로는 어딘가에 있을 부모 (가족) 중 누군가를 찾아 역시 힘든 ‘길’을 꿋꿋이 걸어 가는 어린이 서사. 이는 패전에 따른 천황 이데올로기의 붕괴와 관련된 현상으로 보인다.

ex) ‘성냥팔이 소녀’. 20세기 내내 서구 사회에서는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진 적이 거의 없(고 있다 해도 우리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는 동화들.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이래로 서구 열강들을 모델로 한 근대화 과정에서 그들의 기독교와 같은 통일된 원리를 모색했던 일본의 신흥 권력층은, 1930년대 전시기에 접어들자 천황을 ‘아버지’로 삼아 백성이 그 ‘아이’가 되는 ‘가장국’으로서의 구상을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밀어붙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가부장제는 일본 열도의 일반적인 사회 원리가 아니었다. 천황 또한 역사적으로 일본 전토의 통일적 지배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수백 년 간 아무런 실권도 없이 막부의 감시하에서 교토에 갇혀 지내는 신세였다. 일반 백성들은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의무 교육, 징병제 군대, 대중 매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하게는 일상화된 폭력의 실천을 통해 천황 중심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빠르게 내면화되어 갔고, 이는 더 나아가 국체라는 말로 축약될 수 있는 천황의 신격화에 의해 한층 강화되었다. 따라서 현인신이라 믿어지던 천황이 패전을 맞이하여 인간 선언을 했을 때, 그의 아이로서 규정되어 온 일본 국민은 비정한 현실 속에 ‘버려진 아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전쟁 고아가 많기도 하였다.

이런 역사적 측면에서 접근하면, 19세기 서구의 아동 문학과 20세기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동일하게 ‘버려진 아이’가 나타나고 있을지라도 거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이후 끊임없는 혁명을 통해 아버지적 존재를 스스로 전복시킨 결과로서 등장한 ‘아이’인데 반해, 역으로 후자의 경우에는 서구 열강을 모방하기 위해 아버지적 존재를 스스로 날조해 냈다가 실패한 결과로서 등장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또한 전후의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체로 세 종류의 부모를 만들어 냈다. 물론 그 하나는 이른바 진짜라고 상상되는 아버지였지만, 다른 하나는 그것을 새롭게 대신해 줄 서구의 가짜 아버지(와 어머니)였고, 또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대안 신화로서의 어머니였다.

검열과 함께 경제적인 상황도 악화. 전전 세대의 가장 영향력 있던 두 작가가 (세오 미츠요, 마사오카 겐조) 업계를 완전히 떠나버리고, 토호는 교육 영화의 제작을 중단하고 관련 부서 사람들을 해고해 버렸다. 1948년 토호의 노동 쟁의에는 점령군 군대가 출동할 정도였으며, 일본의 좌익 운동에서는 상징적 행위가 되었다. 당시 토호의 노동 조합은 전쟁 책임을 회사에 추궁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 관리와 경영 및 기획에 참여하고 독자적으로 영화를 제작/배급까지 했다.

전전의 영화법을 폐지하고 나서 그것을 대신할 만한 보호 정책을 내놓지 않은 정부, 채산이 맞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단편 영화 제작에서 손을 뗀 장편 영화 제작자들. 단편/문화 영화를 키우려고 하는 뜻을 결여한 일본 대중의 책임.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애니메이션에 컬러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시작됨.

4.2 꿈의 공장을 향하여 (1952 ~ 60년)

1951년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 조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점령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독립국이 됨 -> 공동체의 존재 양식과 장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전쟁에 대한 회고. 문제의 전쟁이 군국주의적 악이었다는 초기의 관점이 곧 사라지고, 대신 지난 전쟁의 체험을 비장하면서도 감상적인 형태로 돌아보면서 피해자로서의 일본인을 스스로 확인하기 시작.

1954년 사내에 교육 영화부를 설치한 도에이는 이듬해 컬러 단편 애니메이션 ‘흥겨운 바이올린’의 제작을 니치도에 위탁, 이 작품이 호평을 얻어 당시 경영난에 빠져 있던 니치도가 도에이의 계열사로 들어가게 된다. 1956년 도에이동화의 탄생. 하지만 초대 사장이었던 오카다 히로시는 매체의 문제에 대해 그닥 일관된 입장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디즈니 같은 장편 애니메이션이 만들고 싶었던 듯. TV판 애니메이션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일본 최초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백사전’은 전근대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일본과 중국의 국교가 정상화된 게 1972년이기 때문에 당시 중국으로 취재조차 가지 못함. 대신 미국에 갔다(?) 한 달 동안 미국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방문하고 견학/조사. ‘동양의 디즈니’로서 도에이동화가 성취해야 했던 일차적 과제가 중국-아시아라는 타자를 미국적-서구적 시선의 테크놀로지로 만들어 내는 데 있었다는 걸 보여줌.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사루토비 사스케는 미야모토 무사시나 주신구라처럼 일본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전설적 인물이었던 듯하다. 전후 일본 사회가 욕망하는 이타적인 영웅 인물을 체현하고, ‘백사전’과 비슷하게 일본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끌어들임. 그리고 둘 다 영화제 출품과 극장 배급을 통해 좋은 평가를 받으며 널리 알려졌다.

사실 이 시기는 애니메이션 뿐만 아니라 라이브액션 쪽에서도 일본 영화가 세계적으로 갑자기 주목받고 있던 때였다. 첫째는, 일본의 근대화 이전을 무대로 하여 기모노와 사무라이가 서구 관객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욕망을 쉽게 만족시켜 주었다. 둘째는, 프랑스의 작가 중심적 접근이 할리우드의 B급 감독으로부터 인도와 스리랑카의 신인까지 공평하게 작가 칭호를 부여하였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대등한 관심의 대상으로 취급될 수 있었다. 셋째는, 일본의 영화사들도 국제 영화제 수상을 목표로 서구 관객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합작 사업의 시작. 그러나 당시 미국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 일본에 눈을 돌린 주된 이유가 애니메이터들의 더 낮은 임금에 있었으므로, 합작이라는 대등한 관계는 처음부터 도에이동화 혼자만의 희망이거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후 도에이동화는 합작, 사실상 하청 작업을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했고, 1960년대 중반에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사업도 한국 및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값싼 노동력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50년대 말, 안보 투쟁 시작.

4.3 텔레비전과 뉴웨이브 (1960 ~ 70년)

영화 호황기가 그리 오래 가지 못함. 가장 큰 원인은 텔레비전. 도에이동화도 1963년 ‘우주 소년 아톰’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뒀다. 이때부턴 그들이 추구해왔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의 고전주의적 성격도 많이 퇴색됨. 디즈니도 이런 사태를 겪었었고, 거실에서 극장으로 관객을 끌어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1953년 ‘나팔과 피리와 현과 북’이 디즈니의 마지막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나왔던 고전주의적 장편은 그후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다시 보기 어려운 작품들이 되었다.

데즈카 오사무, 시라카와 디아쿠 - 서유기 (1960) 야부시타 다이지, 세리카와 유고 - 안주와 즈시오마루 (1961)

1962년 ‘아라비안 나이트, 신밧드의 모험’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사’에서 도에이동화의 첫 번째 서양물로 규정되어 있지만, 서양의 입장에서 아라비아는 오랫동안 그들의 동양이었다. 또한 전통적인 일본의 아시아적 입장에서였다면 ‘서역물’이 더 적절한 호칭이었을 것이다. ‘동양의 디즈니’로서 중국과 일본 이외의 아시아적 공간을 발견할 필요가 있었던 도에이동화의 고전주의 노선이 결국 일본의 과거 제국주의 지리학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아라비아로 향한 것은 그 노선의 내적 한계와 앞으로의 위기를 암시하고 있었다.

고전주의 노선의 마지막을 알리는 ‘개구쟁이 왕자의 오로치 퇴치’와 ‘멍멍이 주신구라’. 모두 일본의 전통 서사를 바탕으로 하면서 ‘버려진 아이’ 신화를 따르고 있음.

그러나 두 작품의 아들들은 공통적으로 아버지적 인물의 존재와 그 역사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점에서 2년 전의 ‘버려진 아이’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여 준다. ‘개구쟁이 왕자의 오로치 퇴치’의 성장 신화는 부모 세대와의 관계를 떨치고 새로운 미래를 성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특히 데즈카 오사무가 원안 및 구성을 담당한 ‘멍멍이 주신구라’의 복수극은, 모성을 파괴하는 부성적 권력과 싸워야 한다고 권할 때 그 권력의 성질을 아주 다양한 측면에서 절묘하게 제시한다.

악역 캐릭터는 일본을 곧바로 연상시키지 않는 이름으로 짓고, 주인공 역시 가타카나 표기의 서구식 이름을 사용한다. 전통적 공동체로서의 숲을 떠나 그가 도달한 곳은 과거의 풍경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간판조차 알파벳으로 표기된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공간. 고도 성장기에 일자리를 구해 농촌을 떠나 도시에 온 이들을 연상케 한다.

1963년 데즈카 오사무와 그가 설립한 무시프로덕션의 ‘우주 소년 아톰’이 등장. 1960년대 당시 구리 요지가 독립적인 애니메이션 창작을 잘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믿고 TV 애니메이션에 전념했지만 본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흘러가게 되었다. 생활비 정도 벌어 보자는 스태프들의 대담한 시도는 ‘벌 수 있을 만큼 벌어보자’는 강한 의지로 변해 갔다. 당초의 비전으로부터 벗어나 영리 기업이 되어버림.

그러나 매주 30분 규모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내는 건 데즈카 오사무도 인정했다시피 상식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일. TV 시리즈의 폭발에 기여하고 또 그 폭발에 의해 한층 더 늘어난 것은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의 수준을 넘어선 날림 작업, 그리고 손이 빠른 저임금 단순 노동자로서의 애니메이터들.

그리고 이때부터 장르가 급증하기 시작함. 아톰과 같은 안드로이드, 거대로봇, 사이보그 등을 내세우는 SF 장르, 스포츠 장르, 마법 소녀 장르 등등. 고도의 테크놀로지, 노력과 근성의 정신력, 미지의 마법에 근거하는 초인적 신체들 -> 초아시아적, 즉 아시아를 초월하는 신체의 의미를 내포. 1950년대 미국인 레슬러를 쓰러뜨리며 국민적 스타가 된 역도산의 신체. 물론 각각 저 나름의 1960년대 일본 사회의 변화를 재현하고 있었지만 연구가 된 바가 거의 없음.

TV 시리즈가 애니메이션의 주류가 되어버리자 데즈카 오사무는 (본인이 물꼬를 튼) 흐름에서 벗어나 극장용 장편, 그것도 성인용 에로티시즘을 표방하여 ‘천일야화’와 ‘클레오파트라’를 제작. 그러나 애니메이션을 극장에 장기적으로 정착시키는 데에는 실패하고 오히려 그 아류를 초래. 하지만 1960년대 영화계에서 유행했던 핑크 무비가 220편에 달했던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핑크 무비는 나중에 1970년대의 로맨틱 포르노로 이어졌지만 애니메이션 영화는 1980년대 비디오를 통한 18금 아니메로 이어짐.

기술의 혁신. 애니메이터가 종이 위에 드린 드로잉을 셀롤로이드 페이퍼로 옮기는 과정이 기계화되었다. 원래는 트레이서로 불리는 인간 노동자가 했던 일을 (숙련되는데 최저 1년의 시간을 요하고 하루에 평균 20~30장 작업) 복사기는 30초에 1장의 속도로 일을 했기 때문. 그 외에도 컴퓨터로 그림 그리기나,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유일한 장점이었던 컬러 방식을 TV 시리즈에도 적용하기 등등이 시도되었다. 한편 전통적인 방식과 매체에 기반을 둔 인형 애니메이션도 발전하기 시작.

4.4 포스트데즈카 시대로 (1970 ~ 80년)

TV 시리즈의 시대. 텔레비전으로 방송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부 에피소드들이 극장용으로 편집, 개봉되어 영화관까지 잠식해 버렸다. 장편 애니메이션 신작이 전혀 만들어지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50% 이상이 인기 TV 시리즈의 연장선상이었음.

‘세계 명작’의 환상이 세계를 서구로, 서구를 세계로 이해하는 서구 중심적 원근법의 산물이었다면 그에 대한 내셔널리즘적 반작용 또한 이 시기에 자연스럽게 나타났는데, 흔히 그렇듯 자기 오리엔탈리즘으로 귀결하였다. (중략) ‘서구의 세계 명작’과 ‘일본의 옛날 이야기’ 라는 구도는, 세계를 서구로 정의하고 일본을 그 세계와 분리된 별도의 지리적 존재로 배치하는 데 기여하였다. 동시에 서구와 일본 사이에 펼쳐 있는 아시아라는 부담스러운 실재도 간단히 삭제될 수 있었다.

1980년대에 선풍을 일으키게 되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도 이 시기 동안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TV 시리즈에 투자했다. 이 두 사람이 닛폰 애니메이션의 전신인 즈이요영상에서 만든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 애니메이션이 단순히 어린이 대상의 치졸한 눈속임이 아니라 인간의 심적 풍경을 그려낼 수 있는 훌륭한 표현 양식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주 소년 아톰이 국민적 시청률을 기록하던 10여 년 전과는 다른 사회적 현실이 있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급진적 내셔널리스트로서의 충격적인 할복 자살, 일본 적군파의 항공기 납치 및 아사마 산장 인질 농성, 미나마타 병 사태, 1973년 오일 크가 찾아오면서 종래의 경제적 낙관주의는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있었다. 이 안에서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 서구 - 자연 - 어린이라는 세 요소가 모두 갖춰진 낭만주의적 환상일 수 있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와 같은 시간대에 방송했던 마츠모토 레이지의 ‘우주 전함 야마토’ 저조한 시청률로 인해 도중하차 해야 했지만 재방송을 통해 많은 팬들을 형성, 그들의 적극적인 호응에 힘입어 70년대 후반 애니메이션 붐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능동적 수용 계층인 ‘청소년 관객’의 출현. 우주 전함 야마토에 의해 촉발된 애니메이션 붐은 1979년 기동 전사 건담에 의해 확대되었다. 이 역시 초기 시청률은 저조했지만 TV 시리즈를 토대로 리메이크한 장편 3부작이 청소년 팬들의 큰 호응을 가시화하면서 텔레비전과 극장 양쪽에 걸쳐 1980년대를 풍미하였다.

오타쿠라 불릴 수 있는 이 무렵의 새로운 애니메이션 팬들은 그들이 지지하는 작품들의 등장 인물들을 작품 밖으로까지 끌어내 그 이미지를 아이돌 스타처럼 수용하고 소비하는 경향을 띠었다.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 동호회가 등장. 잡지의 경우 대부분 오래 가지 못했고 80년대 중반을 넘어 붐이 잦아들면서 한 풀 꺾였다가 90년대 중반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로 다시 급증하기 시작. 한편 동호회는, 영화 산업의 불황 속에서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독립하게 된 이들 + 교육 영화 부문과 인형 애니메이션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함께 어우러짐. 1971년 소게츠아트센터가 문을 닫고 일본애니메이션협회 (JAFA) 이 출발. 하지만 금방 무산되고, 1978년 JAA 로 다시 출발.

기노시타 렌조. 아이하라 노부히로.

1970년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일반인과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들도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 관심을 갖고 서클을 만들어 활동한 듯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도 이 세대에 속해 있었다. 안보 투쟁이 없고 애니메이션 붐이 있었던 세대.

4.5 버블 시대 (1980 ~ 90년)

소비의 양식이 효용 가치에서 교환 가치로 급격히 이동하고, 철학과 사상이 하나의 패션이 되는 시대. 구조주의에 관한 아사다 아키라의 ’구조와 힘’이 유례 없는 인기를 끄는 아키라 붐(AA 현상). 이는 마릴린 아이비에 의하면 지식과 상품을 동일시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오타쿠와 신인류의 등장. 무엇을 소비하는가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선 동일한 가치관을 소유.

1983년까지 우주 전함 야마토, 기동 전사 건담 등으로 진행된 애니메이션 붐은, 1979년 두 번의 오일 쇼크를 겪으면서 전후 최장기 불황에 빠져있던 걸 감안하면 매우 큰 뉴스. 1983년엔 OVA 형식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극장도 TV도 아닌, 상점에서 팔리는 상품 형태의 애니메이션. 사적 수용 및 소유의 욕구에 부합하는 형식.

장편 애니메이션의 르네상스. 1980년대에 두각을 드러난 감독들은 주로 1940년 전후 출생. 1960년대 초에 애니메이션 영화를 시작했으나 애니메이션 붐으로 인해 TV를 벗어나 영화 감독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 사람들. 다만 30대, 20대 감독들이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한 작품을 내놓는 건 80년대 후반에 가서였다. 또 초반에 나왔던 작품들이 영웅/유토피아에 회의감을 드러내면서도 휴머니즘과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에 반해 후반에 나온 작품들은 그 모든 것들에 몹시 회의적이었다.

가장 이른 사례가 야마가 히로유키 감독의 ‘오네아미스의 날개, 왕립 우주군’. 무국적적인 입헌군주국의 명목뿐인 군대에서 좌절된 꿈을 안고 의욕 없이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니힐리즘적 초상. 그 후 ‘아키라’와 ‘기동 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은 사이버펑크 감수성 +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시각화. ‘초신 전설 우로츠키 동자’는 도쿄를 유령과 악마가 출몰하는 비이성적 도시로 그려내고 인간의 몸을 비인간적 힘의 잔혹한 성적 폭력에 노출시킴.

(이런 풍경은 버블 경제 당시 분위기와 매우 동떨어진 것이었는데, 어쩌면 애니메이션 산업 현장이 이랬는지도 모른다.)

한편 TV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여전히 지속됐다.

극장과 TV의 초기 대립적 관계는 이제 그 둘을 포함하여 비디오 매체까지 아우르는 대기업 자본하에서 관리되며 유착 관계로 바뀌었다. 도에이나 도호처럼 처음부터 영화 제작을 했던 곳에 더하여 1970년대 말부터 산리오, 반다이, 가도카와쇼텐 등과 같은 팬시 캐릭터, 완구, 출판 관련의 기업들, 그리고 TV 방송국이 새롭게 애니메이션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아시아 국가에 하청을 맡기는 일이 늘어났다. 저임금의 노동력. 그렇다고 이걸 개발국-저개발국의 구도로, 또는 내셔널리즘적 감성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일본의 많은 중소 하청 제작사들도 환경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한국 사회 내부에서도 이 부분엔 관심이 없었다. 초점은 어디까지나 ‘기술을 제대로 배우고 익혀서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것에 맞춰져 있었음. 일본 사회 내부에서도 마찬가지.

예술 작품과 그 의미가 인간의 정신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견고하고 높은 낭만적 장벽이 현실적 인식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의 가장 진부한 수사법은 다름 아닌 아이디어와 기획력이었다.

2003년 10월 26일에 방송된 NHK의 ‘세계 조류 2003 아니메가 세계를 향해 달려 나간다’라는 대담 프로그램도, 미국과 프랑스에서 목격되는 저패니메이션의 산업적, 문화적 성과들을 소개한 후, ‘그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한국의 최근 애니메이션 풍경을 바라볼 때 아시아를 향한 오리엔탈리즘과 낭만적 예술관을 재생산하였다. 서구 애니메이션의 일부 작품들이 저패니메이션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경향은 전자 전체의 문제점으로 간주되기는커녕 오히려 후자의 성공적인 결실로서 논의되었던 반면, 한국 애니메이션 속의 비슷한 풍경들 (가령, 저패니메이션과 비슷한 스타일로 만들어진 한국의 창작 TV 시리즈, 일본 애니메이션을 따라잡는 것이 꿈이라는 어느 애니메이션 고등학교 학생의 인터뷰)에 대해서는 ‘한국 애니메이션에 두뇌가 없다’는 혹평이 한 출연자에 의해 아주 쉽게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말았다. 한국 애니메이션을 향한 그와 같은 지적은 한국 사회 내부에서도 오랫동안 재생산되어 왔었지만, 두뇌(=정신)와 손(=노동)을 분리시키고 위제화하는 사고방식이 일본 사회에서 오늘날과 같이 풍부한 애니메이션 문화를 키워올 수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고방식대로라면, 손으로 애니메이트된 캐릭터의 신체 동작으로부터 우리가 아무런 해석 과정도 없이 즉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모순이다.

역사 비판, 반전 의식, 사회파 애니메이션이 대거 탄생. ‘반딧불이의 묘’나 ‘맨발의 겐’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음. 야마다 덴고의 ‘김의 십자가’는 식민지 시대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에 대한 영화. 아리하라 세이지의 ‘라이얀츨리의 노래’ 는 홋카이도로 강제 징용되어 13년동안 도망 생활을 한 어느 중국인의 실화에 기초하였다. 후에 주인공의 실제 유족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일본 시민 단체의 지원이 함께했다.

1990년대는 일본의 침략 전쟁에 의해 인권을 유린당한 동아시아의 피해자 스스로가 직접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에 대해 사죄와 피해 배상을 제소하고 나오면서 일본 사회 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아시아 연대라는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게 된 시기였다. 또 일본 내부에서 행해졌던 폭력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가 되었음 (전자보다 좀 더 이른 시기부터)

하나의 일본을 만들기 위한 19세기 말 메이지 정권의 폭력은 동북 지방을 넘어 홋카이도로 확장되었는데, 그곳의 아이누인은 ‘미개한’ 취급을 받으며 ‘프론티어 정신’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하에 ‘개척’의 대상이 되었고 삶을 박탈당한 채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교토와 도쿄 기반의 패권주의 아래서 고대의 동북 지방인과 근대의 아이누인은 종종 혼동 속에서 에미시라 불렸으며, 한국어로는 오랑캐를 의미하였다. 1990년대 후반에 에미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서사 속으로도 들어왔다. 이상과 같은 작품들은 경우에 따라 극히 정치적일 수도 있는 주제까지 장편이라는 긴 호흡의 서사 구조 속으로 가져와 다뤘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도전적이었지만, 몇 가지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도 동시에 남겼다. 첫 번째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각각의 주제에 상응하는 한층 적절한 형식을 찾지 못한 채 기존의 상업 애니메이션에서 관습화되어 있는 양식으로 만들어진 점이다. (중략) 이를테면 ‘별님의 레일’의 제작진은 가해자 입장인 일본인의 얼굴을 저패니메이션에서 아주 친숙한 스타일로 그린 반면, 피해자 입장인 조선인의 얼굴을 그와 동일한 스타일로 그리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는지 상당히 다른 선택을 하였다. 다른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는 적절했지만, 그 선택이 오리엔탈리즘적인 양식을 극복하지는 못했던 탓에 식민주의의 비판이라는 작품의 의도는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역사적 문제를 제기하는 예술 작품에서 정작 그 형식 자체의 역사성이 간과되었다는 치명적인 두 번째 문제가 있었다. 예술을 운동의 도구로서만 간주하면 형식이라는 미학적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

4.6 모라토리엄 그리고 (1990년 ~ 현재)

1992년 1월호 ‘뉴타입’에 실린 글

‘우주 전함 야마토’, ‘기동 전사 건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 일찍이 애니메이션에는 늘 시대의 메인 스트림이 되는 작품 - 핵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돌입한 지금 시대의 흐름은 혼미로 이행하고 개척자로서 애니메이션을 이끄는 작품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이것은 쇠퇴로의 징후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대로의 태동인가? 1992 핵이 없는 시대로, 극장 애니메이션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1990년대 2차 애니메이션 붐. ‘달의 요정 세일러문’,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결정적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 그러나 70년대 말의 1차 붐과는 다른 양식의 붐.

이 시기의 대중적 작품들은 갖가지 기존 장르의 혼합에 의해 결과적으로 장르를 해체해 가는 경향을 띠고 있었는데, 당연히 장르의 해체는 기존에 성립해 있던 관객성의 해체로도 이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2차 애니메이션 붐은 장르와 관객성 양측의 해체적 파동이 일으킨 공진이었다. 객체와 주체의 이 해체적 공진을 일본 사회의 버블 붕괴와 따로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80년대의 관객성이 결여된 소비의 시스템. 정보라는 무형의 교환 가치가 소비의 새로운 대상으로 참여. 과잉의 정보를 공급하며 장르의 노골적인 해체로 치달은 대표적인 작품이 ’신세기 에반게리온’. 오타쿠들이 안식하고 싶어하는 빛과 소리의 자궁, 즉 저패니메이션이라는 매트릭스의 네오.

1997년 모노노케 히메 - 동시대 일본 사회의 혼돈에 대한 비유.

행복한 1980년대가 지나가고 고투의 1990년대에 무엇을 하냐고 말한다면 인간의 근원적인 것을 그릴 수밖에 없겠다. 거기까지는 모두 알고 있지만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한다면 그것은 모른다. 모르는 대로 해 보든가 모라토리엄 (심리적인 유예 기간) 상태로 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은 미야자키 햐야오의 진술은 그냥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니까 만든다는 것과는 질적으로 크게 다른 입장을 암시하고 있었다. 공각기동대도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모노노케 히메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였지만 사실 몹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눈에 잘 보이지는 않는데 유동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구조 안에서, 오시이 마모루도 안노 히데아키도 창작 그 자체의 토대에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서구 사회들의 관심도 고조. 비평가들의 찬사!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해외에 진출했다는 내셔널리즘 신화라면 몰라도 ‘시장’을 석권했다는 자본주의 신화의 조건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저패니메이션의 자본주의 신화를 확고히 가시화한 것은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가 아닌 TV 시리즈 ‘포켓몬스터’ 였다. 하지만 이것의 신화에는 비디오 게임과 완구 비지니스가 처음부터 작품의 본질적인 수준에서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데즈카 오사무도 무시프로덕션의 도산을 겪은 후 1973년 신문 기고에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듯이,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그 스폰서인 광고주와 불가분한 관계에 있었다. (중략) 특히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경우는, 작품의 구성 요소가 그대로 상품이 될 수 있기에 흔히 최대의 스폰서인 완구 업체가 자신들의 상품을 갖고 작품을 구성하도록 압박하였다. 애니메이션 작품 그 자체가 광고가 되어 버렸다. 애니메이션의 상품화는 역전되어 상품을 애니메이트하는, 즉 상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단계로 나아가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