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읽는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을 읽는 것이 곧 혁명이고, 혁명은 책을 읽는 것으로부터 밖에 탄생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다섯 편의 에세이. 처음엔 정말 명쾌하고 시원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비약이 심해서, 처음에 느낀 명쾌함이 혹시 사이다를 원하던 내 마음의 반영은 아니었나 되돌아보게 될 정도다. 주장은 굉장히 확고한데, 기본과 근거를 차근차근 쌓는 설명문보다는 호소하는 성격의 연설문에 가까운 책. 덕분에 계속 펜을 들고 ‘…???’ 라는 메모를 쓰게 된다. 예를 들면 아래 같은 문구.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의 것이 아니면 일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방어기제를 가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중략)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나쓰메 소세키도, 스탕달도, 롤랑 바르트도, 헨리 밀러도, 그리고 마르틴 루터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책은 적게 읽어라, 많이 읽을 게 아니다’라고요. 다시 말해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사실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적어도 이 책은 자기가 정의한 책의 정의를 따르고 있긴 하다. 기묘한 무료함과 난해함과 기분 나쁜 느낌을 주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 책의 충고대로 적게 읽고 되풀이해서 읽었다면 애초에 이 책을 안 읽었을 텐데. ‘무의식에 문득 닿는 청명한 징조’가 대체 뭐죠? 이거 혹시 반지성주의?
사람들은 자신이 새롭다고 믿고 싶어하고, 자신의 시대를 새로운 시대의 여명으로 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다. 이는 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매번 세계의 명운을 걸고 싸우는 헐리우드 영화도 우습다. 또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욕망도 우습다. 나치가 그랬고 - 히틀러는 총통명령 전문 71호에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민족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독일인의 생존 조건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옴진리교도 그랬다.
작가는 말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똑같은 이날의 계속을, 다른 날과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다음 날을 향하여.”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앞으로 나아간다는 건 무슨 의미인걸까.
레퀴엠
고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하고 있는 페소아 덕질의 연장선. 안토니오 타부키는 페소아 연구의 일인자로 알려진 사람이고 이 책은 페소아와 리스본에 대한 헌정으로 쓰여졌다고 하길래 읽어봤다. 연구자의 지성을 담아 쓴 장엄한 책이라기 보다는 페소아 덕후들 중 가장 똑똑한 사람이 쓴 팬픽 같은 느낌이었다. 마지막 챕터엔 무려 작가 본인이 페소아를 만나 대화를 하는 가상의 장면도 들어가 있고. 이게 호그와트 입학통지서 기다리는 심정이랑 뭐가 다르죠?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제목 참 길기도 하지. 난 이 책이 동시대 미술에 대해 세 줄 요약 밑줄 좍좍 정리를 해줄 줄 알았는데. 뉴욕 타임스 추천사에도 ‘명쾌한 해설을 담고 있다’고 그랬단 말이야. 그렇지만 189 페이지 짜리 책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거기다 원제는 Playing to the gallery 라서 번역된 제목과 전혀 다르고. 하지만 내 기대와 별개로 재밌었다. 어차피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에 창작자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간결하고 좋은 답을 주는 책이었고, 무엇보다 저자의 위트와 비꼬기 솜씨가 대단했다.
책과 세계
내용은 전반적으로 흥미진진했다. 그리스와 로마,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마키아밸리의 군주론, 르네상스 등등에 대한 짧은 지식도 쌓을 수 있었고. 하지만 이 책의 가장 좋은 부분은 바로 마지막 에필로그였다.
20세기는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 ‘극단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극단은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다. 15세기 이래 면면히 준비되어온 것들이 표피를 뚫고 터져 나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극단에서 극단으로 오갈 수 있을 뿐이다. 개념적 파악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파악 불가능을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파우스트』의 한 구절처럼 ‘모든 이론은 잿빛’이어서 이론은 현실에 맞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이론적 파악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론적 파악의 출발점인 읽기를 그만두어야 하는가? 그것이 극단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고전이 보여주는 자아들을 자기 몸에 넣어보고, 다시 빠져나와보고, 다시 또 다른 것을 넣어보고, 또다시 빠져나와본 다음에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질 자아가 과연 진정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텍스트를 손에 잡지 말아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이 글을 읽다가 문득 파우스트가 누구 작품이었더라 기억이 안 나서 클로바 스피커에 파우스트에 대해 알려달라고 말했더니 2016 잘츠부르크 - 파우스트는 2016년에 개봉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이고… 인공지능이면 파우스트 작가 정도는 바로 알려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
질문하는 책들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다뤘던 얘기들을 모은 책. 그냥저냥 가볍고 읽기 편해서 침대에서 휘릭휘릭 읽고 있다. 총균쇠가 생각보다 읽기 쉬운 책이라고 그래서 언젠가 읽을 리스트에 넣어둘까 고민하게 만들었다.
베네치아의 종소리
후쿠오카 놀러갈 때 들고 가서 다 읽었다. 정말 간만에 읽는 에세이집이었고, 여행지에서 읽기에 아주 좋은 책이었다. 유학이 흔치 않았던 시절 이탈리와와 일본을 오가며 살았던 사람이라 삶에서 드러나는 개성이 독특한데, 예순이 넘은 나이에 옛날을 돌아보며 쓴 책이라 회상과 상실감이 드러나는 감성도 좋았고 번역도 매우 편안하다. 역시 믿고 읽는 송태욱 번역가.
산 자들
독서모임에서 읽었다. 우리가 이 상황에 놓여있었다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에 대해 얘기했고, 나는 모임을 시작하기 전까진 강하고 굳센 자본주의 논리 (실력이 없으면 도태되는 게 맞다) 를 주장하고 있었는데 ‘왜 꼭 성장을 해야 해요?’ 하는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국가가 국민들을 책임지는 것처럼 회사가 사원을 책임질 수는 없는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많은 걸 누리는 계층들은 죄다 담합을 하는데 (기업 및 사짜 직업들) 왜 최하층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은 한 치의 꼼수도 없이 경쟁하고 성장하려 하는 것인가. 회사에서 A를 하라고 고용된 직원이면 A만 잘하면 되는 것 아닌가. 트렌드가 바뀌어 새로운 업무를 배워야 한다면 그건 회사가 짊어져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실력 유무를 어떻게 판단할 건지는 둘째 치더라도, 잘할 거라고 판단해서 뽑았는데 잘 못한다면 그 역시 회사에 약간의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또 정말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인지 아님 일을 주는 사람이 잘 못 준 건지는 어떻게 판단하나. 이런 주제들을 하나하나 얘기해 봤고, 그 과정에서 내 생각이 확 뒤바뀌었다.
서양철학사
올해 안에 다 읽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아직 기원전도 통과를 못했는데 이해가 안돼서 모퉁이를 접은 채 넘기는 책장이 늘고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은 자연에 대해 고민했다. 자연은 변화하는가. 어떤 사람은 모든 요소가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변화라는 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나로선 둘이 생각하는 ‘변화’의 정의가 달랐을 뿐인 것 같은데, 이건 내가 고등과학을 배운 사람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