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역사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해결된다면, ‘전 일본 병사’는 이렇게 잘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당신에게는 강간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당신의 『현실』이었음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상행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내 『현실』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다른 역사』를 산 것이다. 나는 『현실』적으로 강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이것은 평상시의 성폭력, 강간 사건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자에게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던 것이 여자에게 ‘강간’이었을 경우, 양자는 ‘하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우에노의 생각에 따른다면, 일반적으로 ‘사실’에 관해 서로 대립, 항쟁하는 다수의 이야기, 다수의 현실이 있을 때 어떠한 정당/부당의 판단도 할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결과적으로 우리들은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법적 책임 및 책임 일반을 둘러싼 이야기의 항쟁 속에서 어떠한 정당/부당의 판단도 내릴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첫째, 일반론으로서 이야기의 항쟁을 정당/부당의 판단을 뺸 강자의 ‘지배적인 현실’에 대한 약자의 ‘또 하나의 현실’을 낳은 투쟁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독일 및 서유럽에서는 ‘나치 가스실이 있었다’는 사실이 ‘지배적인 현실’이고,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는 단지 ‘소수파’일 뿐만 아니라, 그 활동이 형사소추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약자’이기도 하다. 권력관계가 압도적으로 비대칭인 곳에서 그들은 ‘지배적인 현실’을 뒤엎을 ‘또 하나의 현실’을 위해 싸우고 있고, 지배적인 현실에 의해 부인된 자아를 되찾는 실천에 열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의 싸움에 우에노는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에 임하며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고 그 일에 관계한 것이 아니라면 판단을 내릴 수 없다’라든지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은 독선적이다’라며 판단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여론 경향에 대해 ‘그것이 옳다고 하면 재판의 운영도 역사 기술도 명백하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판단 즉 판결의 필요성을 옹호했다. (중략) ‘사후적’ 판단을 ‘사건이 끝난 후에 생겨난 지혜’라고 배척한다면 어떤 ‘재심’도 불가능하게 된다. 모든 재심은 사후적이고, 원래 모든 재판은 사후적이다.

역사 속에서는 어떤 판결도 최종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판결은 잘못될 수 있으며 ‘재심’의 길이 열려 있다. 그러나 그 일이 ‘올바름’에 대한 추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모든 법은 탈구축이 가능하지만, 법의 탈구축 그 자체의 동기가 되는 ‘정의’는 탈구축이 불가능하다.

법은 그것이 보편성 요구를 갖는 한, 설령 유럽 태생이라고 해도 탄생한 그 순간으로부터 이미 유럽을 넘는 사정거리를 가질 것이다.

지지난 달쯤 박유하가 쓴 ‘제국의 위안부’를 읽고 딜레마에 빠졌었다. 위안부 분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삶을 살았다, 그 안에서 군인과 연애를 하기도 했고 결혼을 한 경우도 있고 당시엔 자신을 일본인으로 생각해서 군인을 ‘전쟁이라고 하는 비일상적 상황을 함께 헤쳐나가는 동지’로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는 철저하게 약자/소녀로서의 위안부 이미지만을 굳게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역시 그 분들을 왜곡해서 보고 있다 - 하는 이야기를 초반에 풀어놓는데 정말 혼란스러웠다. ‘나눔의 집’에 들어가지 않기를 택한 분들도 꽤 있는데, 그 분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는 책의 질문엔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오는 목소리는 단지 일부의 의견일수도 있단 말인가. 근데 지금이 기원전 아테네도 아니고, 직접민주주의마냥 모두의 의견을 다 수용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적인 목적으로 옛 사건이 왜곡된채 활용되는 것을 괜찮다고 용인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 이게 정말 왜곡인가. 위안부 피해자 분들이 당시에 연애도 결혼도 한 건 스톡홀름 증후군과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사회적 맥락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역사는 무시되어도 괜찮은가? 끝이 안 보이는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맴돌았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역사/수정주의’에서 많이 해소되었다.

200페이지도 채 안되는 책인데 읽는데 오래 걸렸다. 일본 서적의 번역서답게 따옴표가 마침표보다 더 자주 등장하고 쓰는 단어도 어렵고. 총 세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두 번째는 일반 독자들은 굳이 읽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전에 저자의 책을 비판한 적 있는 다른 학자의 주장을 가져와서 하나하나 반박하는 내용인데, 학술적인 갑론을박이라 이해하기도 어렵고 후반 내용의 이해에 전혀 지장도 없고.) 내가 이 책의 제목에서 기대했던 내용은 첫 번째 챕터에 다 나왔지만 의외로 세 번째 챕터에서 밑줄 그어볼 만한 내용이 많았다.

역사에 대해선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고, 이 해석이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는 주장 자체는 일리가 있다. 그런데 사실 그 말은 누구나 어느 분야에서나 할 수 있다. 수학에서도 1+1=2가 항상 참은 아닌걸. ‘이 일엔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구요?’ 라는 이의 제기는 너무 쉽다. 그런데 그 다음 수습은 아무도 나서서 하지 않는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으니 우린 더 이상 토론을 할 필요가 없고, 거기서 대화가 끝나버린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느꼈던 위화감도 이거였다. 각자 자기 측면에서 맞는 주장을 하고 있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그 다음은?

이 책은 그 부분을 제법 시원하게 짚는다.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여러 이야기가 있을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는 코난의 말은 틀렸지만!) 그 다양한 이야기의 존재가 판단을 유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과거의 일을 지금 시점에서 바라본다는 한계 때문에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모든 재심은 사후적이고, 원래 모든 재판이 사후적이다. 불완전한 판단이기에 언제든지 수정되고 전복될 수 있지만 그것이 판단이라는 행위 자체의 무력함을 뜻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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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이 일엔 여러 측면이 있다구요?’로 도망가는 사람들에게 인용할 수 있는 책이 하나 생겼다. (뿌듯)

저자가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이름이 많이 알려진 분이라 책에 기대가 많았는데 만족스러웠고 이 분이 쓰신 다른 책도 찾아볼듯. (근데 너무 어려워.. 150 페이지 읽는데 며칠이나 걸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