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근황
스티븐 프라이의 그리스 신화
최근 그리스 신화에 다시 관심이 생겨서 - 근데 생각해보니 그리스 신화는 만화책으로밖에 본 적이 없네? - 그럼 하나 사야지 - 하고 현암사 부스에서 집어온 책이었는데 생각보다 엄청나게 재밌었다. 아니 이거 왜 이렇게 꿀잼이야? 하고 저자 소개를 봤는데 무려 케임브릿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잘나가는 코미디언. 허어억. 나만 몰랐을 뿐 세상 똑똑함과 재미는 다 가진 만능맨이었잖아.
아무도 모르는 맛집 하나를 찾아낸 기분.
작가와 술
아.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다루는 작가들이 전부 미국 문학인데 내가 미국 문학을 너무 모르고 (분명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다 읽었는데 왜 명작인지 캐치를 못했다. 남들은 다 찬양하는데 나만 영문을 모르겠을 때의 이 서글픔..) 결정적으로 난 좀 주접 떠는 책을 원했단 말이야. 책덕후의 술 사랑, 술쟁이의 책 사랑을 마음껏 뽐내는 철없는 문장을 기대했는데 너무 진지하게 ‘그 당시의 위대한 작가들은 정말로 술에 영감을 받았을까요?’ 를 논해서 짜게 식었다. 술에 쩔어서 섬망에 시달려도 이걸 영감의 원천으로 해석해주는 사람도 있고, 그런 의미에선 작가도 참 부러운 직업이다. 나도 점심에 맥주 마시고 취중코딩 하면서 크으 이게 바로 내 영감의 원천이지 같은 말 해보고 싶다.
아침의 피아노
죽음을 가까이 두고 인류애를 설파하는 사람은 사실 조금 불편하다. 반항하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고 구구절절 맞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하다니. 생은 짧고 후회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말 다 맞는데요. 네.. 저는 조금만 더 후회를 쌓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답하고 싶어지는 심정. 이 책도 약간은 불편했다. 암으로 돌아가신 어느 철학과 교수님이 입원할 때 즈음부터 마지막까지 쓴 일기의 모음. 말그대로 일기이기 때문에 어려운 말도 전혀 없고 지나치게 성직자 같은 태도도 취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후회와 회한과 사랑과 철학과 지식과 삶을 얘기하는 책.
이 책이 가장 슬프고 무겁게 다가온 건 후반부였다. 새로운 달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장이 점점 빨리 다가온다. 글이 점점 짧아지더니 나중엔 문장 하나, 단어 하나만 쓰여진 일기가 등장한다. 소리 내서 읽어도 2초면 다 읽을 문장을 한참을 더 들여다 봤다. 어쩐지 이 장을 빨리 넘기는 게 죄스럽게 느껴지고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여백이 무섭다. 나이를 지금보다 한참 더 먹으면 죽음이 그렇게까지 무서운 일이 아니게 될까? 나도 내가 어쩌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서 도망치듯이 책을 다 읽었다.
누구
도서관에서 빌려본 아사이 료의 책. 초반은 정말 술술 읽혔다. 중학교 때 주구장창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 미야모토 테루, 무라카미 류, 히가시노 게이고 등등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일본 소설 같았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초중반에 웃고 즐긴 만큼 후반부가 뼈아픈 소설이었다.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SNS 를 아주 열심히 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감성을 풍기고 있어서 SNS 허세는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비슷하네 하고 낄낄거렸는데, 그렇게 낄낄거리며 이 책을 읽고 있을 책 너머 독자를 강력하게 때리는 책이었다. 맞은 게 너무 아파서 그 다음 날 약간 우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