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체험단으로 선정돼서 『일의 기쁨과 슬픔』 가제본을 받고 읽으면서 썼던 메모.

  • ‘합시다, 스크럼’. 범상치 않은 첫 문장이다. 스타트업-판교-개발자라는 버뮤다 삼각지대에 한 번이라도 발 담가본 사람은 이 문장에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이 창비신인소설상에 선정되어 온라인에 전문이 공개됐을 때 삼각지대 거주자들이 성실하게 링크를 퍼나른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동네 사람들 이것 좀 보세요! 제가 엄청나게 하이퍼-리얼리즘인 스타트업 텍스트를 발견했어요!

  • 주인공 안나는 판교에 위치한 중고거래 스타트업 ‘우동마켓’에서 일하는 기획자다. 우동마켓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데. 이 스타트업은 모두가 영어 이름을 사용한다. 이 ‘영어 이름 쓰기’ 역시 본래 의도와 갖다 쓰는 사람의 의도가 어긋났다는 점에서 앞의 스크럼과 맥락을 같이한다. 카카오가 이 영어 이름 제도를 쓰고 있는데, 사람들이 생각해 내는 영어 이름이 다 거기서 거기기 때문에 회사 안엔 수많은 David 와 수많은 Steven 이 있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좀 애잔했다. 결국 수평적인 팀은 영어 이름을 쓰지 않아도 수평적이고, 문제가 있는 팀은 문제의 원인인 사람(들)을 잘라내지 않으면 뭘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 스크럼이 끝난 후 주인공은 이슈에 대해 개발자 케빈과 대화를 나누는데, 이 케빈이 꼭 만나본 것처럼 익숙하다. 카이스트를 졸업했고 교내 레고 동아리에서 총무를 맡았었다는 사실 외엔 자신이 대인관계 및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없는 사람임을 증명할 근거가 없는 사람. (아니 왜요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보지 마 그렇게 보지 말란 말이야 ㅠㅠ) 하지만 어쨌든 이 개발자는 능력자다. 원래라면 셋은 붙었어야 할 일을 혼자 해내고 있다-는 게 기획자의 판단 근거다. 리뷰도 전혀 받지 못하고 쌓여만 가고 있을 그 코드의 퀄리티가 몹시 불안하게 느껴지지만 내가 유지보수 할 거 아니니까 넘어가자. 캐릭터 설명 뒤에 이어지는 이거 재현되는데요 - 제 테스트 기기에선 재현 안 되는데요 - 하는 핑퐁 장면에 이르면 앱 개발자로서 너무 몰입돼서 숨이 막힌다. 같이 코드에 대해 논의할 사람도 없이 혼자 네버엔딩 탁구를 치고 있는 개발자라니. 얼른 사장실로 달려가서 개발자 더 안 뽑아주면 다음 달부터 그만둘 거라고 협박해 얼른!

  • 주인공이 기획하는 서비스 우동마켓엔 하드유저가 한 명 있다. 중고 거래를 하는 횟수도 남들에 비해 월등히 많고 스케일도 남다르다. 중개 수수료로 먹고 사는 서비스이니만큼 이런 하드코어 유저는 대단히 반갑고 사랑스러운 고갱님일텐데, 정작 사장님은 이 고객님이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무려 어뷰저로 단정짓고 ‘글을 좀 적게 올리라’고 얘기해보라며 주인공을 투입한다. 만나서 절을 해도 모자란데?! 이 사장님은 본인이 하고 있는 사업에 큰 그림을 그리긴 커녕 여태 그려온 그림도 잘 안 보이시는지 자꾸 헛다리를 짚고 있고, 그걸 옆에서 안나가 계속 커버 쳐주고 있다. 연봉협상 잘못 한 사람이 여기 한 명 더 있네. 안나도 같이 사장실 가자.

  • 사장님의 헛다리로 드디어 성사된 주인공과 하드고갱님의 만남. 이 고객님은 ‘포인트 담당 직원으로서 직접 체험해보고 개선점을 찾아보라’는 윗사람의 지명을 받고 월급을 포인트로 받고 있다는 크리티컬한 사연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포인트 -> 제품 구매 -> 중고거래로 현금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읽었을 땐 이게 H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광고도 세련되고 젊은 세대가 좋아할만한 해외 뮤지션 섭외도 자주 해와서 막연히 젊은 기업이란 이미지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IT 스타트업 보면서 자유롭고 평등하고 아무튼 좋지 않냐고 하는 것과 똑같은 편견이었다. 포장지는 포장지고, 그 속이 얼마나 혼돈의 카오스인지는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

  • 작가님은 H사 일을 듣고 그 당사자는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있을지 궁금해져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설 안에서 하드고갱님은 퇴사를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닥친 일을 생각하면 정말 어이없고 실소가 터져나오지만, 퇴근하면 곧바로 머리에서 회사에 대한 코드를 뽑아버린다. 그리고 집에서 하루종일 반려동물을 관찰한다. 반려동물의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고 프로필 사진을 바꾸면서 기뻐한다. 주책맞게 주인공에게 자랑하기도 한다. 뭐, 포인트를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도 찾았으니 괜찮은 걸까? 고갱님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 요즈음 ‘이직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내 경우 전에 근무했던 팀을 더 견딜 수 없는 사유가 있었기 때문에 현재 팀으로 옮겨올 때 망설임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건 현재 팀에 적응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기껏 옮겼는데 전 회사보다 더 끔찍할 가능성도 있었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다른 문제가 터질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그렇지 않았으니까. 나 자신을 걸고 한 도박에 성공한 셈이다. 어쩌면 고갱님도 그런 계산을 했는지도 모른다. 갈 수 있는 회사 후보군 중엔 여기가 그나마 낫고, 이직 준비보단 중고 거래가 쉽고, 반려동물만 곁에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 없었는지도 모른다.

  • 역시 일의 슬픔은 아침에 눈뜬 순간부터 퇴근하기 전에 있고 일의 기쁨은 퇴근 후에 있는 걸까. IT 회사에서 늘상 얘기하는 ‘이 일을 진심으로 즐기고 성장하기 좋아하는’ 같은 문구는 어떻게든 자신을 불태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을 위한 파란 약이고, 이 회사가 뭘 하는 회사건 사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우리는 퇴근하고 무슨 술을 마실지 반려동물에게 무슨 장난감을 사줄지 고민하면 되는 건가!

  • 사실 이게 100% 의 정답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어떤 순간엔 정답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코딩 테스트를 크게 말아먹고 맞이한 일요일 저녁이라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