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도서관의 대마법사

중세 판타지 배경 + 도서관과 사서가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관 + 정통적인 성장형 주인공이라니 너무나 환상적인 조합이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와 달리 소개용으로 나와있는 이미지가 많지 않아서 (구글 검색에서 나오는 이미지들은 대부분 불펌) 내가 구매한 전자책의 이미지를 넣었는데 똑똑하고 영민한 주인공의 성장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잘 맞지 않을까 싶은 작품.

어렸을 땐 도서관과 사서에 대한 로망이 너무 큰 나머지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은 으리으리한 궁전 같은 곳이 아닐까 상상했는데, 재작년 즘에 실제로 가보고 엄청나게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교보문고 갈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책을 들춰보곤 했는데 꿈이 너무 컸나. 하지만 난 지금도 도서관이란 공간에 로망이 크다. 유럽 여행은 관심 없지만 전세계 도서관 여행이라고 하면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생계를 신경 쓸 필요 없을만큼 돈을 많이 번다면 도서관을 세우고 싶다. 모두가 평등하게 지식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이라니 멋지잖아. 물론 한국에선 독서실=공부하는 곳 이란 이미지가 강하지만.

여명기

여성 주연 비-로맨스 서사라니 이렇게까지 취향 저격일 수가 있나. 단편 만화 모음집이라 하나하나 얘기하면 너무 스포가 될 거 같고 주접만 떨자면.. 정말 ‘여성-주연 비-로맨스’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모두 재미로 채운 작품들이 많아서 좋았다. 요즘은 여성 서사라는 것도 하나의 공고한 장르로 나름의 클리셰가 자리잡았다고 느껴지는데 (연대를 강조하거나.. K-문학상 스타일의 뭐 그런 거) 메시지나 교훈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 없이 그냥 너무 재밌는! 작품이 많아서 행복했다. 멋있고 화려한 여성을 만드는 게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와 다양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가 나와서 나쁜 짓도 하고 재밌는 짓도 하는 게 아주 즐거웠다. SF 와 판타지가 많은 것도 내 취향에 쏙이었고.

내 현재 직업과 환경 상 AJS 작가님의 ‘플랑크톤의 귀향’이 가장 와닿았지만 (ios 만 크래시가 많이 난다니 너무 슬퍼요) 묘하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건 남수 작가님의 몽해 였다. 작가님이 묘사하는 바다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단지 독자로서 캐릭터에 이입해 풍경을 상상해 봤을 뿐인데 내가 잡아먹힐 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들 만큼.

게이머 걸

최근에 글방에 제출한 글에 ‘게이머 걸’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 작품의 영향이 컸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부모님한테 지루한 타박이나 듣는 10대 소녀지만 게임 속 가상 세계에선 온갖 모험도 할 수 있고 길드 내에서 중요한 역할도 맡고 있으며 나아가 인정도 받는다. 어떤 단체에 귀속되어 나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부여받고 그걸 해내는 경험이 성장기에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학교 생활 만으론 채우기 힘든 영역이라 게임이 (잘만 활용한다면) 이런 부분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한다. 최소한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 듯하다.

책의 후반부에 가면 주인공이 얻은 게임 속 경험+깨달음들이 현실 속 변화로 확장된다. 자기가 사는 나라 외엔 잘 몰랐던 주인공이 중국의 노동 문제를 알게 되고 게임 속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연대해서 작은 사회운동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주인공은 게임하는 걸 반대했던 부모님에게 인정을 받는다. 또 주인공이 속해있는 길드의 연합장이 후반부에 직접 얼굴을 드러내는데, 이 사람이 성인 여성으로 나온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주인공과 주인공의 부모님을 찾아와서 ‘따님과 함께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길드의 장을 맡고 있죠. 저도 이번에야 알게 됐는데 따님이 아주 대단한 일을 했더라구요!’ 하고 설명해주고 그제서야 부모님이 ‘게임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성인이 있었군요! 어른이 있다니 안심입니다.’ 하고 주인공의 취미를 완전히 인정해줬기 때문. 이 대목에서 아주 묘한 심경이 됐다. 한번도 ‘성인 여성 게이머’로서 내게 어떤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어쩌면 누군가는 나 같은 존재를 필요로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청소년용 그래픽 노블인 만큼 낙관적으로 그려진 이야기지만, 어렸을 때 이 만화를 읽었다면 내 이런저런 취미들을 좀 더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햇살 따뜻하던 4월의 어느 주말. 집 앞 공원에 간이 소풍 겸 돗자리 들고 나갔다. 돗자리 위에 누웠다가 앉았다가 데굴데굴 하면서 다 읽었다.

정말 너무 오랜만에 읽는 추리 소설이었고, 늘 셜록 홈즈가 앉아있던 사설 탐정 자리에 코넬리아 그레이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분 전환이 됐다. 굳이굳이 취향을 따지자면 이 작품의 코넬리아 그레이 보다는 이 작품의 제목을 오마쥬한 소설 ‘탐정은 독신녀에게 딱 좋은 직업’의 필리파 던 제임스가 더 내 취향의 캐릭터였지만.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난 박상영 작가의 작품이 좋다. 가볍지만 불편하지 않게 낄낄거리면서 읽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완벽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일상을 엿보는 건 재밌으니까. 아니, 사실 정말로 작가님이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기 보단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거에 가깝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다 일상은 저질구레하고 번거로운 일 투성이지만 그걸 유머로 승화시킬 수 있는 건 작가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대중문화는 어떻게 여성을 만들어내는가

정말 좋은 책이다. 학술서 같은 제목에 학술서 같은 짜임새지만 내용은 꽤 쉽게 쓰여있고 소설 못지않게 재밌다. 말그대로 매스 미디어가 여성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게 하고 여성스러움을 어떻게 정의하게끔 유도하는지, 를 아주 구체적인 예시들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도입부에서 저자들이 직접 밝히다시피 예시는 미국 문화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아시아문화권 독자에게도 충분히 가치있는 책.

한가지 단점이 있다면 이 책에서 열거하는 예시들을 읽다가 성질이 뻗쳐서 책에다 ‘미친거 아냐?!??!’ 하고 메모하는 일이 잦다는 거. 덕분에 북마크 포스트잇 못지 않게 낙서가 잔뜩 남았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

음. 음… 주장하는 바가 너무 낙관적이라고 생각했다. 팩트 위에 논리를 쌓아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게 아니라 ‘이렇게 생각해 봐도 괜찮지 않겠냐’는 목표 지점을 찍어두고 거기로 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어차피 사람의 힘으로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재해 속이라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면에 포커스를 맞추는 게 도움이 되겠지만 그게 내가 원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거 같다. 아무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말에 알러지가 생긴 거 같다.

GV 빌런 고태경

이번 분기에 읽은 책 중에 제일 재밌었다. 책을 잡고서 하루만에 다 읽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고태경을 다루는 태도에 있다. GV 빌런은 영화의 해설이나 감상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GV (guest visit) 행사에서 헛소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외국인 감독과 동시 통역가가 있는 행사에서 굳이 외국어를 써가며 질문을 하는 유형도 있고, 최근엔 여성서사에 포커스를 맞춘 영화에 대해 ‘남성 캐릭터의 서사가 궁금하다’고 발언해 관객들의 공분을 산 유형도 있었다. 예시만 들어도 알겠지만 GV 빌런은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있어 조롱과 한숨의 대상이다. 지식과 인사이트를 뽐내려는 마음으로 마이크를 잡았겠지만 실상은 꼰대다 꼰대, 왜 저래 진짜 눈치 더럽게 없네, 같은 반응만 이끌어낼 뿐인 사람들. 그래서 나도 책을 처음 읽을 땐 고태경이 얼마나 꼰대 같고 속이 빈 강정 같은 인간인지를 시원하게 묘사하는 책일줄 알았다. 하지만 소설의 이야기는 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고태경은 적어도 허세만 가득하고 빈 강정 같은 인물은 아니었다. 물론 좀 현명하지 못하고 둔한 면은 있지만, 바로 그 현명하지 못하다는 면에서 누구보다도 화자를 닮았고 화자에게 공감한다. 책 전체에 걸쳐 고태경은 자신을 납작하게 눌러 판단하려는 화자에게, 나아가 독자들에게 매서운 꼰대의 눈빛을 보낸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분하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구나. 저도 순수수학 공부해 봤고 컴공도 공부해 봤는데 그 두 개를 이렇게 짬뽕해서 저런 소설을 쓸 수 있다구요? 아니, 나도 division by zero 가 가져오는 모순이 뭔지 알고. 수학적 논리 체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인공지능도 남들보단 잘 알고 코딩도 할 줄 안단 말이에요. 소설을 읽어보면 등장하는 개념 자체는 나도 다 아는 개념이란 말야. 근데 어떻게 이걸로 이런 글을 쓰죠? 아저씨 사실 외계인이라서 자기 경험담 쓰고 있는 거지?

이 책에 대해선 뭐 더 할 말이 없네요. 제가 누군가의 능력을 뺏을 수 있다면 꼭 작가님 상상력을 뺏을 거에요. 그것만 있다면 빌 게이츠 재산도 필요 없어.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어릴 적엔 유럽 배경의 소설에 등장하는 요리를 보면 거의 홀리곤 했다. 작은 아씨들에서 묘사하는 마치 가의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에 나도 참여해보고 싶었고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서 묘사되는 산양유와 치즈와 빵이 너무너무 궁금했다.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해서 아무튼 예쁘고 멋지고 근사한 식사를 그려봤던 거 같다. 잃어버린 적 없는 기억도 되찾게 해주는 맛이지 않을까, 뭐 그런 마음으로.

그래서 유독 문학 속 음식을 다루는 얘기가 재밌다. 석영중 교수님이 쓰신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도 진짜 너무 재밌다고 눈물 줄줄 흘려가며 읽었고, 이 책도 밤에 종종 펼쳐본다. 아주 쉽고 가벼운 책이라 휘릭휘릭 넘기게 되긴 하지만, 나도 옛날엔 참 이런 거 좋아했었는데 하고 추억을 되돌아 보는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