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분기 책 결산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전에 읽은 신유진 작가님의 에세이가 엄청나게 취향이라 그 이후로 작가님의 책은 다 찾아봤다. 1984books 에서 나온 아니 에르노의 번역본도 좋았고 인터뷰집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소설도 과연 취향에 맞을까 호기심 반 불안 반의 마음으로 사서 읽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에세이만큼 취향은 아니었다.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 거기서 배어나오는 따뜻하고 쓸쓸한 감성을 좋아했던 건데 그 감성이 작가 본인의 입이 아닌 픽션 속 인물의 입으로 나오니 좀 과하고 오글거렸다. 예측 불가능한 요소 없이 원래 알고 있던 ‘그’ 감성대로만 흘러가는 게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엔딩 보게 해주세요
‘게임 소설’이라는 장르가 있던가? 낯익은 SF 작가들의 이름이 많이 보이길래 그냥 믿고 샀다. 알라딘에서 SF 분야 책을 한 권 이상 사면 주는 맥주잔이 있었는데 그게 또 끌리기도 했다.
세상엔 참 상상력 뛰어나고 신기한 사람이 많다. 나도 게임 좋아하고 IT 지식도 있는데, 그걸 한데 엮어서 이런 서사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해봤다. 교과서가 시키는대로 Lemma 증명 여러 개를 꾸역꾸역 따라갔더니 그것들이 마지막에 멋진 Theorem 하나를 구성했을 때, 평범한 재료 몇 개로 휘뚜루마뚜루 해서 요리 하나를 후딱 해내는 사람을 봤을 때와 비슷한 경외감이 든다. 내가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걸 잘 알아서 질투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한텐 무리다. 나는 그냥 박수 열심히 치고 카드 시원하게 긁는 훌륭한 소비자가 되기로 했다.
명예, 부, 권력에 관한 사색
속초에 가서 가장 열심히 읽었던 책. 물회 한 그릇의 가격과 내 연봉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던 책이기도 하다.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마주친 누군가가 여름 휴가동안 읽기 좋은 책으로 추천해 줘서 구매했다. 저자가 이전에 쓴 책 “마르케스의 서재에서”를 언급하거나 철학적인 비유를 하는 건 좀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제목과 표지에서 느껴지는만큼 대단한 내공을 필요로 하는 책은 아니었다. 정치경제에 대한 지식 없이도 무난하게 읽을 수 있다. 통찰력 있고 유머도 있는 교수님의 TED 강의 모음집 같은 느낌?
명예, 부, 권력 이렇게 셋을 한 줄로 세워두고 보면 명예는 정말이지 옛것이다. 누가 봐도 부가 가장 최신유행이고, 명예라는 단어는 글자 하나하나에서 고루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저자는 나이 든 아저씨 답게 명예의 시대를 그리워한다. 실은 나도 명예의 나라에 사는 시민1이고 싶다.
김지은입니다
언젠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씩 미루다가 7월 6일에 손정우 석방 뉴스를 보고 책을 구매했다.
이제는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연예인 중에도 성범죄자가 흔해져서 또 누구누가 룸살롱을 들락날락 했다더라 하는 뉴스를 들어도 놀랍지 않다. 공인을 좋아하기 참 힘든 세상이라는 자조나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있자면, 아니 그래도 21세기인데 이렇게나 시발이라고?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선거철에 누가누가 어떤 공약을 내세웠나 살펴보던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사람 덜 된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래도 빨간 당보다는 파란 당이 낫지 않냐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최근 들어 조금씩 부서지다가 이 책에서 산산히 조각났다. 그냥 골고루 시발것이다.
인도이야기
작년부터 아시아에 관심이 많아졌다. 별다른 계기는 없었는데, 그냥 나의 새로운 취향에 눈뜬 건가 싶다.
중고서점에 책을 팔러 갔다가 표지가 멋진 책을 발견해서 샀다. 한 나라에 대해 설명하면서 여행가이드 이상의 통찰을 주지 않는 책을 싫어하는데, 목차를 봤을 때 인도에 대해 다룰 건 다 조금씩 다루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읽기 썩 편한 책은 아니었다. 매우 잘 만든 BBC 다큐멘터리에서 나레이션만 따온 것 같달까. 여러 시대와 장소를 종횡무진하며 밀도 높은 지식을 나열하는데 그 태도가 친절하지는 않다.
언젠가 인도 여행을 꼭 가보고 싶은데 가능하려나.
원본 없는 판타지
너무나 멋진 책이다. 한국의 여성문화사에 관심있는 자 모두 이 책 앞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려야 마땅하다. 서문부터 끝내준다.
“이 책의 가장 원대한 야심 중 하나는 남자와 여자, 이성애자와 비-이성애자,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의 위치를 그저 기계적으로 뒤바꾸는 것을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유일한 방법론으로 간주하는 게으르고 편협한 사고를 단호히 물리치는 것이다. 그런 인식은 가부장제는 물론, 제국주의, 국민/국가주의, 자본주의 등 지배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모든 기이하고 번역 불가능한 비규범적 실천들을 오직 반대정치의 산물로 치부해 버린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기존 지배질서와 전통을 ‘원본’으로 상정한 채 본질주의를 승인·수호하게 되는 자가당착을 수반한다… (후략)”
샤프로 밑줄 쭉쭉 긋고,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페이지의 사진을 찍고 트위터에 올리고, 책에서 언급하는 사료들을 직접 찾아보며 열심히 읽고 있다. 특히 가수 이선희 씨와 톰보이 컬처를 다룬 챕터가 심금을 울렸다. ‘네가 무슨 여자냐’와 ‘넌 그래도 여자애가 어!’ 사이에서 열심히 허우적댔던 나의 10대가 떠오르는 내용이 한가득이었다.
악어노트
‘펀홈’과 ‘당신 엄마 맞아?’는 정말 멋진 책이었다. 두 책을 통해 움직씨 출판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겨 북클럽에 가입했다. 가입할 때 책 한 권을 받을 수 있길래 이 책을 택했다.
‘언더그라운드 퀴어 컬트 정전’이라는 수식어가 참 걸맞는다. 날씨에 대한 묘사가 많지 않은데도 소설 전체가 눅눅하고 습하다. 그렇지만 한국의 장마와는 향이 다르다. 진청색의 운동복을 입은 주인공이 자전거 뒤에 수령을 태우고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곳이 절대 한국일 수는 없다는 느낌이 든다. 조금 더 너저분하고 습하고 부자유한, 나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그런 도시겠지. 하긴 내가 1980 년대 대만을 무슨 수로 알까. 내가 아는 대만은 약 8년 전에 먹었던 치파이와 망고빙수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의 훌륭함과 별개로 나의 읽는 속도가 더디다. 애처로운 사랑, 출구 없는 자아 이야기가 좀 버겁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부딪혀오는 건 소설 속 캐릭터라도 부담인 거 같다. 천천히 읽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