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분기 책 결산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작년에 너무 재밌게 읽었어서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봤다. 아는 거 많고 문장 정확하게 쓰는 평론가가 자기 취향의 작품들을 성실하게 영업하는 책이었다. 책의 정의에 따르면 나는 으스스한 것보다 기이한 게 훨씬 취향인 사람.
민담형 인간
책의 방향이 좀 어중간하다고 느껴졌다. 차라리 각 나라의 민담을 소개해주는 책이었다면 민담 입문 가이드로 가볍게 읽었을 테고, 학술적인 내용을 많이 다뤘다면 (실은 이 쪽을 기대했는데)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을텐데 이도 저도 아니었달까. 저자 분은 민담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지 꽤 높은 텐션으로 설명을 이어가지만, 독자로선 같이 즐거워지기 보다 구경꾼의 마인드로 ‘아 예 그러시군요…’ 하게 되는 책.
책에 갇히다
책과 서점에 대한 SF 앤솔로지 라니, 책 소개에 쓰인 모든 단어가 취향이라서 안 읽어볼 수 없었다. 수록된 단편 중 “붉은구두를 기다리다” 와 “금서의 계승자”가 제일 취향이었다. “붉은구두를 기다리다” 의 경우 종이책 없이 구전설화만이 존재하는 세계관으로 시작해서 소설 자체가 다시 하나의 구전설화를 이루는 구조, 주인공의 성별을 계속 교묘하게 숨기다가 마지막에 드러내는 연출, 왼아버지/오른아버지라는 섬세한 표현 등이 좋았다. “금서의 계승자”는 책에 대한 SF라는 소개에서 기대했던 내용에 가장 가까웠고, 아포칼립스 세계관과 캐릭터들이 너무너무 현실적이어서 읽는 내내 과몰입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왠지 억압받는 시대의 첩보물이나 혁명물 잘 쓰실 거 같은데. 일단 브릿지에 문녹주 작가님이 쓰신 첩보물이 있길래 킵해뒀다.
언니밖에 없네
3월부터 4월 중순까지 말과활 아카데미 비평 강좌를 듣는다. 이 책은 4월 첫째주에 다뤄질 예정인데, 퀴어문학 단편선이라는 말에 그냥 도서관에서 빌려서 바로 읽고 글을 썼다. (피드백을 받고 싶어서 썼는데 아직 아무도 피드백을 주지 않았다 주르륵..)
퀴어문학과 퀴어영화는 의리로라도 보는데 보고 나면 늘 약간씩 외롭다. 퀴어는 여전히 숨쉬듯 자연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장르적 구분이 필요하구나 싶고, 그와중에 극적인 로맨스와 섹스로 가득하면 좀 더 거리감을 느낀다. 뭔가.. 꼭 이렇게 극적이어야 하는 걸까요? 설명하긴 어렵지만.
미술관이라는 환상
친한 친구가 자기 인생책이라며 장장 일년간 영업해서 결국 읽은 책. 역자해제에서 아주 친절하게 세 줄 요약을 해준다.
- 공공 미술관은 의례의 공간이자 환상의 공간이다
- 공공 미술관의 핵심적 의례 내용은 근대 부르주아 주도의 국민문화의 형성과정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
- 공공 미술관의 의례 내용은 계속 진화하고 변화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의 공공 미술관은 소비자본주의와 결탁한 고립된 남성적 자아를 위한 젠더화된 공간이 되고 있다
미술관이 판단하는 ‘전시할 가치가 있는 예술’이 사실 얼마나 많은 것에 이리저리 휘둘리는지, 그 설명도 재밌었지만 역시나 3의 내용이 제일 흥미로웠다. 고립된 남성적 자아라는 말 너무 찰떡이야.
만화
혼자를 기르는 법
책읽기 모임을 함께 하는 친구가 자기 인생 만화책이라고 추천해줘서 중고서점에서 샀다. 사실 이 만화는 추천을 받기 이전에 너무 트렌드였다. 여성서사에 관심 있는 모든 인싸들은 이 만화를 읽은 거 같았다. 하지만 1,2권을 다 읽어본 결과 나에게는 딱히 꽂히는 지점이 없었다. 재미는 있었고 인상적인 표현도 많았지만 작가가 자기 자신을 기르는 법과 내 방법은 결이 다른 거 같다.
동인녀 츠즈이씨
사실 내가 나를 기르는 방법은 이 책에 훨씬 가깝다. 이 만화책 진짜 모든 페이지가 빠짐없이 웃기다 ㅠㅠ 사회생활에서 썩 드러내고 싶지 않은 취향과 덕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만화는 순도 280%의 카타르시스를 준다.
노란 책
클럽하우스 앱을 쓰던 시기에 만화와 웹툰에 대해 얘기하는 방이 있었는데 거기서 추천받았다. 표제작인 ‘노란 책’을 비롯해 여러 단편만화가 수록되어 있고, 난 아직 표제작밖에 읽지 못했다. 나머지는 아껴 읽어야지.
타카노 후미코가 만화가들이 좋아하는 만화가로 불린다는데, 읽으면서 정말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거리는 별 게 없다. ‘티보 가의 사람들’이라는 소설에 - 실제로 있는 소설이라 인용은 출판사의 허락을 구했다고 한다 - 푹 빠져있는 주인공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일상 생활 안에서도 책에 과몰입해 있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나중엔 주인공이 취직 준비를 위해 책을 반납하는 것으로 끝난다. 별다른 사건도 극적인 전개도 없다. 그저 70페이지 남짓한 분량 내내 과몰입이 현실을 어떻게 침범하는지만 보여주는데, 주인공이 하는 상상이 너무너무 자유로워서 독자도 같이 그 해방감에 넘실넘실 하게 되는 느낌. 그림체도 아주 느슨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