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내내 이 책을 읽었다.

​나는 나를 무성애자로 정체화했고 무성애자 커뮤니티에도 가입이 되어 있지만, 이제 이 다음에 뭘 할 수 있는지는 감이 오지 않는다. 종종 주위에서 묻는다. 내가 유성애자라 잘 모르는 걸 수도 있는데,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유성애자랑 연애를 하려면 사전에 미리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유성애자와 무성애자의 관계가 지속 가능해? 질문이 깊어질수록 나도 길을 모른다. 끝없이 연기를 해야 하는 관계도 싫고 불가능한 가능성만 쳐다보고 사는 것도 싫은데 그 외의 선택지가 뭐가 있는지, 나도 모르고 주변 사람도 모르고 미디어도 모른다. 로맨스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1부터 100까지 다 미디어가 알려 줬는데. 무성애를 어떻게 하는지도 미디어가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 책은 초반부에 무성애라는 용어와 AVEN 위키의 역사를 다루고, 중반부에선 무성애와 여러 소수자성의 교차 (무성애자가 white/black/asian/latino 일 때, male/female/non-binary 일 때 마주하는 편견, disabled 일 때 마주하는 편견 등) 를 이야기하고, 후반부에선 amatonormativity (정상적인 relationship 을 정의하는 틀이 있고 로맨스가 그 핵심 요소라고 전제하는 사회적 가정) 을 깨부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사실 이렇게 세 줄 요약하기엔 책에 다루는 내용이 넓고 다양한데, 아직 완성된 독후감 한 편을 쓸 만큼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일단 인상 깊었던 내용만 메모로 남기려고 한다.



# 정체화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저 섹스에 별로 관심이 없는 유성애자, 또는 성욕 감퇴를 (질환으로서) 겪고 있는 유성애자가 아니라 나를 ‘무성애자’로 명확히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내가 하는 수많은 경험이 무성애자들의 그것과 궤가 같다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딘가 이상하거나 결여된 사람이 아니고, 다른 무성애자들의 존재와 글을 통해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 무성애를 sexual orientation (성적 지향) 의 한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LGBTQ+ 커뮤니티와의 연결점을 만든 것은, 현재까지 가장 잘 알려진 무성애자 커뮤니티 AVEN 의 개설자 David Jay. 하지만 무성애를 성적 끌림의 ‘결여’로 정의함으로서, 우리는 우리를 무언가의 negative 로 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 성적 끌림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가장 설명하기 힘든 게 바로 우리인데도.

# 당연히, 자위 행위를 하는 무성애자도 존재한다. David Jay 는 이를 masturbation paradox 라고 부르며 세상에 이것만큼 sexual 한 게 어딨냐고 묻는다. 파트너와의 감정적 빌드업도 필요 없고 오로지 sex drive 를 위한 행위라는 점에서 이게 가장 purely sexual 하지 않느냐,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어째서 sexuality 가 ‘결여’ 되었다고 부르는가?

​# 세상은 한쪽에 동성애, 한쪽에 이성애를 두고 이은 직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ace의 세상 역시 한쪽에 ace, 다른 한쪽에 non-ace, 중간 쯤에 데미섹슈얼을 놓은 직선이 아니다. 그보다는 다양하고 복잡한 경험, 성적 끌림의 ‘결여’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경험까지 모두 끌어안는 우산 형태에 가깝다 ​

# 섹스는 정치적이다. 누가 기쁨을 누리고, 어떤 행위가 전복적으로 여겨지는가 하는 것은 모두 정치적이다. 가난한 여성, 유색인종 여성, 장애인 여성이 받아들이는 섹스와 페미니즘과 해방의 의미는 제각각 다르다. 모두가 페미니즘의 중심에 섹스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며, 나는 더 이상 페미니즘과 멋진 섹스 라이프가 반드시 함께 간다고 믿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 ​여성, 유색인종, 그리고 장애인의 경우 자신의 asexuality 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왜냐면 젠더, 인종, 장애에 대한 편견과 그에 따른 부정적인 경험 때문이라고 (성적인 끌림을 느끼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기 너무 쉽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는 정치적이다. 섹슈얼리티는 절대로 젠더, 인종, 문화, 역사와 독립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섹슈얼리티 그 자체에 대해서만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은 과학 실험이 아니므로, 변수 하나하나 조절해 가며 여러번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수는 없다. 그 어떤 섹슈얼리티도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섹스 인구가 줄어든게 슬픈 일일까? 섹스를 즐기는 대신 게임을 즐기는 사람을 우리가 동정해야 하나? 왜 섹스를 즐기는 사람은 인생을 즐길줄 아는 열정맨이고 방에서 전자기기 세 개 동시에 돌리며 사는 사람은 루저 취급을 할까? ​

# 무성애자 뿐만 아니라 많은 소수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그 소수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기인하지는 않을지 신경 쓰고, 동시에 자신의 행동이 그러한 스테레오타입을 부정하기 위한 몸부림은 아닌지 의심한다. 소수자는 종종 그 카테고리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대해져 역할을 부여받고, 이때의 행동은 절대 정해진 각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특히 소수자는 미디어에서 지배적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를 내면화하기 쉽기 때문에 ‘소수자인 나’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인식하는데 촉을 세우게 된다. ‘진짜 나’와 ‘주변에서 대해지는’ 나, 이러한 이분법적 자기인식에서 혼란을 겪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 gold star ace 라는 표현이 있다. 그 누구와도 섹스를 해보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가 무성애자임을 깨달은, 서구권에서-교육 잘 받고-적절히 풍요로운 가정에서 자란-백인 무성애자. 즉 어떠한 소수자성도 가지지 않고 오로지 asexuality 만을 지닌 사람을 뜻한다.

당연히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 하지만 어떨 땐 무성애자 본인이 스스로를 의심한다. 내가 이러이러한 문화적 환경 때문에 무성애자로 정체화하게 된 건 아닐까? 내가 가진 질병이 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 어린 시절 트라우마? 부정적인 성경험? 만약 내가 어떠한 계기로 인해 무성애자 정체화를 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 계기를 극복하면서 무성애자가 아니라고 재정체화를 하게 됐다면, 나는 곧 asexuality 가 치료 가능한 질병이라는 관점의 근거가 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당신의 장애가 무성애자로 정체화하게 된 계기였어도, 당신은 무성애자가 될 수 있다. 그 계기가 트라우마였어도 당신은 무성애자가 될 수 있고, 나이를 먹다 보니 성욕이 낮아진 거여도 당신은 무성애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무성애자 커뮤니티는 이 모든 사람들을 적절하게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평생 무성애자 커뮤니티에 속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곳에 들어가는 것도, 빠져나오는 것에도 장벽이 있어선 안 된다.

# 흔히 사랑(이라고 불리는 진지한 감정적 교류) 없는 섹스는 가능해도 섹스 없는 사랑은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서구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과테말라, 사모아, 멜라네시아 등의 지역에선 nonsexual relationship 에 대한 문화적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결혼은 오히려 경제적 동맹에 가깝고, 감정적인 관계와 섹슈얼 관계는 반드시 함께 가지 않으며 romantic friendship (쉽게 말해, 친구와 연인 사이 관계) 를 가지는 게 결혼을 위협하는 요소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어떨 땐 반지를 주고받는 의식을 동반하기도 한다.

키스를 로맨틱한 행위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류학자들이 168개의 문화권을 조사했을 때, 키스를 로맨틱하고 섹슈얼한 행위로 보는 곳은 46%에 지나지 않았다.

# 관계를 거절하기 적절한 이유, 그렇지 않은 이유 같은 건 없다. ‘No’는 언제나 적절하고, 누구에게든 할 수 있으며, 평생 선언할 수도 있다. 한쪽이 섹스를 원하고 한쪽은 원하지 않는다면, 원하는 쪽의 욕망과 원하지 않는 쪽의 욕망은 동등하다.

낯선 사람을 가정하면 훨씬 쉽다. 만약 길에서 처음 본 사람이 나와 섹스를 하고 싶어하고 나는 그와 섹스하고 싶지 않다면, 여기선 당연히 섹스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존중받아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로맨틱 관계에 있는 두 명 이상의 사람에 대해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걸까? ​

# Rape is not sex, it’s violence. 슬로건으로선 훌륭하지만 결국 강간은 나쁜 거고 섹스는 좋은 거란 의미를 내포하고 만다. Rape is violence 를 말하기 위해 not sex 를 끌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섹스는 그저 행위의 종류일 뿐인데 거기에 좋다/나쁘다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모든 성관계를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순 없다. 애매하게 동의했거나 애매하게 폭력적이었던 관계는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입으로는 Yes 를 말했지만 바디 랭귀지로는 No 를 말했다면 그것은 강간인가 섹스인가? 이러한 이분법 구분선을 그어 버리는 건 강간이 나쁜 일이란 걸 강조하기엔 효과적이지만, 섹스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뭘 구성하는지에 대해 말할 기회는 점점 사라진다.

Yes means yes, no means no 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성관계에 대한 동의는 절대 Yes/no 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고, 우리는 좀 더 다층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책에서는 Emily Nagoski 의 Consent 모델을 그 대체제로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