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적 힘의 비밀

앨리슨 백델의 신작. 백델의 책은 늘 어렵고, 학술적인 레퍼런스를 주렁주렁 달고 있고, 내가 이 책의 절반은 이해한걸까 의심스럽지만 이해한 그 절반이 진하게 감동적이다. 독서광이었던 백델이 알고 보니 운동광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좀 섭섭하지만 그래도 재밌었다. 저자는 그저 자기 삶에서 운동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얘기했을 뿐인데 어쩐지 내가 응원을 받았다. 서른과 마흔에 도달하는 게 덜 두려워졌어.

어쩌면 내가 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누군가에겐 이런 힘이 될까?

R.U.R. 로줌 유니버설 로봇

‘로봇’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던 희곡. 로봇의 개념을 제시했다니 끝내주는 SF 겠다 생각했는데 이 희곡에서 로봇은 기계가 아닌 인조인간을 뜻하는 단어였고, 작품의 내용도 공상과학 판타지 보다는 군중 심리에 휘둘리지 말라고 일침을 주는 것에 가까웠다. 인조인간의 간, 뇌, 소화 기관 등을 생산하는 공장 묘사가 제법 그로테스크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로지나 노, 지나

오랫동안 알라딘 보관함에 있었던 책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구매했고 이번에 읽었다. 미등록 이주민 아동들에 대한 르포 소설.

읽는 내내 주인공 아이들이 안타까웠고, 한편으론 이 안타깝다는 정서를 내 안에서 마무리 짓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이 됐다. 또 이런 이야기를 오로지 책으로밖에 접할 수 없는, 단단하게 분리된 계급 사회가 오싹하다는 생각도.

난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우리도 불과 몇십년 전에는 난민이었다는 역지사지 설득을 많이들 시도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불안하다. 언젠가 내가 비슷한 처지에 처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챙겨야 하는 거라면, 최대한 ‘저 처지’에 처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버릴수도 있잖아요. 내 안에도 ‘저 처지가 되기 싫다’는 불안이 있고. 어쩌면 내가 이 난민들과 살갖 부대끼며 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순수한 동정심만을 가지는 걸 수도 있고.

어떻게 지내요

학창시절에 애용했던 대전의 서점 우분투북스 에서 책 구독을 신청했다. 홍차의 역사에 관련된 책 한 권과 이 책을 받았다. 암 말기 진단을 받은 친구와 그 친구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조용하고 잔잔하고 좋은 이야기였다. 병으로 더 고통스러워지기 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리라 결심했다가 결국은 마음이 바뀌는 이야기는 이전에도 접한 적이 있지만, 너무 극적으로 다루지 않아서 좋았다. 나이 들어도 별 거 없다는 기조는 좀 쓸쓸은 하되 담백했다.

공부 중독

서점에서 제목을 보고 거의 오열하듯 웃었다. 학사 학위 하나로는 충분치 않아서 방통대를 다니는 사람에게 너무 필요한 책인걸? 하고 바로 구매했다. 책 자체는 무난했다. 읽고 나면 맞는 말.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던 내용을 잘 풀어서 설명해주는 책. 공부를 도피나 유예의 수단으로 삼지 말자는 이야기.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어머 맞는 말이야 나도 앞으론 달라져야지’ 생각하는 것도 어찌 보면 도피나 유예가 아닌가요. 사실 그런 깨달음으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잖아요. 나 너무 염세적인가…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하마글방의 글방지기 미나가 오랫동안 써오던 책이 드디어 출간됐다.

현대 의학이 남성의 신체를 표준으로 삼고 여성의 신체를 탐구해 왔기 때문에, 그리고 의료 산업의 발전 방향에 제약회사의 이권이 같이 엮여있기 때문에, 현대 의학은 여성의 우울증을 설명하기에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우울증은 아니었지만 진단명을 받아본 사람으로서 공감가는 내용이 많았다. 내가 나 자신을 파악하는데 진단명이 도움이 되기도 하고, 어떤 지점에선 진단명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위안이 된다. 내가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니라고, 이 고통은 충분히 아파할 만한 고통이라고 의학이 보증해 주는 거니까.

하지만 어느 병원의 어느 의사에게 가느냐에 따라 진단명은 쉽게 달라진다. 진단명이 나오는 과정은 오로지 내 말과 행동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모르는 만큼 의사도 나를 모를 수 있다. 진단명은 때로는 나와 맞지 않고 그릇된 해석을 제공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내가 의학으로부터 보증받은 병명을 쥐고 있어도 ‘요즘은 개나소나 우울증이래’ 하면서 후두려친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에게 내 아픔을 인정받기 위해 더한 짓을 해봤자 나만 손해고, 그래선 주객이 바뀌었을 뿐이다. 오히려 힘이 되어주려던 사람들에게 부담만 얹어주는 꼴일지도.

힘들다 얘기하는 것에 반드시 현대 의학의 승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고, 그보다는 힘듦을 언어화하는 연습이 더 중요하다. 그걸 표출하는데 페미니즘이 도움이 된다면 페미니즘을 차용하고 샤머니즘이 도움이 된다면 샤머니즘을 차용하는 거지. 가까운 돌봄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돌봄에 기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