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를 재밌게 읽은 이후로 우치다 타츠루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이 책도 서점에서 보자마자 구매했는데, 다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후반부 에로스론은 아직도 잘 모르겠고. 하지만 이해한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저자의 다른 책인 ‘하류지향’에서도 스승-제자 관계에 대한 언급이 있었기 때문에, 이 화두가 생각보다 저자를 오래 사로잡고 있었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유와 주체성보다 수동성, 물러섬을 더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도 좋았다.

스승-제자 관계

  • ~할 줄 안다는 것은 무작위로 끝없이 나열할 수 있지만, ~를 모른다는 건 무작위로 나열해선 아무 정보값도 되지 못한다. ~를 모른다는 언명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전달하려면 적절한 어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조감적 시야를 갖는 사람만이 이런 어법을 사용해 스스로의 포지션을 말할 수 있다. 이런 조감적 시야를 획득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고, 이 시야가 곧 스승이다. 사제 관계란 타자와의 만남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 모든 제자는 각각 저마다의 방식으로 스승에게 이해가 닿지 않는다. 그건 스승이 더 똑똑하고 짬이 있어서 지식의 총량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맥락이라면 제자는 언젠가 스승을 초월할 수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스승-제자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제자는 언제나 ‘이해를 초월한 존재’로서 스승을 바라본다. 그것이 제자의 유일무이성을 결정 짓는다.
  • 유대교에서 다루는 탈무드는 다양한 읽기에 열려있는 텍스트다. 하지만 이것이 자의적 읽기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다양한 읽기와 자의적 읽기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읽기의 역사적 계속성이다. 유대교에선, 스승이 없는 자는 탈무드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인쇄물을 갖고 혼자 독학한들 그것은 ‘다양한 읽기’로 쳐주지 않는다. 탈무드를 예지의 책으로 읽기 위해선 스승과 제자의 대화가 필수.

행위가 있고 그 다음에 주체가 있다

  • 말하기는 윤리적이다. 내 의지가, 내 뜻이 당신에게 전달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리스크를 감내한다. 나는 당신에 의해 상처 입을 수 있다고 알려진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는 이러한 폭로의 모드를 선택하는 것. 그런데 이건 사실 선택이 아니다. 주체가 먼저 있고 그 주체가 결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결단이 선행하고 이러한 행위를 기동시킨 시점이 사후에 확정되고, 그것을 주체라고 부른다. 내가 타자에게 폭로되는 것이 아니고, 타자에게 폭로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인 것이다.
  • 자아의 개념을 둘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전체성을 지향하는 나’, 나머지 하나는 ‘무한을 지양하는 나’ 이다.
  • 전체성을 지향하는 나는 제국주의적 개척심을 갖고 있다. 미지의 것을 끝없이 잡아당겨 내가 아는 것으로 바꾼다. 이러한 나의 본질은, 변화를 거듭하고 거듭해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동일자로 볼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책에서는 이런 나를 ‘오디세우스적 자아’로 부른다.
  • 오디세우스적 자아는 ‘타인 자’를 경험할 때, 경험하는 자신을 기술하는 눈길에 자기를 맞춘다. 이때 타자의 타자성은 나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오디세우는 결코 ‘타인 자’와 관계를 갖지 않고, 이는 결국 고독을 불러온다.
  • 무한을 지양하는 나는 신의 말씀을 받고, 타자로부터의 부름에 응해 성립하는 주체성이다. 책에서는 이런 나를 ‘아브라함적 자아’로 부른다. 아브라함은 신의 말씀을 듣는다. 이때 신은 아브라함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아브라함과는 어떤 도량형도 공유하지 않는 존재다. 이처럼 아브라함적 주체가 만나는 건 ‘절대적으로 타인 자’ 이다.
  • 아브라함은 신이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이걸 곧이 곧대로 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어떠한 비유인지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받아들여 행동하든 그 책임은 아브라함에게 있다. 곧이 곧대로 이삭을 죽여 바쳤다면 아들을 죽인 책임은 아브라함에게 있다. 이처럼 누구에 의해서도 대책 불가능한 유책성을 받아들이는 자가, 레비나스가 정의하는 성숙한 인간이다. 신 없는 세계에서도 여전히 선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는 자.

비관조적 현상학

  • 사랑하는 감정과 대상은 독립적이지 않다. 사랑받는 대상은 사랑하는 감정이라는 지향적 정서 안에만 존립한다. 마찬가지로 ‘한 권의 책’의 의미는 그것을 ‘읽음’에서 생겨난다. 같은 책을 여러 사람이 읽어도 이 사람들이 ‘읽은’ 것이 동일한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 따라서 주체가 대상을 ‘본다’고 하는 관조적 태도로 임하는 것만으로는 구체적인 생의 두께를 놓치게 된다.
  • 표상할 수 없는 것의 말을 청취할 수 있다는 가능성, 이것이 곧 인간의 인간성이다. 이러한 수동성이 인간의 주체성을 기초지운다.

정주하는 자아

  • 다시 오디세우스적 자아. 나는 ‘나 아닌 것’, ‘타인 자’를 양식으로 향유한다. 가령 내가 음식을 먹는 건 ‘나 아닌 것’의 에너지를 나 자신의 에너지로 전환시킴인데, 그와 같이 ‘나 아닌 것’에 의존하는 건 조금도 나의 자기동일성을 흔들지 않는다. 그러한 ‘나’는 고독하다. ‘내’가 항상 ‘나 아닌 것’을 향유하고 그것을 ‘동일자’ 안으로 흡수해버리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고립해 있다는 것, 그와 같이 닫혀 있다는 것은 자아의 한 속성이 아니라 자아의 본질이다. 향유한다는 것은 외부로의 진출과 비슷하게, 실은 내부에로의 자폐이며, 오로지 고립하는 일이다.
  • 모든 것은 정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아가 우선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어딘가에 집을 만들어 거기에 정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이다’ 라는 사실 그 자체가 ‘정주했다는 것’에 의해 기초지어진다.
  • ‘침츰’. 중세 루리아파 카발라의 중심적인 이설. 여기에 따르면 천지창조는 신의 자기수축에서 시작된다. 신 자신의 내부의 한 영역을 포기함으로서 원초적인 틈새가 생긴다. 여기서 만물이 탄생한다. 즉 무한한 자의 최초의 행위는 바깥으로 내딛는 일보가 아니라 안으로 틀어박히는 일보, 물러나는 행동이다.
  • 침츰에서 신의 수축이 창조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냈듯 수축-응축된 공간에는 외부에 없던 무언가가 생겨 있다. 나에게 요소로 귀속되지 않는 것이 이미 거기 살고 있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초영지성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초영지성은 친밀성의 상냥함 혹은 따뜻함 안에 생성된다. 비게 된 공간에 세계가 창조되듯, 자아가 혼자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우선 있고, 나를 환대하고, 나를 위한 장소를 마련하도록 장소를 비워줘야 한다. 집에 나를 맞이하는 타자는 집의 안으로 물러서고, 모습을 감춤으로서 그 존재를 드러낸다.

보부아르에 대한 반박

  • 모두에게 자유와 주체성이 궁극적인 가치일까. ‘모든 개인은 주체로서 자기 정위 해야 한다’는 보부아르의 공리는 그녀가 생각하는 만큼 자명한 것일까. 보부아르는 ‘물러섬’이라는 행위를 여성이 자유 의사에 따라 주체적으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역사적 조건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 본다.
  • 하지만 모두가 본질적 주체이기 위해 싸우는 건 좋은 일인가. 보부아르 역시 이기적으로 자원을 쟁취하는 약육강식의 리얼리즘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녀가 제시한 건 (서로서로 양보하는) 미덕. 하지만 왜 미덕이 나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고 타자에게는 우선적으로 요구되지 않는가.

두 개의 얼굴

  • 인간은 두 개의 얼굴을 갖는다. 만약 얼굴이 하나라면 인간은 무언가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다. 얼굴이 두 개 있다는 건 어디에 있어도 신에게 노출된다는 의미.
  • 인간의 인간성은 주체의 종언.

유책성의 인수

  • ‘욥기’에서 욥이 주님은 어찌 이런 고통을 주시나 하고 하늘에 묻자 신은 반문한다. 세계의 창조 때에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 인간은 최후의 피조물이며, 인간은 이 세계의 창조에 손을 보태지 않았다. 세계의 창조에 늦게 온 자는 그가 태어나기 전 일에 대해 유책이다.
  • 남자가 만들어지고 여성이 그 다음에 만들어졌다. 유책성의 논리에 따르면 가장 마지막에 태어난 여성이야말로 타자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주체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남성들에게 유리한 결론. 무엇보다 ‘당신은 나보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말만큼 비윤리적인 말은 없다.
  • 윤리성은 ‘내가 당신보다 유책이다’라는 선언에 의해 기초지어진다. 유책성은 누가 더 유책인가 하는 논의로 결정지어지지 않는다.
  • 등격적 존재자가 있으면 거기에는 전쟁이 일어난다. (여기서 전쟁이란 레비나스의 비유적 표현.) 그들은 하나의 정체성에 귀속되기를 거부하고, 공동성을 거부하고, 법을 거부한다. 세계가 인간적이라면, 윤리가 세워지려면 거기엔 한 걸음 먼저 유책성을 인수하는 자와 한걸음 늦게 오는 자의 시차가 있어야 한다. 평등에 기초하여 평등을 실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에로스론

  • 법리적 공정과 인간적 공정. 인간적 공정이 더 우선한다.
  • 인간적 공정을 기초지우기 위해 생겨난 ‘시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열린 새로운 차원, 그것이 에로스의 차원이다.
  •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외부에 있어 나의 지배나 파악을 벗어나 있다. 애당초 내가 지배하고 파악하고 통제 가능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결코 나에게 몸을 맡기지 않는 것. 그러한 것만이 나의 욕망에 불을 붙인다. 그러나 나의 사랑은 그런 식으로 ‘타자성’을 구성하는 요건이 갖추어진 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할 요건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는 상관없이, 느닷없이 우리를 휘어잡는다.
  • 사랑은 기원적으로 불평등성을 품고 있다. 그것은 나와 ‘타인 자’의 결부가 상호초월적인 양지의 불평등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 윤리적 질서에서 정의적 질서, 인간적 공정에서 법리적 공정으로의 이동을 요청하는 건 타자의 다수성이라는 현실이다. 내가 타자와 단둘이 있다면 나는 타자에 대한 모든 유책성을 인수한다. 그런데 여기에 제3자가 등장하면 나와 타자는 더 이상 유일무이하지 않다. 이때는 비교 불가능한 것을 비교함으로써 계측하고 헤아리는 일이 필요해진다.
  • 그렇다고 법리적 공정이 더 앞서진 않는다. 정의를 요구한 것은 사랑의 과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