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솔직히 나는 이브 생 로랑을 브랜드 이름으로만 알았지, 실제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브랜드를 따온 거란 사실도 이 책으로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이브 생 로랑이 게이였으며 파트너가 있었다는 사실도. 이브는 알제리 전쟁 참전 이후 평생을 알코올과 약물에 매여 살았는데, 그럼에도 그의 파트너였던 피에르 베르제는 이브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평생을 함께 하다가 이브가 죽기 며칠 전 합법적인 부부가 됐다. 피에르는 이브의 임종을 지켰고, 이브보다 몇 년을 더 살다 세상을 떠났다.

피에르는 이브의 연인이자 사업 파트너인 동시에 열렬한 지지자였다. 책을 읽고 있자면 이브 본인보다 피에르가 더 이브의 성과를 자랑스러워 하고, 이브의 명예를 지키고자 애쓴다는 느낌이 든다. 이브는 아주 긴 시간을 알코올과 약물에 휘둘리며 신뢰도 저버리고 삶의 주체이기도 저버리고 말년엔 자기 파트너를 지독하게 갉아먹었는데, 그럼에도 끝까지 함께했다는 게 대단하다. ‘그런 모습까지도 사랑했다’ 는 결말은 진부해 보이되 절대 진부하지 않다. 그런 마음은 결코 빛바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지브롤터 근처에도 가지 못했어. 그렇다고 자책하지는 마. 본래 가장 훌륭한 여행은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이고, 나는 너의 창조적인 작업을 통해 충분히 여행했으니.”

감정화하는 사회

어려운 책 같이 읽기 독서모임에 내가 추진해서 가져갔던 책인데 코로나 이후에 모임이 유명무실해지면서 한동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래도 매듭은 지어야 하는데- 하며 한참을 바라보다 어느 날 갑자기 손이 가서 빠르게 끝냈다.

하나의 주제로 이어지는 책이라기보단 오쓰카 에이지의 근래 담론 모음집에 가까워서 잘 이해되는 챕터도 있고 조금 겉도는 챕터도 있었다. 일본의 전 덴노가 국민들로 하여금 공감을 유도했던 연설을 다룬 1장 ‘감정 덴노제론’은 흥미로웠고, 2장 ‘이야기 노동론’은 요 근래 내 생각의 근간이 됐다. 2차창작, 유저의 의견 등으로 불리는 모든 행위는 시간제 노동과 양상이 달라서 그렇지 엄연히 노동이고,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무상 컨텐츠로 플랫폼에 제공하고 있고, 사람들은 감정 표출이라는 형태로 노동하도록 항상 요구받는다는 관점을 이 책에서 처음 접했으니까.

학원 일진물의 계급 구도를 다룬 3장 ‘스쿨카스트 문학론’도 재밌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역사수정주의가 가미된 파시즘 교양소설로 해석하는 7장 ‘교양 소설과 성장의 부재’ 도 흥미로웠다. 후기 챕터에서 ‘작가도 독자고 비평도 편집도 본질적으론 이미 다 죽었다. 우리의 감정도 AI 가 대행하고, 이런 식으로 ‘감정화하는 사회’가 끝장나는 걸수도 있다’며 급발진 하시는 건 좀 당황스러웠지만.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이미 다른 글에 한바탕 쏟아냈으므로 패스.

존버씨의 죽음

“이렇게 경쟁 게임은 노동자를 ‘통치될 만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개별 노동자가 경쟁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게임판에서 그 노동자는 또다른 경쟁에 배치될 뿐이다. 혹시 누가 경쟁 게임에 거부감을 가지더라도 게임 규칙에 대한 문제제기는 물론 그 게임에서 발 빼기는 어려워진다. 경쟁에서의 이탈은 ‘능력 없음’, ‘책임감 없음’, ‘낙인’, ‘패배한 삶’으로 등치되기 때문이다. 추락에 대한 불안, 퇴출의 공포는 경쟁 게임을 더 추동한다.”

요즘 이런 노동 및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부쩍 많이 읽기 시작했다. 아니 글쎄 사회가 저를 빨갱이로 만들고 있다니까요?

페넘브라의 24시 서점

얼마 전부터 뉴스레터 구독 중인 New Public 의 온라인 독서모임 주제였던 책. 내가 이 온라인 독서모임에 참여했다는 건 아니고 (ㅎ) 여기서 소개를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술술 읽히는 소설책이라 세네시간 만에 다 읽었다. 굉장히 수상해보이는 서점 단골 손님들이 사실은 “부러지지 않는 책등”이라는 비밀 단체 소속이라 나름의 목적을 갖고 책을 읽고 있었고 주인공은 이 단체의 정체를 파헤쳐 가는 내용인데, 이 “부러지지 않는 책등” 단체에 대한 설정이 매력적이었다. 계승 방식으로만 이어진다는 점이 꼭 스승-제자 관계 같아서 레비나스도 생각 나고. 나도 이런 독서광 사이비 종교라면 한번 가입해 보고 싶기도…

전개 방식도 내용도 여러모로 청소년 소설 같았다. 그리고 쓰인지 십년이나 지난 만큼, 예측 불가능한 전개나 소재는 전혀 없다.

밀레니얼 사회주의 선언

아니 글쎄 사회가 저를 빨갱이로 만들고 있다니까요 22

찬사를 잔뜩 받은 책이라 그만큼 기대도 많았는데 내가 원하는 내용은 없었다. ‘우리는 왜 사회주의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입문 개론서 정도.

얼마나 닮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읽고 나는 내가 현대 배경 SF 처돌이는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책이 재미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표제작인 ‘얼마나 닮았는가’는 솔직히 반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서 짜릿하게 읽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제일 내 취향이었던 단편은 ‘니엔이 오는 날’이었다. 그것도 ‘니엔이 오는 날’의 SF 적 요소보다는 ‘니엔’이라는 신화적 생물에 대한 묘사가 상상력을 자극했다.

난 아무래도 신화나 영웅담 같은 전통 서사, 그리고 판타지적 요소가 강한 배경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니 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 시민 사회 SF 에는 정도 이상의 흥미를 못 느끼는 게 아닌가… 이젠 SF 장르 안에서도 조금씩 내 취향을 찾아가는 중.

커밍 업 쇼트

밀레니얼 노동 계급 청년들은 왜 성인이 되지 못한 채 무력감만을 느끼는가. 그리고 어떻게 구조적인 고통을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애쓰는가.

지금 사회는 청년들의 문제를 오로지 정신적인 문제, 치료의 대상으로 다룬다. 건강한 자아를 구축하면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는 식이다. 청년들은 이 ‘건강한 자아 서사’를 위해 자신의 병리적 사고방식과 행위를 발견하고, 과거로 돌아가 병리 현상의 숨겨진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이 고통의 이야기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마지막엔 이 과거를 극복한다. 이러한 ‘치료’가 가져다주는 자유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 자유는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노동 계급 청년은 감정적 고통을 성인기의 통화로 사용한다. 이들은 자아가 겪은 고통을 관리함으로써 성인다운 사람이 되고 있다는 감각을 획득한다.

“결국 롭은 자신의 구원을 추구하지만 홀로 그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자신의 삶이 가치 있음을 입증해줄 사람이 자기 외에는 없는 것이다. 많은 노동 계급 청년처럼 롭은 무드 경제라는 덫에 걸려 있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자기 밖에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증인이 되어 줄 사람이 생기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러니 무드 경제는 노동 시장이 자행하는 착취를 재생산한다. 롭은 자아를 관리하고 변형하고자 감정을 ‘가동’시키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이라곤 좌절과 배신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개인으로 구축하고 자신의 자서전을 쓰도록 요구받을수록 우리는 자기 힘으로 삶의 궤도를 통제하기란 완전히 불가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개인으로 성장하라는 요구가 삶을 타인과의 관계에 붙박으라는, 마찬가지로 긴급한 요구와 병행하게 되는 것이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그 고통을 흥미진진한 정체성 서사로 바꾸라는, 고통을 잘 다루어 의미있는 삶의 기획으로 바꾸라는 강요를 받고 있다.”

“치료 서사가 강조되는 이유는 정보 제공자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 전체를 명료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복잡한 감정과 경험을 조직해 자신의 삶을 이해 가능하고 의미 있게 만들도록 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성인이 되는 과정에 대한 치료 서사의 중심에는 노동, 종교, 젠더 같은 정체성의 전통적인 원천이 아니라 가족이 있다. 이때 가족은 각자가 지닌 개별성의 원천, 자아의 원천, 그리고 벗어나야 하는 신경증의 원천이다.”

리시올에서 냈다고 해서 잔뜩 긴장했는데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나 ‘감정화하는 사회’보다는 훨씬, 훨씬 쉽게 읽히는 책이었다. 그리고 가족 관계를 메인 테마로 다루는 치료 서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점도 좋았다. 난 상담을 받고 나서 훨씬 후련해 졌지만, 상담이 갖고 있던 모든 관점과 의제에 동의하진 않는다. 세상에 부모님이랑 문제 없는 자식이 어딨다고. 그걸 내 모든 고통의 원인으로 돌리는 건 나 자신에게도 비겁한 짓이야.

하류지향

‘이걸 왜 공부해야 돼요? 이게 어디에 쓸모 있는데요?’ 라고 묻는 아이들에 대한 비판. 어릴 때부터 가사를 도우며 노동 주체로서의 자신을 먼저 정립했던 옛 세대와 달리 요즘의 아이들은 소비 주체로서의 자신을 먼저 정립한다. 네 살짜리 어린아이가 한 사람 몫으로 사회관계에 등장하면 이 아이를 교섭상대로 동등하게 대우해줄 어른은 아무도 없지만, 돈을 쓰는 사람으로서 등장하면 아이의 나이, 식견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돈의 투명성, 돈의 전능성이라는 특권이다. 아이들은 이미 이 특권을 경험했고, 구매자의 권능을 놓을 생각이 없다. 그러니 학교에서도 ‘교육 서비스를 사는 사람’의 위치를 선점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네가 뭘 팔건데? 마음에 들면 살 수도 있지’ 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 이것이 어린이들의 언어로 ‘이걸 왜 공부해야 돼요?’ 가 된다.

하지만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는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에겐 설명할 수 없다. 한글을 모르는 아이에게 ‘네가 왜 한글을 배워야 하는지’를 설득시킬 수는 없다. 배움이란, 행해지는 그 순간에는 자기가 무엇을 배우는지도 모르고 무슨 효용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오히려 그 가치와 의미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배움의 동기가 된다. 아이뿐만이 아니다. 20살 대학생이 ‘이 과목은 왜 배워야 하는 거에요?’ 라고 물을 때, 그는 교수의 답이 설득력 있지 않으면 배우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20살 대학생의 가치 척도로 계량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 학생은 자신이 갖고 있는 30cm 자로 세상 모든 것을 계량하겠다 말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나 그는 교수가 말문이 막히면, 자신이 굉장히 래디컬하고 비판적이고 지성적인 질문을 했다고 착각한다. 그들은 그저 자기 미래를 헐값에 팔아치우는 것이나 다름 없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오롯이 자기 힘, 자기 돈으로 사는 사람이 ‘자립한 인간’일까? 그건 고립이지 자립이 아니다. 자립은 주변 사람들이 ‘저 이의 언행은 믿음직스럽고 조언과 연대를 구할만하다’ 인정해서 사후에 획득되는 호칭이다. 스스로 ‘나는 자립했다’ 선언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현대 일본 사회는 고립된 사람을 자립한 사람으로 부르고 있고, 이들은 ‘이걸 왜 배워야 하나요?’ 라고 물어서 답을 얻은 다음 배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자기결정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아이들은 계층 하강의 리스크를 받아들인다.

작가님 혹시 이거 왜 배우냐는 질문에 크게 데인 적 있으신가. 너무 신랄하게 비판하셔서 오히려 반감이 든다. 진짜로 무의미한 수업도 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커리큘럼이 잘 짜여있어도 가르치는 사람이 진심이 아니면 얼마든지 무쓸모 무지성 과목이 되곤 한다구요. 저 방통대 다니면서 나무위키 인용하는 교수님도 봤다니까요??

나의 사유 재산

아침달 서점에 들렀다가, 그냥 나오기 민망해서 샀던 - 그 서점에선 제일 내 취향이었던 - 에세이집. 하지만 지금은 책장에 없다. 읽자마자 중고 서점에 팔았기 때문이지. 아마 누군가에겐 좋은 책일 것이다. 추천사에 무려 ‘노년을 향해 가는 여성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썼다.’는 문장이 있는데, 이런 멘트를 읽고도 책을 모른 척하기란 참 힘들다. 나 역시 이 추천사 때문에 구매했던 거 같다. 하지만 끝까지 다 꼼꼼히 읽어도 역시 전 잘 모르겠더라구요…

조생의 사랑

정독도서관에서 아무 생각 없이 뽑아들었다가 바로 다 읽었다. 작가는 후기에서 청소년 소설을 썼다고 밝혔지만, 주인공이 대단히 선하거나 영웅적이지도 않고 결말이 교훈적이지도 않다. 분위기가 시종일관 밝은 것도 아니라서 흔히 생각하는 청소년 소설과는 거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물론 전 청소년 때 읽었으면 좋아했을 거 같습니다. 특히 기화와 애기가 굉장히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라 주인공보다 훨씬 오래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