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정사십년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독한 세로쓰기 책.

책의 저자인 수주 변영로는 좀… 특이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이렇게밖에 표현이 되지 않는다. 그는 1898년에 태어났다. 1898년이 대체 어떤 시기인가 하니 고종 35년이다. 그는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지식인 친구들과 어울리며 살았고, 본인도 성균관대 교수와 동아일보 기자를 거친 사회중심 계층이었다. 그런가 하면 3.1 운동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에 보내고, 민족의 울분을 얘기하는 시집을 냈다가 일제에 압수당하는 등 애국심이 가득한 문인이기도 했다.

또 그런 동시에 미친 술꾼이었다. 그는 술을 대여섯 살때부터 마셨다고 한다. 나는 술과 대여섯살이 한 문장에 같이 등장할 수 있는 단어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역시 19세기는 대단하구나. 『명정사십년』은 그런 수주 변영로의 음주 에세이집이다. 책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은 여러모로 감동적이었다. 일단 저자가 술 먹고 저지르는 사건사고의 규모는 감히 현대인이 따라갈 게 못 된다. 읽다 보면 애주가로서 깊은 경의를 느낄 수 있다. 또 술 먹고 고주망태된 이야기를 이렇게 옛스러운 말로 쓸 수 있다는 자체가 생경하다. 덕분에 술과 음주에 관련된 한시, 한자어를 많이 배웠다. 잘 기억해 뒀다가 책읽는 술쟁이들 모임에서 써 먹어야지.

그리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작가의 친구들이 전부 한가닥 하는 유명인이라 읽으면서 깜짝 놀라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홍난파가 나와서 술 취한 변영로를 질질 끌고 가는 에피소드에선 내가 지금 뭘 잘못 보고 있나 했다. 홍난파요?

​이 책은 추천의 말도 웃기다. 사람 놀리는 법은 20세기나 21세기나 비슷하구나?

수주는 그렇지 않다 하되 수주의 인품은 형산의 흰 옥이오, 수주는 스스로 부인하되 수주의 인격은 호젓한 유곡 속에 홀로 핀 난초인 때문이다. 이것은 수주 죽은 뒤에 내가 쓸 말인데 수주 살아 있어 이 글을 쓰게 되니 수주가 알면 또 한 번 욕하리라 미안하기 짝이 없다.
(중략) 형산의 흰 구슬이 술을 마시니 광채가 더한 것이오, 유곡의 난초가 술주정을 40년 하니 귀한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신화의 세계」 수강하면서 같이 읽었던 책. 헌책방에서 우연히 샀다. 작년 10월에 나온 책이 왜 헌책방에 있었는진 모르겠다.

일리아스 입문으로 적절하려나 싶어 샀는데 저자 분이 고대 그리스 철학을 전공한 교수님이라 그런지 내용이 꽤 알차다. 매 챕터마다 일리아스의 원문을 일부 발췌해서 소개하고 그에 대한 해설 및 주석, 당시를 다룬 미술작품까지 수록해 뒀다. 덕분에 menis 가 신적인 분노를 뜻하는 그리스어라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올해 상반기 가장 핫했던 책을 꼽으라면 얘가 아닐지. 이 책을 꼭 읽으라는 말을 겨울서점 유투브 채널에서도 듣고 하마글방에서도 듣고 트위터에서도 들었지만 스포일러를 어떻게든 흐린 눈으로 피하며 지내다 여름이 되어서야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어떻게든 스포일러를 피해서 읽으라’는 말 자체도 하나의 스포일러가 되는지라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읽었다면 구성의 매력을 더 온전하게 느낄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왜 이 책을 찬양하는지는 알 거 같다. 어떻게 한 권의 책이 르포인 동시에 추리소설이면서 과학철학 책일 수 있냐구요. 이 내용을 이 구성으로 썼다는 게 제일 경이로운 지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놀랍게도 이번에 처음 읽어봤다. 굉장히 유명한 고전이고 청소년 시기에 읽어봤을 법 한데, 사랑으로 고뇌하는 자기 자신에게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이야기는 영원히 내 취향일 수 없음을 그때도 알았던 게 아닐까 싶다.

읽는 내내 주인공한테 화가 났다. 아니 제발 땅에 발붙이고 사시라구요. 그 시대엔 상담센터가 없어서 그러는 거에요? 상대의 주장을 논박하면서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고 말꼬리 잡는 건 너무 치사하지 않나요?

하지만 정작 독후감 쓸 땐 베르테르를 포용해 보겠다고 결론 지은 내가 제일 기만쟁이야.

나귀 가죽

우연히 마법의 나귀 가죽을 얻은 주인공이 그걸로 자기 욕망을 이루고 살다가 결국은 멈추지 않는 욕망 때문에 죽는다는 내용의 작품이었다. 이렇게 얘기하면 굉장히 아라비안 나이트의 에피소드 같은데 슬픈 건 이 간단한 줄거리의 책이 두께는 500 페이지라는 것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줄거리가 진행되는 건 사실 1부와 마지막 3부 뿐이다. 2부는 그럼 뭐인가 하니, 나귀 가죽을 얻은 주인공이 친구들과 함께 근사한 파티에 초대받아 술을 잔뜩 먹고 주정 부리는 내용이다. 농담이 아니다. 주인공은 이 술자리에서 무려 20페이지 넘게 독백을 한다. 그리고 그 독백에 대한 나의 감상은 과제로 제출했던 독후감에 그대로 드러났다. 아래는 그 일부.

이 작품은 1830년 7월 혁명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7월 혁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이 작품을 읽는데 있어 중요한 지점입니다. 하지만 의미를 알고 읽더라도 라파엘은 별로 재미난 이야기꾼이 아닙니다. 2부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의 인생과 고통, 자기 아버지, 자기 사랑에 대해 생각하느라 바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이해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탓에 그의 독백은 친구들을 울리는 게 아니라 잠들게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은 철학과 정치적 가치관을 전파하는 소설로 보기에도 애매합니다.

그 후

애증의 나쓰메 소세키.

중학생 시절엔 나쓰메 소세키를 좋아했다. 그때 내 눈에 비친 한국 근대문학은 초라하고 멋 없는 장르였다. 늘 가난하고 힘없는 주인공이 나와서 된통 깨지고. 그러다 집에 돌아와서 그 스트레스 자기 아내한테 풀고. 끝내는 울며 주저앉는 이야기.

반면 나츠메 소세키를 필두로 한 일본 근대문학은 뭔가 멋이 있어 보였다. 일단 주인공이 다 엘리트고. 풍경 묘사 끝내주고. 2층 다다미 방에 앉아 벚꽃잎 흩날리는 세상을 염세적으로 바라보는 도련님. 세상에 지친 지식인의 고뇌. 아무래도 인력거꾼보단 인력거에 탄 손님이 멋있어 보였던 거지.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쓰메 소세키 소설을 읽으면 눈물이 날 거 같다. 아, 제가 어쩌다 이딴 걸 좋아했던 걸까요. 주인공은 하나같이 자의식 과잉 뺀질이다. 자신의 자아도취를 세련되게 포장할 줄 안다는 점에서 세상 최악의 자아도취형 인간들이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을 지배한다. 어쩌면 아주 약간은 동족 혐오를 하고 있는지도. 아니 그치만 들어보세요.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태도는 더 최악이라니까요? 여성 캐릭터들이 매번 섹스와 불륜만 외쳐대는 무라카미 하루키 스타일도 내 취향은 아니지만, 나쓰메 소세키 소설 속 여성들은 도련님의 시선으로 철저히 낭만화되어 다루어진다구요. 으으 진짜 싫어.

다이스케가 좋아하는 대화는 여성들과의 대화 뿐입니다. 그는 형보다 형수를, 히라오카보다 미치요를 좋아한다고 자기 입으로 말합니다. 제 생각에 그건 여성들이 다이스케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늘 ‘다이스케가 편안한’ 대화를 위해 자신의 내적 공간을 내어 줍니다. 즉 다이스케의 에고는 한치의 침범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한 것입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을 3인칭으로 호명하지만 서술은 별다른 거리 두기 없이 다이스케에게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역시, 나츠메 소세키 본인이 이런 사람이었던 걸까요?

결국은 독후감도 고인 모독으로 끝냈다.

광장

이 작품을 이번에 처음 읽었을 리가 없는데. 분명 중학교 시절 교과서에 있든 과제로 나오든 했을 텐데 너무 옛날이라 기억이 안 나나. 여하튼 마음가짐만큼은 처음 읽는 것과 같았다.

『광장』의 명준은 참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상을 꿈꾸지만 그 이상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갈 뚝심은 없고, 냉철한 지식인이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아주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사랑을 갈구하고, 부르주아적 삶에 익숙한 사람을 경멸하지만 정작 본인도 그런 안온함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하는. 그래요. 보통은 다 그렇지. 아 아닌가? 요즘은 아무도 부르주아를 경멸하지 않는 거 같더라마는.

이런 평범한 주인공이 갈팡질팡하다 똑 부러져버리는 이야기는 언제나 재밌는 거 같다. 순문학 작품을 이런 시선으로 읽어도 되는가는 잘 모르겠지만.

모래도시 속 인형들

이 책을 포함해 이하 네 권은 모두 서울국제도서전의 안전가옥 부스에서 사왔다. 사놓고 언제 읽어 언제 읽어 염불만 외다가 7월 초에 겨우 읽었다. 하지만 저는 이걸 2분기 결산에 넣기로 했어요.

​네 권 중 나를 가장 사로잡은 건 단언컨대 이 『모래도시 속 인형들』 이다. 사이버펑크 범죄수사물인데 버디물이라니 이건 안 사랑하기가 더 힘들다. 주인공들의 직업은 각각 검사와 검찰 소속 수사관. 둘은 기술규제 면제특구로 지정된 평택 특별자치시에서 벌어진 여러 기묘한 사건들을 해결한다. 약자를 보살피고 선을 행하는 검사라니 2022년의 대한민국에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설정이긴 한데… 그래서 더 의미 있지 않았나 싶다. 맨날 투덜투덜 하면서도 제일 열심히 발로 뛰는 수사관 혜리도 너무 매력적이다.

하지만 역시 가장 두근거렸던 문장은 에필로그 맨 마지막에 써 있던 to be continued 였다. 부디 작가님이 이 세계관으로 연작을 더 써주시면 좋겠다.

기이현상청 사건일지

말그대로 나라의 각종 기이한 현상을 쫓아가 처리하는 기이현상청 이라는 국가 기관의 사건 일지-를 컨셉으로 한 책.

이것도 단편집인데, 총 5편의 단편 중 『주문하신 아이스크림 나왔습니다』와 『왕과 그들의 나라』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주문하신 아이스크림 나왔습니다』에서는 신기한 아이스크림 기계와 적대적 신경 생성망의 상관관계를 다루는데, 사실 지금도 내가 뭘 읽은 건지 어질어질하다. 뭘 하면 이런 생각이 드나요? 아마 한번 더 읽더라도 적대적 신경 생성망 얘기에선 ‘예? 뭐라구요?’ 상태가 될 거 같다.

『왕과 그들의 나라』는 한국인이라면 신성모독으로 느낄만한 명장면을 하나 보여준다. 아니 이걸 이렇게 속시원하게 때려부숴도 돼? 카타르시스 장난 아니긴 한데 괜찮은 거야? 하는 감상이 어지러이 남았다. 혹시 최근에 뭔갈 부수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리는 분이라면 읽어보길 권장합니다. 부수려는 게 뭐든 간에 무생물이기만 하다면, 이 단편에서 주인공이 부수는 것보단 덜 떨떠름할 것.

호러

첫번째 단편인 『습습 하』가 진짜 짜릿했다.굉장히 현실적인 설정에서 출발해 호러로 건너가는 연결부도 자연스럽고, 문장의 흡인력도 장난 아니고, 다 평화롭게 마무리 되는 듯한 지점에서 갑자기 툭 하고 섬뜩하게 떨구는 뒷마무리도 최고였다. 나머지 네 단편은 무난하게 재밌었다. 나폴리탄 괴담을 소설의 형식으로 확장한 『편의점의 운영 원칙』도 괜찮았다.

위치스 딜리버리

성남을 배경으로 하는 SF 소설이니 성남시민으로서 한번은 읽어봐야 한다 생각했지만 읽고 나니 예상보다 더 기분이 묘했다. 일단 ​주인공은 수내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이고,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를 가기 위해 배달 알바를 시작한다. 건당 만원 페이에 홀라당 넘어간 주인공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그 결과 주인공은 청소기를 타고 날아다니며 배달을 다니는 수습 마녀가 된다. 아 이게… 마녀 배달부 키키에 21세기 대한민국 성남시 분당구를 얹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이 기묘한 위화감은 소설을 읽는 내내 지속된다. 일단 수내고등학교 자체가 우리 동네에 실제로 있는 학교인데다, 판교 테크노밸리에서 자연어 처리를 연구하는 AI 개발자 마녀에게 에너지 드링크를 배달해 줬더니 드링크 원샷하고 ‘아으 기획서 시즌 너무 싫다’ 토로했다는 장면에선 정말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마녀라는 키워드만 빼면 굉장히 현실적인 설정 현실적인 대사인데.

그리고 판교에 위치한 초능력자 특화 대안학교 ‘김앤장 특수학교’ 라는 설정도 너무 웃겼다. 그렇지. 김앤장 특수학교 라는 곳이 있다면 그건 반드시 판교에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