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분기 책 결산 (1)
지난 분기에 읽었지만 깜빡하고 포함시키지 않은 책 두 권 먼저.
뒷전의 주인공
우리나라의 무속 신앙이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톺아보는 책. 지난 서울국제도서전의 대학도서 부스에서 구매했다. 이게 왜 대학도서인가 했는데, “지식의날개” 출판사가 방통대 출판문화원의 학술서적 브랜드라서 그렇게 분류된 듯하다.
굿은 보통 힘을 가진 신에게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지내지만 굿의 마지막 절차인 ‘뒷전’은 조금 예외적이다. 뒷전은 별다른 힘이 없는 신, 또는 신으로 대접조차 받지 못하는 잡귀들을 불러모아 대접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주로 집 밖에서 죽은 이들, 생에서 고된 일을 많이 겪었던 사회적 약자들이 이 잡귀에 해당한다. 집 밖에서 죽은 이들이라는 표현이 조금 생소한데, 전통 사회에서는 사람이 안방에서 태어나 안방에서 죽는 걸 ‘최고의 죽음’으로 여겼다고 한다. 요즘은 대부분 병원에서 죽지만 옛날 기준으로 치면 이건 객사에 포함된다. 실제로 50여년 전만 해도 병원에서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된 환자는 집으로 돌려보내 ‘객사’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무속 신앙에 따르면 집에서 죽은 이들은 조상신이 되지만, 집 밖에서 죽은 이들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잡귀가 되어 구천을 떠돈다. 조상신은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주니 제삿밥을 얻어 먹지만 잡귀들은 불러서 대접해주는 곳이 없다. 이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를 한데 불러모아 먹이는 것이 바로 뒷전이다. (우리가 흔히 ‘OO는 뒷전이다’ 라고 표현할 때 그 뒷전과 뿌리가 같은 말이다.) 이 뒷전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 시어머니 구박으로 죽은 며느리, 아이를 낳다 죽은 산모, 군인과 어민 같이 소외된 서민들이다. 뒷전은 굿 전체에서 꽤나 중요해서, 이 뒷전을 제대로 마무리해야 탈이 없고 덕을 입는다고 했단다. 굿에 따라선 뒷전무당을 아예 따로 둘 정도였다.
무속 신앙 세계관을 이 정도로 깊게 들여다본 게 처음이라 읽는 내내 재밌었다. 그리고 뒷전에서 이 뜬신-잡귀잡신-들을 대하는 태도가 동정보다는 해학에 가깝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연극은 연극인데 드라마보단 코미디에 가깝달까. 장애를 가진 잡귀를 속이고 놀려먹는 굿도 많고, 그런 무당을 대하는 잡귀(를 맡은 사람)의 역할도 슬프기보단 우스꽝스럽다. 그래서 이 뒷전의 태도를 현대 사회의 약자들에게 곧이곧대로 접목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해결책도 없고 어찌 할 수 없는 아픔이라면 차라리 ‘에이, 빌어먹을’ 하고 같이 웃어버리는 게 그 순간의 감정엔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을까. 위로라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따라오는 책이었다.
두더지 잡기
‘나’로부터 탈피하는 에세이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한참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나’에 대해 말하는 것도, ‘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에세이를 읽는 것도 견딜 수 없게 지긋지긋해서 서점에 있는 거의 모든 에세이를 뒤적였다. 그리고 이 책을 샀다.
이 책은 저자 이력이 특이하다. 저자 마크 헤이머는 60대 중반의 정원사인데, 열여섯에 집을 나왔고, 그 후 2년간 숲을 떠돌며 부랑자로 살았고, 나중엔 미술과 문학을 공부했다. 정원사 일을 오래 했지만 자기 정원을 가져본 적은 한번도 없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최근에 자연의 치유를 강조하며 가드닝을 다루는 책을 여럿 봤는데, 거기 실린 정원 사진을 볼 때마다 어쩐지 위화감이 들었다. 이 치유를 가능케 한 게 정말로 자연일까 아니면 이렇게 예쁜 자연만 선택적으로 누릴 수 있었던 그의 환경일까. 작가에게 그런 문제의식이 있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2년간 사회와 연을 끊고 『월든』을 써서 자연-회복 테마의 대명사가 됐지만 정작 그 2년간 밥은 아내가 다 해다 바쳤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씁쓸함. 하지만 이 책에선 그런 부조화를 찾을 수 없었다. 저자는 자아비대의 늪에서 헤매지 않는다.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진짜 나’ 따위를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한다와 안 한다 사이에서 안 한다를 선택한 게 아니라, 그러한 관념 자체가 저자의 머릿속에 없다.
저자는 사회 생활을 거의 경험해보지 않았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 사회의 키워드 - 글로벌, 성장, 익명, SNS, 금융, 소통 등등 - 과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에서 유리되어 있던 사람이 펜을 잡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어떤 해방감이 느껴진다. 시와 에세이와 회고록의 포맷이 섞여 있는데 그것조차 이 책의 매력이었다.
참고로 책의 제목인 『두더지 잡기』 는 50년째 채식주의자인 저자가 생업으로 정원의 두더지를 잡는 일을 하고 있는 모순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지만 전 비건을 지향하면서 비건 반찬을 배달시켜 먹고 있는 저보다는, 어떻게 하면 두더지를 덜 아프게 필요한 만큼만 죽일 것인가 고민하는 저자가 훠어어얼씬 더 근본 있는 채식주의자 같았어요.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을 읽기 전에 마르크스에 대해 간단하게라도 짚고 가려고 구매한 책. 이런 용도로는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가 참 적절하고, 이 책을 쓴 피터 싱어도 유명한 철학자여서 나름의 기대를 했다.
예상대로 책은 좋았다. 마르크스를 시작하기에 괜찮은 인트로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공산당 선언』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진 않았을 뿐.
여기 인간 소외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의 맹아가 있다. 비판과 철학 이론만으로는 소외를 끝장낼 수 없다. 더 실천적인 힘이 필요한데, 이 힘은 빈곤을 강요당한 노동자 계급에 있다. 사회 최하층 계급인 노동자 계급이 ‘철학을 실현’할 것이다. 이것은 철학적 역사적•서사시의 정점을 뜻한다.
공산당 선언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이번 분기에 가장 읽으려고 노력했던 책. 근데 정말 무리였다. 공산당 선언 본문까지 가지도 못했고 서설만 한 달을 읽다가 항복 선언하고 내려놓았다. 정작 본문은 그렇게 어려운 텍스트가 아닐 것 같은데 (그랬다면 널리 퍼지지도 못했을 테니) 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서설을 통째로 넘겨 버리면 책을 읽었다는 느낌이 안 들잖아요. 억울하다. 몹시 억울해.
히카르두 헤이스가 죽은 해
페소아에 대한 팬심으로 구매했다가 드디어 완독했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작가로 모더니즘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불안의 책』은 한국에서도 꽤 알려졌고, 그를 소재로 한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가 인기를 얻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리스본행 야간열차』 소설을 읽고 이 책이 나를 완전히 관통했다고 느껴서 페소아의 팬이 됐다. 덕분에 우리 집엔 한국어로 번역된 페소아의 모든 책이 구비되어 있다. 이젠 그 시절만큼 매료되어 있진 않지만, 그런 것과 관계 없이 그냥 페소아와 관련된 책은 사고 보는 게 습관이 됐다.
이 책도 그렇게 샀다. 책 제목에 드러난 ‘히카르두 헤이스’는 페소아가 생전에 사용한 이명 중 하나이기 때문에 기타 설명 없이도 이 책이 페소아를 다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저자인 주제 사라마구 역시 포르투갈 작가이니, 포르투갈 작가가 다루는 페소아는 또다른 매력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때는 주제 사라마구가 이렇게 읽기 어려운 포맷으로 글을 쓰는 줄 몰랐지… 인칭이 마구 뒤섞이는 문체, 인물 간의 대화에 결코 따옴표를 붙여주지 않는 불친절함 덕분에 4박 5일을 쏟아넣고서야 겨우 끝을 볼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실제 역사와 허구를 아주 촘촘하게 엮는다. 히카르두 헤이스가 소설의 주인공인데, 그는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 브라질에 머물다가 친구인 페소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포르투갈에 돌아온다. 헤이스는 시인이자 의사인데 이는 실제로 페소아가 헤이스라는 이명으로 사용했던 설정이기도 하다. 또 페소아가 1935년에 죽었기 때문에 이 소설은 정확히 1936년의 리스본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1936년은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 해이기도 해서, 옆 나라인 포르투갈 역시 그 영향권에 있었는데 이 책은 그런 부분까지 매우 세밀하게 묘사한다. 전화를 피해 포르투갈로 도망친 스페인의 부르주아 계층, 그로 인해 북적이는 호텔, 간간이 들려오는 투숙객들의 대화, 신문에 매일같이 실리는 살라자르에 대한 찬양 등등.
그런데 그 지독한 현실 묘사 끝에 난데없이 죽은 페소아가 등장한다. 그리고 헤이스에게 말을 건다. 그는 친구 헤이스의 연애 사업을 놀리기도 하고 헤이스와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말없이 사라진다. 유럽+유령 하면 아무래도 공산주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런 전개는 좀 웃기는 동시에, 살아있지만-사실은-허구의-인물인 헤이스와 유령이지만-한때는-실존-인물이었던 페소아의 대화라는 점에서 굉장히 페소아스럽다. 사실 사라마구에게 페소아는 결코 모른 척 할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페소아가 포르투갈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그렇고, 페소아의 가장 유명한 시집 『메시지』가 사라마구의 10대 시절에 출판된 걸 생각하면 분명 그의 문학은 페소아에게서 영향을 받았겠지.
하지만 이 책은 페소아와 그의 문학을 그리 우호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주인공 헤이스는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 그는 호텔에 숙박하면서 두 여자와 관계를 맺게 되는데, 왼손을 쓰지 못하는 호텔 투숙객 마르센다와 호텔 메이드로 일하는 리디아 이다. 헤이스는 마르센다의 부자연스러운 왼손을 보자마자 (아직 제대로 된 대화도 하기 전인데) 그녀의 장애에 대해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리디아를 만날 땐 그녀에 대한 욕망으로 한껏 부풀어 있다. 하지만 결코 욕망했다는 말도 사랑했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시를 쓰고 산책을 하고 고뇌할 뿐이다.
유럽을 둘러싼 정치적 격변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헤이스는 늘 한 발 물러나 있다. 그는 심지어 왕정주의자 이기 때문에, 리디아가 ‘제 남동생은 공산주의 혁명군에 속해 있는데요’ 하자 그건 참 어리석은 짓이라고 어린아이 가르치듯 말한다. 아, 그는 정말 그림으로 그린 듯한 엘리트 보수 중년 남성이다. 그 와중에 시를 쓴다. 리디아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을 때도, 리디아가 죽은 남동생의 시신을 찾으러 떠날 때도 그는 시인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이 리디아가 실제 페소아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임을 생각하면 이건 진짜 코미디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페소아의 시를 다시 펼쳐보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페소아가 갖고 있던 몽환적이고 허무한 심상을 좋아했고,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쇼펜하우어 스러운 가치관도 좋아했는데, 이게 공산주의가 사회를 뒤흔들던 20세기 유럽에서 튀어나온 글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그래. 페소아 본인이 군주제와 군사 독재를 지지했단 걸 생각하면 진짜 좀 그래… 페소아의 한국어 위키피디아 문서는 내가 번역한 건데 왜 그땐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