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분기에 읽었지만 깜빡하고 넣지 않았고 하마터면 이번 분기 정산 글에서도 깜빡 잊을 뻔한 책 1권을 추가.

망고와 수류탄: 생활사 이론

2000년대 중반의 일본 소설을 연상시키는 제목과 귀여운 망고 그림. 작고 가벼운 책의 판형. 하지만 그런 첫인상과 달리 이 책은 오키나와 지역의 생활사를 다룬 학술서적이다. 이 책이 오키나와를 다룬다는 걸 알고 보면 <망고와 수류탄="">이라는 제목이 마냥 귀엽진 않다.

오키나와는 일본 역사에서 아주 묘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곳엔 원래 류큐 왕국이라는 별도의 국가가 있었으나 메이지 유신 시대의 중앙집권-행정개혁에서 일본에 강제 흡수되었다. 하지만 결코 일본 본토와 동일한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처지는 일제강점기의 조선과 비슷한 면이 많다. 마음대로 뽑아쓰고 여차하면 내버릴 수 있는 자원.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건네주며 집단 자결을 요구했다. 적에게 더럽혀질 바에는 차라리 명예롭게 죽으라는 것이었는데… 이 미친 파시즘에 대해 굳이 의견을 붙일 필요는 없겠지. 참고로 일본-오키나와 사이의 문제는 아직 미해결 상태다. 오키나와인 차별을 검색하면 몇 년 전까지도 기사가 있고, 류큐 독립 운동 역시 세력은 약해졌지만 현재진행형이다.

이 책은 당시의 오키나와 주민들을 직접 인터뷰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역사 기술을 ‘구술사’라고 하는데, 저자는 구술사가 흔히 받는 비판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서술한다. 우선 주민들의 구술이 절대 한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고, 심지어 태평양 전쟁을 겪었던 사람이면 지금은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이다. 인터뷰이들의 구술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술 내용 중 무엇을 채택하고 무엇을 넘길 지는 모조리 연구자의 판단에 달려 있고, 이는 구술사가 ‘역사 중에선 좀 덜 객관적이고 급이 떨어지는’ 기술 방식이라고 평가받는 원인이 됐다. 그리고 주민들이 사회를 인식하는 방법과 정도가 제각각이라는 것도 문제가 된다. 피차별부락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여성 노인이 “난 차별받은 적 없다”고 말하면 그것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이걸 연구자의 주관으로 판단해도 되는가? …

하지만 이 책은 ‘그럼에도 생활사/구술사가 필요한 이유’를 차분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 설명에 아주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생활사가 중요하다, 구술사가 중요하다는 사실 그냥 맞는 말이지만, 왜 중요한지를 적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에서 연구자의 위대함을 느꼈다. 오오.

오키나와의 역사, 생활사, 질적 연구 방법론, 변방의 역사, 로컬 되기 등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기 좋은 책.

3월의 눈

국립극장에서 본 연극 『햄릿』이 나를 완전히 꿰뚫고 지나갔다. 햄릿이 원래 이런 내용이었나 내가 읽은 건 뭐였지 하고 한국외대 출판문화원의 햄릿 번역본을 급하게 사서 읽었지만 극장의 그 대사가 아니었다. 대사도 다르고 장면 구성도 다르고 심지어 줄거리도 약간 달랐다. 책을 두 번이나 읽고서야 내가 좋아한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아니라 배삼식 각본가의 햄릿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배삼식 각본가의 희곡집을 샀다.

(사실 아직도 연극 『햄릿』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여기서 난 뭘하고 있지?” 로 시작하는 오필리어의 독백이 너무 그립다. “우스워. 내가 뭘 증명해야 하지? 그 분의 사랑이, 그 분의 광기가 나 때문이라는 것을? 만약 그렇다면, 그렇지 않다면 어느 쪽이든 내 가슴은 찢겨지겠지.” 난 이 대사를 하는 오필리어를 너무 사랑했는데. 하… 지금 원작 붙들고 이건 햄릿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됐다.)

희곡집 『3월의 눈』에는 표제작인 『3월의 눈』과 『먼 데서 오는 여자』, 『열하일기 만보』, 『화전가』, 『1945』 가 실렸다. 그리고 모든 희곡이 좋았다. 근데 왜 좋았는지 내가 다 써버리면 영업이 안되니까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표제작인 『3월의 눈』은 읽으면서 울었다. 아니 제가 책 읽으면서 눈물 글썽이는 문학소녀 타입은 아닌데 연출이 너무… 하…

참고로 배삼식 선생님 희곡집 여태 나온 거 다 샀고 알라딘 배송 현재진행중.

아무튼, 피아노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 을 본지도 어언 몇년 째다. 조금 못난 마음을 고백하자면 난 겨울서점 주인장에게 동경과 질투심이 뒤섞인 어지러운 감정을 갖고 있다. 일단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몹시 부럽고. 칼럼에 글을 기고하시는 것도, 피아노를 치시는 것도, 팟캐스트 진행도 하고 게스트도 하시고 본인이 책을 쓰기도 하고. 심지어 철학을 전공하셔서 관련 지식도 있어. 그런 단편들 하나하나가 너무 부럽거든요. 근데 이런 단편만 모아다가 사람을 판단하는 게 진짜 몹쓸 짓인 것도 알아. 근데 가끔은 나도 혹시?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봐. 그러고 있는 내가 너무 총체적으로 못나서 벽에 머리 박고 싶어… 뭐 아무튼.

그런 이유로, 겨울님이 책을 여럿 냈음을 알면서도 주위를 맴돌기만 하다가 어느 독립서점에서 요 책에 손이 닿았다. 조성진을 계기로 최근 클래식 에 빠져있기도 하고, 책에 대한 책이 아니라 피아노에 대한 책이니까 열등감 덜어내고 (ㅠ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 책을 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너 무 좋 았 다

전에 블로그 주간일기로도 썼던 말이지만 겨울님의 책 추천 영상을 보는 것과 겨울님의 글을 읽는 건 아주 많이 다른 경험이었다. 한때 클래식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사람이 쓰는, 피아노에 대한 애정 고백은 정말 너무너무 애틋한 러브 레터가 되더라. 자기 정체성의 한 축이었던 활동을 지금도 취미로 이어오고 있다는 것에선 말 못할 존경심이 생길 정도였다. 이미 쌓아온 게 있으니 남들보다는 더 자유롭게 클래식-취미를 즐길 수 있겠지만 아는 게 많으면 그만큼 자기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지잖아요. 저는 ‘옛날만큼 수학을 못하는 저’를 잘 못 견뎌서… 옛날의 나를 이기지 못해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그 힘이 부러워요.

결국은 겨울님이 더 부러워졌을 뿐인가? 하지만 이 책은 정말 재밌었고, 덕분에 지메르만의 라흐마니노프를 들어봤습니다. 쇼팽 발라드 4번도 요 책 덕분에 조금 더 좋아하게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