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근래 몇 년 간의 부동산 열풍은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집 얘기 차 얘기만큼 직장인 스몰 토크에서 자주 나오는 주제가 없지만 나는 늘 애매하게 입만 벙긋벙긋하다 침묵을 지켰다. 2년마다 이사 다니는 건 물론 몹시 번거롭다. 하지만 집을 사는 일도 번거로운 건 매한가지 아닌가. 어디에 집을 살지 결정하려면 어디에 살고 싶은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수도권에 올라온지 6년째의 나는 아직 그 답을 모르겠다. 내가 지금 당장 판교에 집을 산다고 그게 내 인생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다줄까? 그 순간 기분이 좋기는 할까? 글쎄 잘 모르겠는데.

‘집’이 대화 주제가 될 때마다 물꼬를 어디로 틀어야 할지 몰라 몸을 배배 꼬던 내게 이 책은 꽤 좋은 탈출구였다. 맞아, 내가 집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런 층위였어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이 책은 저자가 거쳐간 모든 집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대구의 강남이라 불리는 수성구의 고급 빌라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점점 작은 집으로 이동하다가, 신림동 원룸을 거쳐 신혼집을 얻고 오래된 빌라를 직접 수리하는 이야기까지. 작가의 인생 경로가 내 것과도 비슷한 구석이 많아서 특히나 더 반가웠다. 나는 외할아버지 댁이 수성구 범어동에 있었는데, 그 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엄마는 늘 ‘우리 집이 꽤 잘 살았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남들은 구경도 못하던 고급 과자세트를 외할아버지가 종종 퇴근길에 사왔다며, 그걸 받아드는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되새기는 엄마는 그 회상만으로도 여전히 행복해 보였다. 물론 이제… 그 시절에 부자였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게 좀 신경쓰이긴 하는데… 사회적 맥락이야 어쨌건 범어동 집의 행복한 추억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

나 역시 내가 나고 자란 구미 집에 몹시 애정이 있다. 내가 대학생 때 이사를 해버려서 더 이상 그 유년기의 집은 우리 집이 아니지만 가끔은 그 빌라의 풍경을 생각한다. 푸른숲마을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빌라 뒤에 숲이 우거져있던 그곳은 지방 소도시의 청소년이 느끼기엔 충분한 자연이었다. 거기서 떠올렸던 심상 중 일부는 여전히 나한테 남아 있고. 집이라는 건 결국 그런 심상 하나하나의 집합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닐까. 저자가 셀프 인테리어를 통해 낡은 신혼집을 자기 취향대로 바꿔가는 이야기는 진짜로 매혹적이었다. 몰랐는데 내가 목수의 삶을 좀 동경하나봐.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선생님의 산문집. 이 분의 이름을 여러 곳에서 종종 들었었지만 책을 읽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왜 진작 읽어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좋았다. 이전에 내셨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도 읽어보고 싶은데, 시사적인 글을 많이 쓰셨던 지라 출간된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읽기는 조금 애매하다. 우선은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 를 먼저 샀다. 다 읽고 나면 『밤이 선생이다』 를 도전해 볼지도 모르겠다.

잘 숙성된 글이라는 인상을 읽는 내내 받았다. 과제 해치우듯이 서론 본론 결론 쓰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내세우는 글이 아니라 오래 숙고하고 뜸 들여서 쓴 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원천이 무엇일지가 너무 궁금했다. 평론가이자 불문학자로서 쌓아 온 지식인지 아니면 켜켜이 쌓인 세월인지. 산문 하나하나에 담긴 생각이 깊어서 좀 더 이 페이지에 오래 머물러 있고 싶은데 내 눈은 속독에 너무 길들여 졌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상투적인 글쓰기는 소박한 미덕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식민 세력에 동조하는 특징을 지닌다. 자신의 삶에 내장된 힘을 새롭게 인식하려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늘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축제의 음식을 먹는 자는 마땅히 두 손을 적셔야 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을 우리가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우리가 거둔 곡식과 소채, 우리가 잡은 짐승들에게 속죄하는 길이다. 어찌 속죄가 없이 행복하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자신이 살해한 생명들과 자기가 먹는 음식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가 두렵다.

시인 신경림

위에서 읽은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에서 다뤄서 알게 된 책. 아직 살아있는 시인에 대해 전기를 쓴다는 게 좀 독특한데, 얇고 가볍고 금방금방 읽히는 책이었다. 시는 전혀 모르는 분야지만 그래도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 정도는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인 본인은 사회 운동에 많이 참여했지만 시 안에서는 그런 정치색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데, 그런 ‘진보적 성향이 드러나는’ 시를 써야만 진정한 진보 시인이라는 무언의 압박 때문에 괴로웠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시를 쓸 때도 그런 자기검열의 과정이 있구나. 남의 기대와 나의 성향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시를 몰라도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복한 집에서 막내아들로 사랑 듬뿍 받고 자란 중년 남성은 아무래도 뜨뜻미지근한 시선으로 보게 되고… 책을 읽는 내내 그 시선을 버리기는 힘들었다.

이제 나가서 사람 좀 만나려고요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인으로 탈바꿈하는 자기 계발서는 솔직히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전환이 가능했다면 처음부터 그는 나와 같은 층위의 내향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향성의 쓸모와 잠재력을 무한 긍정하며 자기애로 마무리하는 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향적인 성격을 어찌 못하는 것엔 분명 고통스러운 지점이 있다. 차라리 동경이나 하질 말지. 낯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그걸 어색해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 말도 못하게 근사하다. 그걸 따라하려다 애매하게 실패하는 나는 늘 말도 못하게 부끄럽고.

트위터에서 이 책의 단락 몇 개가 캡처로 돌아다녔다. 그걸 보고 일단 이 책의 작가는 나와 동류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단어까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데 아마 서문에 나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작가가 자기 생일날 아침에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 옆에 누워있던 남편에게 귓속말을 한다. “잘 들어.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파티를 하느니 널 죽여버릴거야.” ㅋㅋㅋㅋㅋㅋ

무슨 마음인지 너무 알 것 같은 문장이었다. 견디기 힘든 상황들이 있지. 나 같은 경우엔 낯선 사람들과 노래방이나 피시방에 가는 걸 정말 몹시 두려워하는데, 그런 상황에 처하면 이성의 끈이 투두둑 끊겨서 ‘지금 여기서 전속력 달리기를 하면 핸드폰만 들고 도망칠 수 있을까 벽을 뚫고 탈출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따위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작가는 나와 같은 공포를 공유하는 사람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에 대단한 신뢰가 생겼고, 구매했다.

이 책은 매우매우 내향적인 성격의 저자가, 딱 일년만 외향적으로 살아보겠다 결심하고 절대 하지 않을 짓을 저질렀던 여정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발표도 하고 팟캐스트에 게스트로도 나가고 낯선 사람들을 모아다 파티도 하고 친구도 만들고 (다시 생각해도 두 눈 질끈하게 되는 대목인데) 스탠드업 코미디에도 도전한다. 정말이지, 저자의 말도 안되는 행보에 경악과 존경과 애도를 번갈아 느끼게 되는 책이었다. 내가 과연 이 중에 몇 퍼센트까지 따라해볼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르지, 목숨 끊었다 생각하고 저지르는 날이 올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