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 과정을 다룬 역사 소설. 황현산 선생님이 추천사를 쓰셨고 『황현산의 가벼운 산책』 에도 언급되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세 여자 -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 는 모두 실존인물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전원이 실존인물이며, 사실이 밝혀진 부분은 사실대로 썼고 정황이 모호한 부분들만 작가의 재량으로 채웠다고 한다. 심지어 그 ‘모호한’ 부분들조차 정말로 진실을 알 수 없다기 보다는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서 확언할 수 없다에 가깝다. 북한으로 넘어간 인물이 이후 소식이 끊겼는데 아무래도 숙청된 것 같다던가.

1권을 읽고 꽤 충격을 받았다. 그간 나의 근현대사 지식은 중학교 역사 교과서가 주입해 준대로 형성되어 있었다. 내 안에서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과 여성 운동과 공산주의 이념 다툼은 완전히 별개의 사건이었다. 마치 하나하나 차례대로 일어났으리라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론 모두 동시대의 사건이다. 아니 사실 명확한 시작과 끝이 있었던 게 아니므로 사건이란 표현은 이상하다. 셋 모두 그 시대의 공기였다. 그리고 세 여자는 그 시대의 공기를 듬뿍 머금은 사람들이었다. 여성운동에 족적을 남겼고, 나라를 되찾고자 했고, 공산주의의 이상을 쫓았고, 사랑도 했다.

어째서 교과서에선 이 사람들 이야기를 조금도 접할 수 없었는지는 2권을 다 읽을 때쯤에야 감이 잡혔다. 이들은 공산주의자였다. 해방 이후 남한에 남은 이들은 빨갱이 숙청할 때 사라졌고, 북한으로 건너간 이들은 북한 정부의 숙청에 사라졌다. 이들 대부분이 독립 운동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 였다는 것 때문에 독립유공자에 오르지도 못하다가 김대중 정부 때 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교과서에서 이름을 볼 수 있으려면 아직 멀지 않았을까. 반면 교과서 단골 손님인 김구 선생에 대해선 의외의 면모를 많이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정치적 숙적들에겐 가차 없는 테러리스트 였다던가. 일본 놈들을 증오했지만 공산주의자는 그보다 더 증오했다던가. 우리는 김구 선생과 상해 임시정부가 유일무이한 존재였던 것처럼 배우지만 사실 당시에 지도자 급의 인물과 구심점이 되는 단체는 여럿 있었고 그 중 마지막까지 국내 정치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억되는 거라던가…

현 시점엔 당연히 세 사람 모두 고인이다. 하지만 제각각 맞이한 결말이 너무 다르고 저마다의 방향으로 슬퍼서, 무엇이 이 여자들을 이 길로 이끌었나 생각해 보게 된다. 최근 트위터에서 “자기 입으로 혁명 서사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사실 혁명 서사 안 좋아한다. 쿠데타 서사를 좋아하는데 스스로 착각하는 거”라는 얘기를 봤는데 차마 부정하기 힘들었다. 실제 혁명의 역사는 일관성 없이 모든 게 얼레벌레 이루어진다. 대의를 좇는다고 모두가 그 우산 아래 하나 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사람의 가치관이란 게 스스로 믿고 싶어하는 만큼 견고하지도 않고, 타협이 필요한 시점인지 기존 신념을 그대로 밀어붙여야 하는지 아무도 답을 알려주지 않는데 그 순간의 결정이 너무 많은 걸 좌지우지 하고. 그런 불안한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보통은 잘 짜여진 체계 안에서 서자가 적통 후계자를 치는 스토리에, 혁명이라는 향신료가 한 스푼 첨가된 걸 좋아하는 거지.

읽고 나니 ‘혁명! 죽창!’ 같은 말을 함부로 하기가 무섭다. 그렇게 가볍게 담을 얘기가 아닌거 같아.

콜카타의 세 사람

영화 『RRR』 을 보고 나서 인도에 꽂혀서 중고서점에서 구매했다.

우연히 테러 사건에 휘말린 여성 ‘지반’과 배우 지망생 ‘러블리’, 그리고 한떄 지반을 담당했던 체육 선생이 등장한다. 한쪽에선 지반의 무죄를 증명하려 하고 다른 한쪽에선 지반을 마녀사냥의 제물로 세워 이득을 취하고자 한다는 이야기. 하이틴 소설처럼 유쾌하게 시작해서 점점 오싹한 분위기로 전환되는 게 재밌었다. 글 자체도 술술 잘 읽힌다. 그런데 이 소설이 ‘재밌다’는 게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한 사회의 어둡고 극단적인 면을 다루는데 그에 비해 이 소설의 재미는 너무 상업적이랄까… 추리소설에서 범인의 고백을 통해 그들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파트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치만 추리소설의 배경은 완전히 허구의 것이고 콜카타는 실존하는 지명인데 이대로 괜찮은 건가요?

그래도 이 소설 덕분에 히즈라라는 개념을 알게 됐다. 인도에 존재하는 제3의 성인데,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이루어 살며 결혼이나 출산 같은 행사를 축복해주는 것으로 생계를 꾸린다고 한다. 주인공 중 한 명인 러블리가 히즈라로 나오는데, 마취도 없이 불법으로 진행되는 성확정 수술과 인권 등의 문제가 소설에서 일부 다뤄진다.

은하환담

한국 설화에 기반을 둔 SF 소설 단편집. 이번 학기에 “고전의 장면과 표현” 과목을 수강하면서 한국 고전문학 및 민담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구매했다. 한국 설화 기반이라는 문구에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건지 생각보단 평범했다. 여러 작가가 참여한 앤솔로지인 만큼 책 자체에 대해 감상을 말하긴 좀 어렵고, 어떤 작가가 내 취향이고 아닌지를 좀 더 분명하게 알게 된 정도. 저의 취향은 김성일 작가님과 전혜진 작가님이었습니다.

여태 읽은 SF 앤솔로지 중엔 『책에 갇히다』 가 제일 재밌었다. 그땐 그 정도로 취향 맞는 단편집이 생각보다 드물다는 걸 모르고 중고 서점에 팔았는데 다시 구매할까 싶다.

롤랑의 노래

올해 상반기에 “신화의 세계” 과목을 수강하면서 서사시에 관심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알라딘의 홍보 배너와 눈이 마주쳐서 구매했다.

『롤랑의 노래』 는 11세기 후반에 쓰인 무훈시로, 샤를마뉴 대제가 이끄는 - 그리고 후에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기원이 되는 - 프랑크 왕국과 마르실 왕이 다스리는 에스파냐 사이의 전쟁이 7년째가 되는 시점에서 출발한다. 샤를마뉴 대제의 신하인 가늘롱은 이 전쟁을 그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12기사 중 한 명이자 샤를마뉴 대제의 조카인 롤랑은 전쟁을 계속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타협점을 찾지 못한 가늘롱은 결국 왕국을 배반하고, 이 결정으로 12기사 모두가 전사한다. 이게 1부의 줄거리. 2부는 비통에 찬 샤를마뉴 대제와 프랑크 왕국군이 에스파냐와 그 연대 세력인 발리강을 상대로 대승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줄거리는 참 간단한데 실제로 책을 펼쳐보면 각주 길이에 눈앞이 아득해진다. 본문보다 각주가 더 긴 경우가 부지기수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이 작품이 프랑스어가 태어난지 얼마 안된 시기에 쓰였기 때문이다. 해설에 따르면 처음에 라틴어에서 로망어 (로마니아 지방 사투리) 가 탄생했고, 여기서 갈리아 지방의 라틴어가 섞이면서 프랑스어의 직계 조상인 갈로로망어가 생겼고, 동프랑크/서프랑크가 나뉘면서 각 지역의 언어가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후 842년에 동프랑크와 서프랑크가 스트라스부르 서약을 맺으며 쓴 텍스트가 최초의 프랑스어 문헌으로 여겨지는데, 그걸 기준으로 생각하면 『롤랑의 노래』 는 200살이 조금 넘은 초기 프랑스어로 쓰인 셈이다. 따라서 의미를 아예 알 수 없는 단어도 많고, 의미는 파악했으나 현대어로는 번역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둘째는 중세 유럽과 현대 한국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번역만으로는 전체를 다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지명은 현재의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지명과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다. 가령 ㅇㅇ의 ㅁㅁ평원이라는 지명이 나오면 각주엔 ㅇㅇ 가 현재의 어디를 가리키고 ㅁㅁ 는 무슨 근거에 따르면 이곳으로 추측되고 저 근거에 따르면 저곳으로 추측된다는 설명이 열댓 줄씩 쓰인다. 뿐만 아니라 중세 기사들이 사용한 무기, 전투 방식 등은 각주가 없으면 머릿속으로 그림조차 그려볼 수 없다. 문화는 말할 것도 없다. 원거리 무기인 활은 비겁과 불명예의 상징으로 여겨졌다던가 장갑을 바치는 행위가 봉건영주에 대한 서약으로 여겨졌다던가 하는 걸 각주 없이 무슨 수로 알겠어요?

명료한 줄거리에 비해 난이도가 높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재밌었다. 무훈시라는 장르 특성상 종교적인 요소도 마구 섞이고, 사건의 시기가 잘못 설명되거나 그 시대의 믿음과 무지가 반영된 부분도 있지만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 ‘진정한 진실’이 된다는 점이 서사시의 매력인 거 같아. 또 혹여나 청자가 내용을 잊었을까 했던 묘사를 반복 또 반복하는 부분이나 중간에 전령을 등장시켜 지난 줄거리 요약을 해주는 건 솔직히 친절하다고 느꼈다. 현대 문학도 이런 관용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웹소설 독자들도 전개 속도에 좀 너그러워 졌으면.

카탈로니아 찬가

『히카르두 헤이스가 죽은 해』 를 통해 스페인 내전에 관심이 생겨서 구매했다. 조지 오웰은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정작 이 책 전에 읽어 본 조지 오웰은 『1984』 뿐이었지만. 현암사에서 발간된 조지 오웰 소설 전집을 얼마 전에 샀으므로 내년엔 더 열심히 읽지 않을까 싶다.

『카탈로니아 찬가』 는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전해서 경험했던 내용을 기록한 르포르타주다. 총 14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크게 나누자면 1~8장은 우에스카 전선에서 겪은 일, 9~11장은 바르셀로나 전투, 12~14장은 전선에서 벗어나 스페인을 탈출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탈출이 필요했던 건 당시 조지 오웰이 속해 있었던 통일노동자당 (정식 명칭은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 이 좌파 내의 정치 싸움에서 밀려 불법화가, 즉 숙청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책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파시스트를 몇 명이나 죽일 수 있을까” 기대하며 전선에 왔다. 그런데 정작 와보니 추위를 견딜 땔감이 부족했다. 총은 백년 전에 만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구식을 줬다. 교전하다가 적군에게 죽는 사람보다 고장난 총의 오작동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았다. 애초에 체계적인 훈련이랄 게 없이 총부터 쥔 사람이 대다수였다. 성년이 안된 사람도 많았다. 개인적으론 이 문장이 좀 충격적이었다. “이런 나이의 아이들은 절대 전선에 내보내면 안 된다. 이 아이들은 참호전에서 피할 수 없는 수면 부족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가치있는 죽음을 꿈꾸며 왔는데 어째서 전쟁은 이토록 지리멸렬한가. 그는 이 전쟁에 엮인 이해 관계가 원인이라고 추측한다. 당시 스페인 인민연합 정부는 여러 좌파 정당이 섞인 공동체였다. 그 중 조지 오웰이 속해있던 통일노동자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파시즘에 대항할 수는 없다’는 혁명 노선을 고수했고 통일사회당은 ‘지금은 내전의 승리가 중요하므로 혁명은 일시 중지’를 주장했다. 이 둘은 좌파로 같이 묶일지는 몰라도 실제론 적이다. 근본적인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절대 영원한 아군일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통일사회당의 손을 들었다. 왜냐면, 만일 스페인이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될 경우 인접한 자본주의 국가들도 영향을 받는데, 이는 자본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놓은 소련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었기 때문. 따라서 소련은 자칫 혁명군이 될지도 모르는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에게 제대로 된 무기가 가지 않도록 공급을 통제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여론도 통제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산주의의 수장이었던 소련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렇게 다분히 우익적인 결정을 했다니, 새삼스레 충격이었다. 실제로 조지 오웰은 당시에 행해진 공산주의 언론의 선동과 날조 때문에 이 책을 출간하는 데에도 상당히 애를 먹었다.

읽으면서 『콘크리트 레볼루티오 초인환상』 이 생각나는 지점도 있었다. 이건 진짜 제대로 된 영업글을 쓰는 게 내 블로그 장기 목표 중 하나인데 언제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초인물 장르와 20세기 일본의 현대사를 버무려 놓은 애니메이션인데, 등장인물들이 초인에 대해 가지는 가치관이 제각각이다. ‘초인은 인간과 어우러져 사는 게 더 행복하다’ 와 ‘초인은 초인들끼리 사는 게 더 행복하다’ 처럼 대놓고 대립하는 쌍도 있고 ‘초인의 이미지를 개선시키는 게 우선이다’, ‘초인 개개인에게 도움을 주는 게 우선이다’, ‘초인들을 법 체계 안에 두는 게 중요하다’ 같이 양립 가능한듯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부딪치는 주장들도 있다. 셋 다 초인을 포용하려는 주장이므로 초인 배척론자를 상대할 땐 이 셋이 한편이지만 공동의 적에 대한 싸움과 내부 정치는 항상 동시에 이뤄지기 마련이고 그런 복잡다단한 면이 정치사의 재미가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이게 내 일이 되면 조금도 재미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