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분기 책 결산
보스턴 결혼
19세기 보스턴에서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살았던 여자들을 이르는 용어 ‘보스턴 결혼’을 파고든 책. 생각보다 술술 읽히고 재밌었다. 인상적인 문장도 많고 재밌는 부분도 많아서 사진도 잔뜩 찍어 뒀는데, 감상을 정리하는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결국 현재 ‘보스턴 결혼’을 하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 서론과 탐구들 챕터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상상한 보스턴 결혼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적이었다. 차분하고 유쾌한 두 여자가 이 기이하고 재미난 관계에 만족하며 잘 먹고 잘 사는. 나이 들어서는 왠지 흔들의자 하나 갖다 놓고 한 명은 뜨개질하고 한 명은 책을 읽을 것만 같았다. (그런 환상 속의 노년은 타샤 튜더의 그림책에만 나오는 걸 알면서도.) 그러나 이야기들 챕터에서 나오는 실제 사례들은 굉장히 불완전하고 덜컹거린다. 사회가 정해둔 스텝에서 오로지 결혼이라는 단계 딱 하나만 밟지 않고 정상성 풀코스를 거친 다음 보스턴 결혼을 하는 사람은 당연하지만 거의 없다. 각자 아주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방식의 관계를 맺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 챕터인 19장에서 ‘그래서 대체 보스턴 결혼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다시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거 같다. 나 또한 비슷한 의문을 가졌고.
요즘은 이런 지점이 어렵다. 함부로 경계선을 지으면 안 된다, 세상엔 다양한 퀴어가 존재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건 너무 당연해서 그렇죠! 맞장구를 치는데 막상 진짜로 그 다양한 사례를 보고 나면 결국 이 사람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퀴어라는 우산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지, 내가 공동체라고 느낀 이 울타리는 그저 내 불안, 이쯤에서 안도하고 적당히 타협하고픈 마음이 만들어낸 무언가였나 하는 회의감이 든다. 퀴어적인 삶을 산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난 실천할 자신이 없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마지막에 옮긴이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경험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경험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경험하지 않고서는 남(성)의 말을 따라 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쓴 것이 또 인상적이었다.
아, 이 책에서 레즈비언 로맨스 각본을 분석하는 과정이 전반적으로 웃겼다. 결국은 실존하는 레즈비언도 레즈비언 로맨스 소설을 보고 관계 맺는 방식을 역수입한다는 점에서. 그런데 어떤 의미에선 마냥 웃긴 힘들었다. 저는… 비슷한 걸 제가 쓰고 있는데…
스파이와 배신자
재밌었다. 이 책에 대해선 달리 할 말이 없다. 두꺼운 하드커버 판형에 568페이지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분량이 압도적인 첫인상을 주지만 이틀만에 다 읽었다. (친구가 이틀만에 다 읽었다고 해서 정말? 하고 펼쳐 본 결과 나도 거의 그랬다. 읽는데 쓴 시간만 카운트하자면.) 냉전 시대를 종결짓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이중 스파이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실화를 다루고 있고, 배경 특성상 길고 복잡한 러시아 인명이 많이 나오지만 읽다 보면 다 외워지니까 상관없다. 2독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에어컨 잘 나오는 시원한 카페에서 읽기 좋은 재밌는 소설이었던 건 확실.
에이징 솔로
동네 서점의 법칙 (동네서점에 방문했으면 으레 한 권은 사야지) 으로 샀던 책. 내가 이 주제로 대학교 과제를 하고 있었다면 요긴하게 썼을 거 같다. 참고할 만한 통계, 현황 자료는 많이 나온다. 그런데 오? 하고 눈이 가는 새로운 내용이 없었다. 한 장 한 장이 맞는 말을 하고 있는데 전부 내가 이미 아는 말을 하고 있어서, 1/3쯤 읽다가 스탑하고 되팔았다.
우리는 SF를 좋아해
심완선 평론가님의 한국 SF 작가들 대담집. 역시 동네 서점의 법칙으로 샀다. 인터뷰집은 보통 실패하지 않기 때문에 (인터뷰이 목록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껴있다면 더더욱) 이 책 역시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김보영 작가님 대담만 봐도 재밌겠다는 생각으로 샀는데, 예상보다 훨씬 재밌었다.
“타인을 읽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인용이고 받아쓰기다. 나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로 나를 고치고 깁고 늘리며 살았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의 풍경을 알고 있듯이, 나는 내가 살아 보지 않은 삶을 안다. 연결된 텍스트가 늘어날수록 나는 다채롭고 커다란 모자이크가 된다.” 평론가님의 서론도 아주 인상적이었고.
“글을 쓰는 게 뭐가 힘들어요. 쓰지 못하는 것이 힘들죠.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그게 제일 고통스러웠어요. (…) 제 생각에는 일상을 사는 게 힘들지, 창작의 고통은 그에 비하면 대단하지 않아요.” 김보영 작가님 파트에선 또 한번 공감의 눈물을 쏟았고. 그러게요. 삶의 모든 시간을 읽기와 쓰기로 채울 수 있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겠죠.
듀나 작가님이나 배명훈 작가님, 김초엽 작가님 이야기도 재밌는 부분이 많아서 사진을 꽤 많이 찍어가며 읽었고, 내가 내 글 쓰다가 위안이 필요할 때 다시 펼쳐보게 될 거 같다. 오래오래 집에 둘 듯한 책.
첫사랑, 카타르시스
트친 분이 이 만화에 대한 내 감상을 알고 싶다고 하셔서 (BL인데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 요소가 있어서) 봤던 만화. 에이-스펙트럼 이야기가 들어가면 확실히 거리를 두고 보기가 힘들다. 이 만화 좋았어요 또는 그저 그랬어요 등의 감상이 나오지 않고 이 만화가 에이-스펙트럼을 어떻게 다루는지, 그리고 그게 내게 어떻게 다가오는지에 집중하게 된다. 그걸 스스로는 조절할 수 없고… 실은 에이-스펙트럼을 컨텐츠에서 어떻게 다뤄줬으면 하는지 나도 모르기 때문에 하나하나 발디뎌 보면서 감을 잡아가는 중이다.
이 만화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봤던 장면은, 제드섹슈얼이 분명한 캐릭터 A가 자신의 에이섹슈얼 파트너 B에게 자기가 마치 강간하는 사람이 된 거 같았다고 말했을 때 B가 나도 피해자인 척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는 부분이었다. 그 말을 하는 B의 심정을 너무 알겠더라.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는 A의 심정도. 이건 분명히 B도 동의한 관계였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강간이 아니다. 하지만 폭력적인 관계였던 건 사실이고, 그건 두 사람이 아무리 상호 합의를 한다고 해도 없어지는 부분이 아니다. 한쪽에게 폭력으로 닿을 수밖에 없는 행위지만 두 사람이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지속해 나가고 싶다면 ‘이건 사랑해서 하는 거고 합의했으니까 폭력이 아냐’ 가 아니라 ‘폭력을 안전하게 지속적으로 이어갈 방법’을 말하는 쪽이 더 건설적이지 않을까. 예전에도 했던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는 결론.
그러나 한가지 경종을 울리는 부분이 있다면 이 만화에서 에이섹슈얼로 나오는 캐릭터 B가 상당히 금욕적인, 그러니까 속되게 말해 A에게 꼴림을 선사할 만한 외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장르가 BL이니만큼 상업성을 추구하려면 어쩔 수 없나 싶다가도, 이런 애처로운 이미지의 캐릭터가 아니었으면 이 서사는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았던 걸까? 하는 의문은 끝까지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