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분기 책 결산 (1)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왜 이런 책이 있음을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나 억울해지는 책이 가끔 있다. 이 책의 올해의 억울함 1위가 아닐까 싶다. 단순히 소설 안에서 에이섹슈얼을 다루기 때문만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거야말로 내가 원했던 ‘퀴어 소설’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퀴어 소설이든 퀴어 영화든 대개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두 사람이 연대해서 이 거친 세상과 싸워나가는 이야기가 되기 쉬운데 나는 그 ‘두 사람’이 너무 환상 공동체처럼 느껴진다. 마치 두 동성 연인이 결혼할 수 있는 환경만 갖춰지면 평생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짝짜꿍인 것처럼, 헤테로 커플들이 상실하고 만 영원한 사랑에 대한 로망을 동성 커플에게서 추구하는마냥…
그래서 현실의 퀴어는 어떻게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가는가, 어떤 타협을 하고 어디서 모순을 느끼는가를 파고드는 이 소설이 정말 반가웠고 탁월하다고 느꼈다. 나의 부족한 언어로 설명하려면 구구절절 한 시간쯤 늘어놓아야 하는 감정을 너무 깔끔하게 정리해서 자 됐지? 다음! 하고 가시는 거예요.
성소수자의 사회적 가시화나 시민권 획득, 동성혼 법제화에 대한 책을 주로 읽는 모임 안에서 주호는 낯선 존재였다. 젠더 다양성이나 해체를 운운하는 주호를 다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으로는 아니었고, 그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게 힘겹게 받아들인 정체성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경험이지 다시 혼란해지거나 불안해지는 경험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 구절이 특히 심금을 울렸다. 다시 혼란해지거나 불안해지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나도 너무 알 거 같아서.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
소설 쓰기에 대한 가벼운 책을 읽고 싶어서 이북으로 읽었다.
아주 대중적으로, ‘그거 흔히들 취미로 하지’ 하는 취미를 가졌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를 종종 실감한다. 가령 퇴근하고 게임을 열심히 한다고 했을 때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냐고 묻지는 않을 텐데 소설 쓰기를 취미로 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수익성이나 향후 진로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단순히 뭘 생산하는 취미냐 그렇지 않냐의 문제는 아닌 거 같고. 뜨개질하는 사람한테 그걸로 돈 버냐고 묻진 않던데. 아닌가.
여하튼 주변에서는 종종 나의 쓰기 취미에 대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나는 아무 생각없는 표정으로 ‘아뇨… 그냥 한두명 정도만 잘 읽어줘도 족한데요’ 하고 쓴다. 세상에 소설을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고 소설 외에 재밌는 건 더 많은데 누군가는 시간 들여 내가 쓴 걸 읽어 준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요. 그래도 잠시나마 쓰는 사람의 공동체에 나 또한 속해 있다 생각하며 읽은 책 역시 재밌었다.
나는 어째서 시작하지 못하는가. 실패하기 싫어서겠지. 알고 있다. 재료는 재료뿐이라는 걸. 불과 물에 닿은 재료의 맛은 변할 수밖에 없다는 걸. 단 1분, 단 1그램의 차이로 맛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절대 내가 상상한 그 요리를 똑같이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글을 쓰다 보면 차차 깨닫게 된다. 나의 상상이 얼마나 빈틈이 많고 빈약하고 흐리멍덩했는지.
역병의 바다
믿고 보는 김보영 작가님. 그리고 재미없을 수 없는 크툴루 소재. 얇고 빠르게 읽히고 군더더기 없이 재밌고 시원했다.
진화 신화
믿고 보는 김보영 작가님2. ‘나라에 오랫동안 가뭄이 들자~’ 로 첫 문장을 시작하며 전근대 왕조 분위기와 함께 전래동화의 선비 같은 서술자가 등장했는데 주인공을 진료하는 의사가 갑자기 ‘아시다시피 후천적인 형질은 유전되지 않습니다’ 같은 멘트를 치는 굉장히 담대한 책. ‘백성의 마음이 메마르니 어찌 하늘 또한 메마르지 않겠습니까.’ 같은 전형적인 사극 대사 해 놓고 다음 페이지에서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비가 오려면 기압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를 읊어주는 다이내믹이 너무 웃겼다.
스틸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믿고 보는 김보영 작가님3. 2분기에 몰아 읽었던 김보영 작가님 책 중 가장 좋았다. 『당신에게 가고 있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미래로 가는 사람들』 이렇게 세 권이 한 세트다.
어떻게 이런 사랑이 있을까? 어떻게 이런 걸 쓰지? 너무 아득한 동시에 아, 적어도 로맨스를 쓰는 작가는 사랑의 존재와 힘을 온 진심으로 믿어야 하는 거구나 싶었다. 실제로 저자 후기에도 그런 말이 있었다. 로맨스 장르를 도전해 본 것이 처음인데 ‘이 글을 다 쓰고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으면 제대로 쓴 것이 아니다’ ‘로맨스를 제대로 쓴다면 나 스스로가 변할 것이다’ 생각하셨다고. 동인 창작으로 열심히 로맨스를 빚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말이 너무너무 촌철살인이었고,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힘과 경지가 정말 존경스러웠다. 그런 기준이라면 이 소설은 제대로 쓴 것이었어요.
도대체 이런 확신 느껴본 게… 바스러지지 않는 영원이 있다고 믿어본 게 언제적인지… 하지만 다 읽고 나니 어딘가엔 이런 영원이 있기를 너무너무 바라게 되는 책이었고, 언젠가 내게 유일무이하게 아끼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 책을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최고의 러브레터.
알페스x퀴어: 케이팝, 팬덤, 알페스, 그리고 그 속의 퀴어들과 퀴어함에 대하여
이 책을 살 때는 내가 2차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난 이게 내가 알페스라는 장르를 알게 되는 입문서일줄 알았는데. 물론 지금도 알페스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2차 창작을 하는 시점에서 아주 남의 이야기는 아니게 되었고, 케이팝-팬덤-알페스의 상호 연결이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궁금해졌기에 사두고 못 읽었던 책을 부랴부랴 펼쳤다. 두께도 얇고 그리 어려운 책은 아니어서 재밌게 읽었다.
섹스는 판타지이고, 판타지와 표상, 현실의 경계는 모호하며 분명 불가해한 부분이 있다. 진짜 퀴어의 섹스는 누가 알고 있는가? 퀴어 ‘당사자’는 그것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 섹스를 ‘진짜 퀴어들의 섹스’로 규정하고 인식하는가? 그것을 규정하고 인식하는 권한은 누구에게 주어져 있는가?
특히 미조구치 아키코 선생님의 발언 인용에서 마음 속으로 밑줄을 쫙 그었다. 그러게요. 진짜 퀴어 섹스가 어떤 건지 누가 알까. ‘진짜 헤테로 섹스’가 어떤 건지 헤테로는 알까? 오로지 재생산 목적으로 할 게 아니라면 섹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판타지인데. 더 자연스럽고 그들다운 섹스를 규정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피해자’란 대체 무엇인가? 피해자로 정체화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며, 그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당사자’가 언짢은 모든 행위 일체는 ‘가해’이며 ‘혐오’가 되는가? 우리가 겪는 주변화, 배제, 종속의 상처를 모두 ‘피해’라고 볼 수 있는가? 사실 인간의 실존 자체도 모두 억압당한 경험으로 구성되며, 모든 것이 ‘피해’ 아닌가?
가해자/피해자 구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이제 포스트 페미니즘을 다룰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거 같은데,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모든 논의가 ‘피해자로서 발화하기’ ‘가해자를 비난하기’ 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피해자란 대체 무엇인가? 무슨 말만 하려면 이거 당사자성 발화다 (그러니까 첫 줄만 읽고 냅다 욕 박지 말고 좀 들어봐라) 나 피해자 경험 있다 (그러니까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들어봐라!) 해야 하는 게 너무 답답하다. 도대체 평생 한번도 ‘가해’하지 않고 산 사람이 세상에 있긴 한지.
수많은 사람들이 퀴어 커뮤니티를 치고 지나가지만 많은 경우 당사자들이 커뮤니티에서 사라지고 그냥 허무하게 끝이 나서 결과가 사라진다. 역사가 축적되지 못해서 (무언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어떤 고통 속에서 사라지는데 어떻게 축적이 되겠는가) 모든 것이 흐르지 못하고 자주 끊어진다.
퀴어 커뮤니티는 좀처럼 아카이브되지 않는다. 실컷 얘기하고 결론 다 냈던 논의가 24절기처럼 돌아오고, 일단 모여 보라고 해서 모였을 뿐 그다음 스텝을 밟지 못하고 (어떤 스텝을 밟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흐름이 자주 끊어진다. 어떨 땐 모순되는 부분 없게/일관성 있게/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행위 자체가 누군가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지 않나 싶다. 그 ‘일관적’이라는 단어조차 실은 역사적으로 다수를 차지한 사람들, 세상을 예측 가능한 형태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의된 것이고.. 어떤 우주에선 매일매일 엉망진창 랜덤하게 퀴어하게 사는 게 ‘일관적’인 걸 수도 있지.
그날, 그곳에서
작년 도서전에서 샀던 SF 책. 이경희 작가님의 『모래도시 속 인형들』을 재밌게 읽었어서 따라 샀던 책인데, 그냥저냥 읽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 상당히 고군분투하는데 (어머니는 딸을 구하기 위해, 딸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그런 의심의 여지 없는 가족애에 행동 동기를 모두 내맡긴 이야기에 이입을 잘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
우치다 타츠루의 레비나스 3부작 중 마지막 권. 첫 번째가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이었고 이번에 읽은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이 세 번째 책. 두 번째 책은 아직 읽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랬듯 다 이해하진 못했고 다 동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생각날 때마다 곱씹다보면 언젠가는 소화되지 않을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게 만드는 매력이 레비나스 철학에 있는 건 분명하므로 일단은 그 정도의 기대. 완독 기념으로 1차 저작인 『시간과 타자』도 샀다.
날마다 만우절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한국 문학을 너무 안 읽는 것 같아 일부러 한국 현대문학 단편집 읽기 모임에 들어갔는데, 독서모임은 항상 비슷한 사이클을 탄다. 나 너무 특정 장르를 안 읽는다 하지만 편식하지 않아야 지평이 는댔는데 -> 독서모임 가입 -> 내가 왜 그 특정 장르를 선호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새삼 실감 -> 지쳐서 나가 떨어짐의 단계를. 참고로 현재는 마지막 단계에 가기 직전에 멈춰 서 있다. 그나마 『날마다 만우절』이 모임에서 어느 누구도 불호평을 제기하지 않은 책이었고,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웹에 공개된 표제작이 재밌길래 내가 추천했다가 책 전체를 다 읽고 나선 모두가 코코넛 던지기를 했다. 표제작 같은 분위기를 기대하고 책을 산다면 한숨을 쉬게 될 것.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도 반응들이 뜨뜻미지근했다. 특히 맨 마지막에 실린 정지돈의 단편은, 작가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도무지 좋은 시선으로 읽히지 않았다.
7인의 집행관 / 저 이승의 선지자
믿고 보는 김보영 작가님4.
그래요. 저 김보영 작가님의 거의 모든 책을 샀어요.
책이 발매된 날짜를 보면 『저 이승의 선지자』가 먼저, 『7인의 집행관』이 나중 같지만 사실 저 링크에 걸린 『7인의 집행관』은 개정판이고 초판은 2013년에 나왔기 때문에 이쪽이 먼저다. 『7인의 집행관』에는 말 그대로 일곱 명의 집행관이 나오고 그 일곱 명이 각각 제가 원하는 세계관을 펼치며 일종의 재판을 진행하는데, 그 중 한 명의 세계관을 확장시킨 결과가 『저 이승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순서를 맞춰 읽어도 재밌을 듯.
앞에서 언급했던 『역병의 바다』, 『진화 신화』, 『스텔라 오딧세이 3부작』 등등은 좀 더 정제되고 다듬어진 세계관에서 사건이 펼쳐치며 불확실성을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면 『7인의 집행관』은 그보다 규모가 훨씬 방대하다. 그래서 빈틈없이 완성된 이야기이기보다는 ‘내가 지금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게 만드는 재미가 있었다. 이건 2독, 3독을 해도 재밌을 거 같아요.
언어의 무게
읽으면서 얼마나 욕을 했는지 모른다. 이 책 읽던 당시에 썼던 다이어리 펼치면 진짜 메모가 빼곡하다. 읽고 있는 페이지, 읽고 있는 문장, 그리고 왜 내가 이 문장을 읽으며 열이 받는지 주절주절을 열심히도 써 놨다.
어쩌다 이런 632페이지짜리 하드커버 외국소설을 샀는지부터 먼저 설명하자면 고등학생 때 페르난도 페소아라는 포르투갈 작가를 무척 좋아했었다. 첫 계기는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였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고전문학 교사로 오래 일한 주인공이 어느 날 어떤 사건을 계기로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리스본으로 떠나 아마데우 프라두라는 한 남자의 일생을 탐구하기 시작하는 이야기인데, 극중극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이 프라두가 깊은 영감을 받는 인물 중 하나로 페소아가 등장한다. 그떄 페소아를 알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긴 사랑의 시작점이었다. 십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페소아를 그때의 온도로 좋아하진 않지만, 또 중고등학생 시절의 사랑은 영원히 가는 면이 있으니까. 마침 페소아 입덕 첫 계기였던 파스칼 메르시어가 새 소설책을 냈다기에 이번엔 어떤 내용일까 기대를 했던 것인데.
『리스본행 야간열차』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나오는 신작인만큼 아예 그때와 다른 이야기를 다루거나, 아니면 그 시절엔 문학을 이런 눈으로 바라봤지만 나이가 든 지금은 이렇게 바라본다 같은, 더 원숙해진 시각이 나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느끼기에 이 책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자의식만 방대해졌지 더 매력적이게 되진 않았다. 읽으면서 너무 고통스러웠다. 주인공이 자신의 언어, 자신의 번역, 자신의 소설 창작에 너무나 깊은 무게를 두는데 나는 거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아저씨요 소설은!! 집에서 프린터기 출력해서 스테이플러 찍어서도 만들 수 있어요!!! 동인 창작을 해 보세요 아저씨!!
집에 가서 다이어리 펼쳐보면 욕할 거리가 더 나올 텐데.. 그만하자. 요약하자면 ‘청소년기에 재밌게 봤던 만화 서른 넘어 다시 봤을 때 느낄 수 있는 자괴감’의 극대치였던 거 같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이 ‘왜 아무도 내게 이 책을 말해주지 않았어’의 억울함이라면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주위에서 추천을 그렇게 했는데 여태 안 보고 뭐했어’의 후회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할 만한 책.
트랜스젠더 당사자였던 극작가의 희곡집인 동시에 마지막 책으로 남을 유작. 챙겨야 할 유머를 다 챙긴 동시에 작가가 꿈꾸는 해방감이 오롯이 전해지는 장면이 많았다. 극장에서 실제 극으로 올리기도 했다던데 그때 못 본 게 정말 큰 아쉬움으로 남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