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적 폭력은 영혼의 짐을 덜어준다. 이러한 폭력을 통해 고통이 외부화되기 때문이다. 영혼은 고통스러운 독백의 늪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폭력은 근대에 들어와 정신화, 심리화, 내면화의 과정을 겪는다. (13p)

요 문장을 읽으면서 과거에 내가 겪었던 폭력과 요즘 트위터를 보며 받는 도트 데미지를 생각해 봤는데.. 둘 중 뭐가 ‘더’ 심각하고 뭐가 ‘덜’ 심각하다고는 정말 말할 수 없는 거 같다. 우리는 물리적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을 야만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지금이 그때보다 덜 야만적이게 된 건지는 진짜로 잘 모르겠다. 오히려 외적 폭력이 극복하기는 더 쉬웠다는 생각도 든다.

소셜 네트워크의 ‘친구들’은 무엇보다도 소비자로서 상품처럼 전시된 에고에 관심을 선사함으로써 나르시시즘적인 자존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SNS를 두고 흔하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어쩐지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트위터 뿐만 아니라 중학생 시절엔 웃대를, 고등학생 땐 오유를 하면서 익명 커뮤니티에 많은 빚을 졌고 여전히 인터넷 월드의 긍정적 측면을 믿지만, 또 SNS를 하는 내가 끊임없는 에고 전시회를 하고 있는 것도 맞아서? 최근에 트위터 여론 싸움을 지켜보는 게 너무 기가 빨려서 잠깐 계정 비활성화를 해놓고 나왔는데, 트위터를 끄니까 내 일상은 기이할 정도로 평화로워서 위화감이 들었다. 마치 내가 출근 안하면 안 돌아가는 회사인줄 알고 야근 미친듯이 했는데 하루 휴가내 보니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걸 체감한 느낌⋯.

나를 확장하고, 변모시키고, 재창조하라는 명령은 - 이 명령의 이면이 우울증이거니와 - 정체성과 연결된 제품의 공급을 전제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체성을 자주 바꿀수록 생산은 더욱 활발해진다.

최근 일 년간의 소비를 돌아보면 정말 처참하다. 아크릴 블럭에 돈을 얼마나 썼는지 모른다. 나한테 이 물건은 필요하지 않은데, 생각하다가도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농놀 트친들이 갖고 있는 걸 보면 왜 난 이게 없지 싶고, 홀려서 데굴데굴 굴러온 결과 내가 이걸 왜 샀지 싶은 아크릴이 정말 많고 나중에 처분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 “ㅇㅇ라면 ㅁㅁ는 사야지”가 세상에 왜 이렇게 많은 걸까요? 꼭 덕질뿐만 아니라 여성/퀴어 관련해서도.. 내 기분 좋으려고 굿즈 한두개 사는 거랑 커뮤니티에서 소외감 느끼지 않기 위해 소비로 나를 끊임없이 증명하는 거랑은 다른 층위 같은데, 그걸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가끔은 진절머리가 난다.

대화나 타협이 아니라 전쟁과 분쟁이 정치적인 것의 기초를 이룬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갈등 사안뿐이다. 갈등과 해결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 사안의 근처에 있는 적대관계가 정치적인 것을 정초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여성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읽히는 걸 썩 좋아하지도 않지만, ‘이 커뮤니티에서 나는 여성 롤이구나’를 가장 크게 실감했던 건 회사에서 모 빌런이(^^) 활개쳤던 시기 같다. 나는 뭘 딱히 한 게 없는데 그 사람은 나를 ‘여성’으로 읽었고,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도 내가 회사에 오래 다닌 ‘여성’ 직원으로서 반응하길 바랐으며, 나 역시 여성으로서의 나를 그 시기에 가장 많이 고민했다. 정체성은 그렇게 생겨나는 거 같다. 성차별이 하나도 없는 세상이었다면 사람들은 자기 성별에 대해 깊게 생각조차 안했을 거다. 누가 나를 적대할 때, 그 이유가 내가 ㅇㅇ에 속하는 사람이라서일 때, 나는 비로소 ㅇㅇ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는 게 아닐지.

가끔은 여성/퀴어의 면을 가진 나와 직장인으로서의 내가 충돌하고, 남들과 함께 맞는 말을 하고 싶은 나와 ‘아니 말은 쉽지 그럼 구체적으로 뭐 어쩌란 소린데’를 말하고 싶은 내가 충돌하고, 거기서 깨닫게 되는 나는 또 그다지 반골 기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고민이 깊어가는 나날들.

하긴 눈에 띄는 반골 기질이 있었다면 모범생이 아니었겠죠? 가끔 동기들끼리 모여 ‘명문대 졸업장이 그 사람의 지성을 말해주진 않지만 그 사람의 체제 순응성은 말해주는 거 같다’는 말을 할 때마다 고개 힘차게 끄덕이는 사람⋯.

일은 일을 하도록 만드는 힘과 강제에 결코 의문을 제기할 수 없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도 없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일의 긍정성은 정상상태를 영속화한다. 일이 되어버린 정치에는 단순히 가능한 것을 뛰어넘는 어떤 초월적 지평도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면 AI 기술 윤리 같은 이슈. SNS 상에서 AI 에 대해 사람들이 얘기하며 기술만 발전하면 다냐, 서비스 플랫폼들이 너무 생각이 없다 등의 말을 하면 고개 끄덕이면서 듣지만 막상 회사에 가면 이걸 어떻게 업무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업무는 그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윤리적인 서비스를 만들려면 이런 고려를 해야죠’ 라는 멘트는 적어도 내가 아는 회사에선 들어본 적이 없다. 그건 반드시 ‘요즘 사람들이 이런 데 민감해서 제대로 신경 안 쓰면 매출에 영향이 있을 수도 있대요’나 ‘이거 안 지키면 법적으로 문제 있어서 걸리면 과징금 물 수도 있대요’로 치환되어야 한다. 그게 회사에서 받아들여지는 자본주의의 언어니까. 우리가 하는 업무의 정치성을 논해보자, 이런 주장을 할 만한 언어 자체가 회사엔 없다.

회사에서의 나는 모든 걸 타협 가능한 대상으로 만든다. IT 회사에서 개발자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거 논이슈 처리 가능할까요’다. 사람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저사양 단말 대응, UI 가 잠깐 깨져 보일 뿐 사용에는 문제가 없는 버그, 심지어 법적인 것까지 타협이 가능하다. 법안을 꼼꼼하게 지킨 대신 절차가 복잡해서 유저가 떨어져나가는 리스크 vs 법안 허술하게 지켰다가 문제 제기될 만한 리스크 이거 계산기를 얼마나 열심히 두드려보는데. 접근성 지원 안하는 것도 타협의 결과, 가로모드 대응 제대로 안하는 것도 타협의 결과라 내 손으로 직접 그 타협을 작성하고 있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요즘 트위터의 분노가 무섭다.

오늘의 사회는 면역학적 성격이 뚜렷하지 않다. 타자는 그렇게 큰 부정적 긴장을 유발하지 않는다. 타자는 격렬한 면역반응을 촉발할 만한 실존적 충격을 주지 못한다. 슈미트에 따르면 타자 자체가 적이지만, 오늘날 적도 긍정화되어 경쟁자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모든 면역반응은 이질성에 대한 반응이다.

이질성을 그토록 절절하게 느낄 만큼 타자를 알아갈 기회가 요즘은 없지 않나 싶다. 나만 그런가 나는 정말 만나는 사람이 별로 없긴 한데.. 요즘은 사람을 끊어내는 일이 쉽게 여겨진다. 이혼도 쉽게 하고 의절도 쉽게 하고, 실제로 당사자들이 쉽게 하고 있진 않겠지만 옆에서는 그런 말을 쉽게 꺼낸다. 왜 그걸 참고 사냐 혼자 살면 되는데 네가 뭐가 부족해서 <- 이걸 마치 해결책처럼 내놓는다. MBTI 생각도 문득 났다. 조금만 타자가 내 상식에 이해 안 가는 행동을 하면 너 T야? 너 F야? 같은 질문을 함으로써 내가 아는 영역으로, 내가 이질성을 느끼지 않는 바운더리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 그렇다고 무슨 소속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세상엔 그냥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그들과도 세상을 같이 살아야 하는 법인데 그 타자들과 잘 부딪치고 잘 화해하는 풍토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 아닌지.

투명성에 대한 줄기찬 요구의 바탕에는 어떤 형태의 부정성도 없어진 세계, 또는 그런 인간의 이념이 깔려 있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기계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이란 인간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기계의 커뮤니케이션일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공동체를 수립하는 행위다. 그러나 일정한 한도를 넘어서면 커뮤니케이션도 더 이상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그저 스스로를 누적해갈 뿐이다. 정보는 형식을 부여하기에 정보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정보고 어느 한도를 넘으면 형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형식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정보는 형식을 망가뜨린다. (다음 문단) 언어의 스팸화는 자아의 비대화와 결부된 현상이다. 자아의 비대화는 공허한 커뮤니케이션을 낳는다. 이로써 포스트데카르트적 시대 전환이 시작된다.

포스트데카르트적 자아는 더 이상 전처럼 머뭇머뭇하는 가정이 아니라, 막대한 현실이다. 그것은 조심스러운 추론의 결과가 아니고 원천적인 정립이다. 포스트데카르트적 자아는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 타자를 부정할 필요조차 없다. 그 점에서 그는 타자의 부정을 통해 스스로를 세우고 분리함으로써 자신의 경계와 정체성을, 자신의 영토를 표시하는 데카르트적 자아와는 다르다.

트위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스스로를 누적해 간다’는 표현이…

포스트데카르트적 자아 얘기도 재밌다. 그 자아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제가 겪어본 게 아니니 잘은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같은 조심성도 갖추지 않는다. 걔는 타자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진정한 ‘타자’로서 받아들이지도 않을 걸. 너와 나는 기껏해야 MBTI 알파벳이나 다를 뿐 동일한 체계 안에 있고 반드시 그럴 거거든.

포스트데카르트적 자아는 “타자”에 “내던져져” 있지도 않고 주격과 목적격의 관계 속에 얽혀 있지도 않다. 그러나 이 자아도 강박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전시의 강박에 자기 자신을 구속시킨다. 레비나스의 논의에서 타자에게 내던져진다는 것, 타자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은 “나체를 뛰어넘는 노출 상태”, “피부마저 벗겨진 상태”가 된다는 의미로까지 고조된다. 여기서 자아는 강한 의미의 윤리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포스트데카르트적 자아는 벌거벗겨져 포르노적 나체가 드러날 때까지 스스로를 전시하는 미적 주체로 나타난다. 그렇게 벗겨지고 전시된 자아에게 타자는 구경꾼 혹은 소비자일 뿐이다.

그치. 요즘은 존재에 대한 고민 안하지. 내가 존재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걸. 무려 ‘낳음당했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자신의 존재를 크게 받아들이잖아요. 내가 뭔가를 하기 때문에 그걸 근거 삼아 내 존재를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존재는 너무 당연한 것이고 우리는 나의 취향/적성/진로/아무튼 진정한 나를 찾느라 너무 바쁘다.

‘벗겨지고 전시된 자아’ 라는 말도 좀 울림이 컸다. 이젠 SNS가 너무 익숙해서 그곳에 커스텀으로 맞춰진 내 자아를 전시하는 일에도 큰 자각이 없었다. 익명의 타자를 그토록 무수히 만나는데도 우린 늘 서로를 전시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