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하반기 책 결산 (1)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 책을 산지는 사실 꽤 오래 되었다.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 묵은 책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추천 받아서 사놓고 막상 읽지는 않았던 건 책의 내용이 그렇게 긴급하게 궁금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작법서도 아니고 문학 비평도 아니고 굳이 분류하자면 소설론인데, 소설론을 모른다고 소설 읽는 재미가 덜한 것도 아니니 아무튼 궁금해졌을 때 읽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내버려뒀던 책을 올가을에 갑자기 읽게 된 계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최근 웹소설에서 자주 접했던 서술 트릭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 둘째는 지난 일 년간 쌓은 2차 창작의 경험 때문에. 이게 쓰다 보면 나도 더 재밌게 쓰고 싶은 욕심이 나고, 그 과정에서 내가 과거에 읽었던 여러 소설의 기법을 이리저리 차용하고 있다는 자각이 드는데, 구체적으로 내가 뭘 갖고 오고 있는지는 언어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설명을 찾고 싶었다.
이 책은 현대(근대 리얼리즘) 소설이 플로베르에게서 정립되었다고 보고 그가 정확히 어떤 기법을 정형화했는지 설명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주인공의 시선이 마치 카메라처럼 주위를 한 바퀴 돌며 풍경을 서술하는 방식이다. 이때 나열되는 세부사항은 결코 무작위하게 선택되지 않는다. 독자가 이 소설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숙지해야 할 정보들이, 작가의 미적 감각으로 배열된 문장을 타고 전해진다. 이는 등장인물의 눈을 빌렸을 뿐 틀림없는 작가의 개입이고 독자는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 관찰이 전지적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등장인물의 시선과 가치관과 어투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이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약속된 줄다리기다.
(한편 이 풍경 서술에는 때에 따라 크게 필요하지 않은 세부사항이 함께 섞이기도 한다. 현대 소설의 기법에 익숙해진 우리는 이런 불필요한 묘사로 글 길게 늘이는 짓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불평하지만 동시에 그 묘사 없이는 소설의 균형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현대 소설에서 묘사는 마치 충전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 소설 속 인물은 항상 독자에게 다 보여지지 않은 내심을 가질 것으로 여겨진다. 이전 시대의 문학과 비교해보자면 성서 속 인물에겐 사생활이 없다. 구약성서의 다윗이 자기 내면의 생각을 혼잣말로 이야기하진 않는다. 그의 독백은 신을 향한 기도이며 그는 신을 향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중세 기사도 문학 속 등장인물이 대사로 다 말해지지 않은 속내를 남몰래 갖고 있으리라곤 보통 생각되지 않는다. 혼자 남겨진 상태에서 / 자기 내면을 문장의 형태로 떠올리며 / 그걸 작품 너머의 독자에게 전달하는 서술 방식은 근대 이후에 정형화된 것이다. 현재 우리가 쓰는 SNS, 일기, 하물며 지금 이 글조차도 모두 청자를 상정한 독백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분이 묘하다. 만일 우리에게 성서와 중세 문학만이 주어졌다면 우리의 문화와 사고 방식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까?
현대 소설을 읽다보면 기법이라고 인지할 틈도 없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서술적 장치들을 (주인공 첫 등장 쓰고.. 사건 전개 쓰고.. 중간에 과거 회상씬 한번 쓰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고..) 이론적으로 뜯어볼 수 있어서 재밌었고, 또 문득 생각나면 두고두고 읽어볼 책.
햄릿 스쿨
2022년에 국립극장에서, 그리고 2024년에 홍익대 아트센터에서 한 번 더 막을 올렸던 『햄릿』의 드라마트루크를 맡았던 박철호 연출가가 드라마트루기 노트를 책으로 냈다.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연극은 각본집이 잘 나오지 않고 (N차 관람객에게 증정으로 주는 일은 있어도 판매는 좀처럼 되지 않는다) 드라마트루기 노트는 더더욱 귀한데, 안 그래도 배삼식 각본과 손진책 연출의 『햄릿』을 너무 사랑해 이 극만 열 번 가까이 봤던 사람으로서 도저히 사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트루기도 사실 단어만 많이 들었지 제대로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읽으면서 가장 속이 시원했던 파트는 역시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없었던 연출에 대한 해설. 나는 22년과 24년의 『햄릿』을 모두 봤기 때문에 두 시기의 차이가 눈에 더 잘 들어왔는데, 가령 극중극 배우들과 선왕 햄릿의 유령이 (해당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인데도) 무대 주변에 종종 자리하며 관찰자 역할을 하는 건 24년에 새로 추가된 연출이었다. 하지만 트위터를 아무리 뒤져도 해당 연출의 의미를 알려주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고… 이런 부분은 아마 이 책이 아니었다면 영영 이해하지 못했겠지.
마침내 알게 된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햄릿』은 죽음의 연극이다. 성벽을 지키는 초병들의 대화로 극이 시작되는 원전과 달리 배삼식 각본의 『햄릿』은 극중극 배우들이 직접 막을 연다. 이때 배우들의 대사 “멀리서 종이 울린다. 이제 산 자는 잠에 들고 죽은 자 눈을 뜨는 때”에서도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이 대사를 통해 산 자, 즉 관객의 세계는 잠시 닫히고 죽은 자, 『햄릿』의 등장인물들이 눈을 뜬다. 그리고 이 대사를 내뱉는 극중극 배우들은 이승(관객석)과 저승(무대)의 경계에 자리하며 두 세계를 잇는 일종의 영매 역할을 한다. 그걸 연출로 보여주기 위해 극중극 배우들이 무대 주변에 계속 앉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햄릿』의 등장인물들은 극중극 배우를 제외하면 모두 사령이며, 특히 극이 시작될 때부터 이미 죽은 자인 선왕 햄릿의 유령은 시작부터 끝까지 무대를 바깥에서 지켜보며 죽음으로서 삶에 관여한다. 이런 맥락을 알고 나면 막이 내릴 때의 대사 “멀리서 종이 울리네⋯. 이 기나긴 광대놀음도 이제 끝인가.” 도 다소 다르게 읽힌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막연히 상상만 하던 예술 세계와 실제 현장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였다. 이 책은 원전 『햄릿』의 해설서가 아니라 배삼식 각본과 손진책 연출 『햄릿』의 드라마트루기 노트이기 때문에 실제로 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타협하거나 뭉개고 넘어갔던 부분들, 그리고 드라마트루크로서 저자의 사견도 적나라하게 남아 있다. 가령 나는 폴로니어스가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오필리어가 햄릿과 만나지 못하게 단속하고 레어티스에게 기나긴 조언을 해 줬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고, 오필리어 역의 루나 배우가 연기의 어려움을 토로했을 때 ‘그런 얘기를 하기엔 너무 늦었는데…’ 싶어 적당히 달래고 넘어갔다는 파트에선 조금 놀랐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듬어 나올 것 같았던 세계에서 이렇게 현실과 타협하는 부분들이 보일 때 왜 이리 생경한지. 읽으면서 재미와 함께 약간의 혼란도 남는 책이었다.
행간의 햄릿
한창 『햄릿』에 꽂혀 있던 시기에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의 대학출판부 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800p 가 넘는 학술서라 앞부분 몇 페이지만 읽어보고 책 구매 여부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저자인 강태경 교수님이 셰익스피어 연구자이자 연극학자로 두 차례에 걸쳐 이화여대 강의우수교수로 선정된 바 있다는 설명을 보고 구매했다. 강의 잘하는 교수님이 자기 연구 분야를 이 두께로 설명해 주는 책은 만나기 쉽지 않으니까.
위에서 다룬 『햄릿 스쿨』이 실제로 극을 올리는 현실적인 과정을 다뤘다면 <행간의 햄릿="">은 정말로 원전 『햄릿』에 대한 해설서다. 『햄릿』이 도대체 왜 그렇게 유명하고 오래 회자되는지, 『햄릿』이 쓰인 시대적 상황은 어떠하며 그 안에서 『햄릿』은 어떤 의미를 가졌었는지를 대사 하나하나 뜯어서 설명해 준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별이 불타지 않는다 의심을 해도, 태양이 움직이지 않는다 의심을 해도"를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어디서 이런 낡아빠진 멘트를 가져왔나 싶지만 사실 이 문장은 천체물리학적 발견을 연애시의 영역으로 집어넣는 동시에 지동설을 억압하던 당대 종교 권력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교황청에 의한 지동설의 공식적 이단 선언이 1615년이었고 『햄릿』이 쓰인 건 그보다 십여 년 전인 1601년으로, 지동설은 그 당시에 꽤나 민감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햄릿』이 쓰인 시대가 전반적으로 그렇다. 신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서 차츰 벗어나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려는 르네상스 시기.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도 동시대라 볼 수 있는 1637년에 나왔다.행간의>
같은 맥락에서 선왕 햄릿의 ‘유령’이 갖는 의미도 재밌다. 현대인 입장에선 사실 유령이나 악마나 아무튼 괴기스러운 존재로 비슷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수백 년동안 연옥을 인정해온 가톨릭 체제에서 연옥 인정을 금하는 프로테스탄트 체제로 넘어간 당시의 종교적 배경에서는 선왕 햄릿을 유령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가 극작가의 목숨을 가르는 아주 첨예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햄릿은 선왕 유령의 말을 굳건하게 믿으면서도 그가 악마라는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자칫하면 종교 재판에 회부될 수 있는 이 주제에 대해 거의 묘기에 가까운 재주를 보이며 논란을 피해간다.
이 외에도 『햄릿』에는 많은 게 녹아 있다. 4막 3장 햄릿의 대사 “인간은 동물을 잡아먹고 자신은 구더기한테 먹힌다. 그 구더기는 새가 먹고 그 새는 거지가 먹을 수 있으니 왕도 거지 뱃속에 들어갈 수 있다.”에서 구더기는 사실 종교 개혁 시기에 마르틴 루터가 내세운 새로운 신학의 이단 여부를 판명하고자 했던 청문회의 이름 Diet of Worms 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햄릿과 로젠크란츠/길덴스턴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행운의 여신”은 사실 1600년대 초 셰익스피어가 있던 극단과 경쟁 관계였던 포춘 극장을 가리키는 부가적인 의미가 있다. 주제에 걸맞는 말장난, 당대의 사회비판과 그 시대 관객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유머 코드를 다 챙기면서 본인의 연극론도 얘기하고 줄거리만 놓고도 몇 백년을 얘기할 수 있는 작품을… 어떻게 쓴 걸까? 이러니까 800p 넘는 해설서가 있어야 『햄릿』의 대사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거 아닐까?
『햄릿』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싶은 사람에겐 꼭 있어야 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원전에서 오필리어와 거트루드 같은 여성 인물의 서술이 썩 성숙하지 못했던 점도 분명하게 짚고 가기 때문에 같이 화내줄 책을 찾는 사람에게도 좋은 선택이 될듯.
요람 행성
박해울 작가의 첫 SF 단편집. 역시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구매했다. 사실 박해울 작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트위터에서 모래인간 작가님의 영업만 보고 샀는데 생각보다 취향에 잘 맞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들었다. 어떤 점에서 그랬냐면… 읽는데 심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오타쿠를 가슴 뛰게 하는 화려한 오케스트라보다는 산뜻한 티타임에 가까운 SF. 내용이 심심하다는 얘기는 아니고, 판타지적 요소도 많고 읽으면서 정말 순수하게 재미있는데 그 재미가 나를 피로하게 만들지 않는다. 주말에 집기에 참으로 적절한 책. 세계관 안에서 발생한 종교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도 나에겐 플러스 요소였다.
리아의 나라
뇌전증을 앓던 몽족 아이 리아의 치료를 두고 리아의 부모와 미국 의료 체계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정리한 책. 글감에는 발매일이 2022년으로 나오지만 실제 원서는 1997년에 쓰였고 국내에는 2010년에 첫 소개가 되었다. 22년에 나온 건 이후의 개정판이다. 책이 쓰인 시점으로부터 약 30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리아의 사례는 이미 우리가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으로 자리잡았다. 미국 전역의 의대에서 이 책을 필수 교양서로 지정한 건 물론, 2000년대에 한창 유행했던 미국 메디컬 드라마에서도 리아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에피소드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워낙 복잡한 사건인만큼 고증이 잘 되어 있진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미국의 의료 체계에서 뇌전증은 치료의 대상이지만 몽족에게 뇌전증은 신성의 증거, 치 넹(무당)이 될 수 있는 자질로 여겨진다. 몽족에게 치 넹이 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소명이다. 그래서 리아의 부모는 자식들 중에서도 뇌전증을 앓는 리아를 가장 예뻐하고 신성시한다. 의사들은 리아에게 처방대로 약을 먹이지 않는 부모를 아동학대로 간주해야 할지 갈팡질팡하지만, 리아의 부모는 처방의 내용은 물론 이 처방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유도 이해할 수 없다. 몽족 사람들은 외과 수술을 금기시하고 아기가 태어나면 태반을 집 앞에 묻어야 아이가 건강하게 자란다고 믿는데, 미국 의사들은 산모가 위험하면 얼마든지 제왕 절개를 할 준비를 하고 있고 태반을 달라는 요청도 꺼림칙해서 웬만해선 들어주지 않으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몽족 전통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미리 앞서 거론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모욕이다. “돌아가시고 나면…” 이라는 말은 해선 안 되고 대신 “120세가 되실 때쯤…” 이라고 말해야 한다.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뜻으로 곧 환자 분이 돌아가실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몽족 보호자는 의사가 환자를 죽이려 든다고 이해해 공포에 질린다. 그래서 리아의 부모는 그 상황에서 아이를 안아 들고 병원 밖으로 도주를 시도했고, 부모가 아이의 치료를 방해한다고 판단한 간호사는 코드 X를 발동했다.
이런 상황이 한두번이 아니다. 문화의 차이라고 간단하게 퉁치기 어려운 온갖 맥락이 겹쳐 리아의 삶에 여러 궤적을 남겼다. 차라리 당시 의사들의 대응이 미숙했고 현재는 리아의 사례를 통해 가이드라인을 세운 덕에 한결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다. 의사들에겐 본인이 아는 지식을 행할 의무가 있다. 이 약을 당장 안 먹이면 위험해질 걸 아는데, 이 약을 먹이지 않고 상황을 해결하는 플랜 B는 배운 적도 없고 확실성을 장담할 수도 없는데 약을 처방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서양권 의사가 가장 중시하는 건 환자의 생명이다. 반면 몽족 사회에선 때로 삶보다 ‘혼’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를 존중해 몽족 환자에게 약을 처방하지 않는 게 가능하다면, 같은 이유에서 안락사 합법화도 논의할 수 있는 걸까? 또 여전히 남자 어른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몽족 문화권의 환자를 대할 때 의사 본인의 신념 체계 (이를테면 페미니즘 관점에서 환자는 아내인데 치료는 남편과 논의해야 할 때의 불쾌감) 를 어디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걸까? 끝까지 읽으면서도 답이 명확해지기보다는 점점 더 생각이 많아지는 책이었다.
몽족 환자들의 요청을 모두 들어줬던, 그래서 몽족 사회에서 압도적으로 환영 받았던 로저 파이프라는 한 산부인과 의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의사들 사이에서는 그리 유능하다 평가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의사의 이야기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