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하반기 책 결산 (2)
과학기술의 일상사
과학도 기술도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점점 벗어나는데 일상 생활에서 차지하는 중요도는 한없이 높아만 간다면, 앞으로는 이 과학/기술을 어떤 태도로 바라봐야 하는가?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이라는 팟캐스트에서 두 명의 연구자가 이 주제로 4년간 이야기했던 내용이 책으로 나왔다. 제목 때문에 역사책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고, 위에는 발매일이 2023년으로 나오지만 정확히는 2018년에 출간된 책의 개정증보판이다.
이 책은 과학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면모를 꽤 폭넓게 다룬다. 왜 과학대중화는 너무 당연하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고 국립OO과학관은 무조건 좋은 시설로 여겨지는가부터 다들 연구개발을 만능 해결책처럼 여기지만 현실은 얼마나 지지부진한지까지. 책의 205p에서 소개된 ‘2015년 재난 및 안전관리기술 개발계획’이 후자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일 텐데, 세월호 사고 이후에 발표된 이 계획은 이미 그 이름부터 허망하기 짝이 없지만 주요 전략에 맞춤형, 피해 저감, 선제적, 효율화 등의 키워드가 포진된 걸 알고 나면 더욱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문서에 맞춰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저런 단어들은 실무 방향을 잡는데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의미있는 일을 하고자 할 땐 항상 발목을 잡는다. 게다가 이 연구를 실제로 수행하게 될 하청의 하청, 곧 대학원생의 일상까지 내려오면 환상은 한층 더 퇴색된다. 대학원생이 직접 쓴 책답게 연구자의 고충과 애환도 빼놓지 않고 다루고 있어 그것도 또 하나의 재미 포인트.
’과학이 실은 얼마나 정치적인가’ 하는 문제 제기는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나의 1960년대』에서 처음 접했던지라 간만에 그 책도 꺼내서 같이 읽었다. 이것도 무척 재밌는 책이라는 말을… 덧붙이려고 했는데, 조금 전 알라딘에서 검색해 봤더니 현재는 절판 상태다. 그리고 중고판매가가 정가의 두 배를 넘어섰다. 이래서 좋은 책은 사고 봐야 한다.
아이덴티티
우리가 속한 집단이 우리의 정체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다루는 사회심리학 책. 이런 주제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굳이 구매까지는 권장하지 않는다. 추천사 목록에서도 눈치챌 수 있다시피 교양 심리학과 자기계발/경영/리더십 사이에 발을 걸치고 있는 책이고 이 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빛나는 통찰도 크게 없었다. 하지만 생각 정리를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됐다. 요즘 느끼는 건데, 자기계발서도 가끔은 나쁘지 않다.
영화도둑일기
역시 2024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구매. 올해 꽤 많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탄 책으로 알고 있다. 눈길을 끄는 제목도 제목이지만 책의 표지 디자인, 내지 재질, 서체, 편집까지 내용과 정말 찰떡이다. 아직 전자책이 안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나온다면 꽤 상징적이긴 하겠지만) 전자책이 나오더라도 종이책으로 읽어보는 걸 권한다. 이런 물성 때문에라도 우리가 종이책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다.
이 책은 정말로 영화를 훔치는 사람들의 일기다. 이젠 어디 가서 언급조차 하기 힘든 토렌트 불법 공유를 여전히 행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와 거기서 일어나는 이야기. 대부분 상업적으로 구할 경로가 없는 실험영화들 위주긴 하지만, 어쨌건 ‘따지자면’ 불법이라는 건 저자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고 딱히 이 행위를 옹호하거나 방어하려는 태도를 취하지도 않는다. 그런 윤리적 판단은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저자는 그저 현재를 이야기한다. 이런 시장이 이미 존재하며, 이 안에도 문화가 있고, 실은 씨네필과 해적 사이에 그리 구분선이 명확하지 않다는 말을.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무래도 인터넷에 씨네스트를 검색해 보게 된다. 최신 유행은 그다지 따라가지 않은 듯한 정직한 게시판 형태 UI 가 은근히 정겹고, 세상엔 내가 모르는 (앞으로도 영영 모를) 영화가 정말 많구나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 멋도 모르면서 아주 많~은 매체들을 ‘컨텐츠’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 떠드는 건 조금 우스운 일이다.
필로우맨
『쓰리 빌보드』, 『이니셰린의 밴시』 로 유명한 마틴 맥도나의 희곡. 그저 저자 이름이 익숙해서 여행길에 가볍게 집었는데 부산에서 서울 올라오는 SRT 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이니셰린의 밴시』도 감독 본인이 쓴 희곡을 각색해서 만든 영화였으니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하반기에 읽은 책 중 가장 강렬한 걸 꼽으라면 이게 아닐까.
마틴 맥도나는 정말이지 천재다. 당신이 누구든 어떤 근심 걱정 고민이 있었든 간에 『필로우맨』만 있으면 두 시간동안은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정말 큰 파도였다. 얼굴을 까먹을 지경이었던 지역 직장인 독서모임이 다시 뭉쳤고, 좀처럼 독서 궤적이 겹치지 않던 친구들이 간만에 같은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눴다. 물론 잠깐뿐이었지만. 당장 나만 해도 한강 작가님 책을 세 권을 샀는데 아직 하나밖에 읽지 못했다. 전에는 한국 소설에 대한 막연한 무관심 때문에 손이 안 갔다면, 이제는 작가님이 독자를 어디로 데려갈지 아니까 섣불리 손대기가 어렵다.
책을 읽는 내내 경외감이 들었고, 약간은 두렵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 폭력을 매 순간 직시하고 살면서 부서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사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지 않나? 우리가 모른 척하고 사는 폭력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극지방의 빙하가 너무 빨리 녹고 있어 이대로 가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뉴스를 보면서도 내 일상을 살고, 가자 지구의 참상을 SNS에서 실시간으로 접하면서도 내 일상을 살고,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곳이 아주아주 많다는 걸 알면서도 매순간 내 일상을 더 우선시하는 선택을 하고 있는데. 내 일상이 지켜져야 지치지 않고 장기전 할 수 있다고 모두가 말하지만 (또 그게 맞다는 걸 경험으로 알지만) 그럼에도 내가 ‘눈을 돌렸다’는 인식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데, 이 분은 마치 다른 선택지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하염없는 직시를 하고 계셔서 그게 정말 존경스러운 동시에 아득했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책이지만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 사건이 얼마나 참혹했는가보다는 그런 과거를 있는듯 없는듯 묻어버린 채 사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이야기한다고 느껴졌다. 『4·3, 19470301-19540921 - 기나긴 침묵 밖으로』도 2024년 도서전에서 구매해서 아직 못 읽은 채로 집에 있는데, 아마 그 책을 다 읽더라도 『작별하지 않는다』만큼 힘들진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예상이 간다는 지점에서 다시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