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겨울의 책 결산 (1)
감정, 이미지, 수사로 읽는 클래식
메시앙의 『새의 카탈로그』는 프랑스의 해안, 절벽, 숲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채보한 77종의 새소리를 모티브로 작곡된 피아노 모음곡으로, 곳곳에 등장하는 종달새와 나이팅게일의 지저귐은 비발디, 헨델, 글린카의 새소리들과는 매우 다른 느낌을 준다. 심지어 메시앙이 새소리를 채보한 계절, 날짜, 시간, 장소가 워낙 다양해서 같은 종의 새소리라도 아침, 오후, 밤, 강기슭, 해안 절벽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린다. 뿐만 아니라 메시앙은 끊임없는 정박으로부터 달아나는 자연의 새소리 리듬에 주목하여 인도의 리듬 체계인 Tala(음가들을 중간에 자유롭게 추가하거나 빼버림)를 활용하여 더 자연에 가까운 리듬을 만들어냈다.
시대를 풍미한 여러 작곡가와 가장 유명한 곡, 곡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끝나는 클래식 입문서 말고 좀 다른 걸 읽어보고 싶어서 이것저것 찾다가 우연히 샀던 책. 책의 내용은 좋았으나 책의 타겟층이 무척 좁고 나는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5
나무에 붉고 노란 띠가 묶이기 시작했다. 이식할 나무들을 표시해 두기 위해 묶어둔 띠였다. 둔촌주공아파트에서 공식적으로 이식된 나무는 2,800여 그루였다. 그 숫자만 보면 정말 많은 나무가 살려진 거 같지만, 단지 안에는 3만 그루가 넘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식된 나무는 8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펜스 안쪽 자투리 땅으로 이식된 나무들은 모두 고사했고, 단지 뒷편으로 옮겨진 나무들은 몇 번의 계절이 지나도록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다들 나무를 이식하는 것보다 벌목하는 게 더 싸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다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환경영향평가에서 지정하여 이식된 나무 외에도 수형이 정말 아름다운, 돈이 될 만한 나무는 농장 같은 외부 업체에서 크레인까지 동원하여 옮겨가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재건축 조합에서는 둔촌 습지를 지키기 위한 제대로 된 대안을 마련하지 않고 끝까지 동문서답을 이어가며 모르쇠로 버텼다. 저 글을 쓴 이가 조합의 그런 태도를 계속 마주하고 있어야 했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분노와 허탈함, 그리고 무력감이 크게 들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 애쓴 이들의 노력이 이렇게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그 기록을 통해 수년 후에 내가 다시 그 내용을 살펴보고 있었고, 또 그것을 다른 기록으로 남기는 지금 이 원고가 이어지고 있다. (중략) 기록으로 남은 그분의 노력을 보고 내가 허무와 우울을 이겨낼 용기를 얻었던 것처럼 내가 남기는 기록이 또 누군가에게는 다른 방식의 응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게 기록이 갖는 힘이고 가치일 거라고, 기록을 남겨 놓은 누군가의 노력 역시 헛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보곤 했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시리즈의 이름은 꽤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대중 교통의 설계, 주택의 역사 등에 관심이 많은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 집에서 1권 또는 2권을 봤던 기억이 있다. 나는 주택의 역사보다는 주택에 애정을 갖고 마는 인간사에 관심이 있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꼭 마지막엔 집에게 인사를 하게 된다. 이제 다시 만날 일은 요원하니까. 살아 숨쉬는 생명체보다 그 자리에 영원히 있을 것처럼 보이는 부동산에(!) 더 안정적인 애정을 느껴왔던 사람으로서 비슷한 톤의 이야기에 늘 관심이 있었고, 마침 5권이 시리즈의 마지막이라기에 기념처럼 사 봤다. 5권은 둔촌주공아파트 자체보다는 이 집과 자신의 원고를 떠나보내는 저자의 심정이 더 길게 나온다. 그래서 더 취향에 맞았는지도.
짐을 끄는 짐승들
인간 자신도 동물이라는 이해는 여러 학문 분과에 걸처 보편적으로 구축되었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불편함과 거리두기가 남아 있다. 인간은 양쪽을 모두 원하는 거 같다. 우리는 동물이지만 동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해부학과 생리학 실험에 다른 종들을 대신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동물이다. 우리는 진화 계통도를 거슬로 올라감으로써 ‘인간 본성’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만큼 동물이다. 우리는 인간이 일으킨 최악의 행위를 ‘동물적 본성 때문’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동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의 정체성을 동물로 여기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로 동물이 아니다. 동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욕이다. 어떻게 이런 역설이 생겨났을까? 어떻게 우리는 동물이면서 동시에 동물이 아닐 수 있는가?
폴란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서 ‘편의를 제공’받아야만 하는 것에 ‘불편’을 느낀다. 이것이 그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는 것은 그의 특권을 나타내는 뚜렷한 증거다. 사교적 편안함을 중단하고 편의를 요청하는 것은 장애인들이 항상 해야만 했던 일이다. 친구들이 가고 싶어하는 식당에 경사로가 없어서 거기에 가려면 누군가가 자신을 들고 옮겨줘야 하는데도 갈 것인가? 포크를 입으로 잡거나 포크 없이 먹는 대신 그 식사 자리에서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아니면 ‘동물처럼’ 먹지 않기 위해 포크를 손으로 잡고 먹을 것인가? 우리가 토론자로 초대받은 공간이 인식되지 못한 특권과 비장애중심주의가 만연한 곳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까? 다수의 장애인에게는 저녁 식탁에서의 예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저녁 식탁에 있을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다. 설령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사회적으로 편안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에 얼마나 큰 가치를 부여하는가? 그리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에 얼마나 큰 가치를 부여하는가?
만약 고기에 대한 욕망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면, 우리가 사는 방식을 질문하고,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도덕적 삶의 진전을 반영하기 위해 우리의 습관을 바꾸는 것 또한 ‘인간 본성’을 구성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더 나은 존재, 더 진화한 존재로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 중 하나가 이런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힘인 것이다.
읽으면서 다이어리에 옮겨 적었던 문장은 훨씬 많지만 그걸 다 옮겨올 필요는 없을 거 같고… 읽는 내내 책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동물권은 동물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장애 인권과 이어지고, 장애 인권 역시 장애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탈자본주의의 대양으로 멀리멀리 흘러나가 다시 각종 사회적 문제와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풍경이 아름답다. 그리고 발췌한 두 번째 문단에서는 많이 뜨끔했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 그게 가능했다는 것부터가 이미 특권이라는 걸 저 문단에서 처음 생각해 봤다. 그리고 집단을 불편하게 만드는, 무책임하게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는 왜 그리도 가혹한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어린이
할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추억이 있다는 건 좋아. 현재가 항상 최고는 아니거든. 이런 게 바로 칼레와 할머니의 차이였다. 칼레에겐 오늘 일어난 일, 친구와 약속한 일, 그리고 어떤 것을 경험했거나 계획을 세우거나 하는 등의 일만이 중요했다.
다양성을 굳이 나다움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아쉬움이 있다. ‘나다움’이라는 말에는 다양성의 가치가 축소된 느낌이 있다. ‘나다움’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 자신에게서 완성되는 자기긍정을 우선 가리킨다. 하지만 다양성은 나의 ‘나다움’과 너의 ‘나다움’이 공존할 때 가능하다. 다양성을 이상에 그치지 않게 하는 구체적인 실천은 모두의 ‘나다움’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차별을 반대하는 것에 있다. ‘나다움’이라는 말에는 그 치열한 싸움이 잘 드러나지 않는 듯하다. 게다가 ‘-답다’라는 접사는 현대에 비판적으로 사유되는 근대철학의 자기동일성 개념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소수자인 어린이의 ‘나다움’은 당연히 다양성의 투쟁이 된다.
왜 나는 아니야? 다른 애는 아무 이유 없이 좋아하면서 왜 나는 좋아하지 않아? 나는 너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슬프고 절망적이다. 제목처럼 ‘내가 더 잘할게’라고 애원해 봤자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서로 마음의 크기와 방향이 달라 상심하게 되는 일은 어린이에게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벌어진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함께 놀고 싶은 친구는 내게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요요는 눈물을 그친다. 슬픔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가면 울음은 잦아드는 법이고, 그건 요요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끓여준 따뜻하고 하얀 감자 수프를 먹고 나자 요요는 ‘그건 후우의 마음’이라는 답을 찾는다. 슬픔은 여전하지만 이제 후우가 밉지는 않다.
작년 도서전에서 샀던 아동문학 평론집. 읽는 내내 좋은 아동문학을 많이 추천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직도 왜 그렇게 어린이책이 좋은지 모르겠다. 『마틸다』의 이야기는 여전히 신이 나고, 집에 있는 교원명작시리즈에서 『소공자』나 『쿠오레』 등을 다시 펼치면 감동이 이루 말로 못한다. 동화책에만 등장하는 용감한 어린이 상이 그리운 건지 이걸 읽던 시절에 내가 품었던 환상이 그리운 건지 알 수 없지만… 발췌한 세 번째 문단은 굳이 요요의 심정까지 헤아리지 않아도 마음이 아렸다. 어른도 그건 마음 아파…
여담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작가이자 사회활동가였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게 흥미가 생겨서 리디북스 장바구니에 린드그렌 전기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도 담아 두었다. 도서관에도 있길래 잠깐 훑어봤는데 1. 재밌는 책인 건 확실하고 2. 하지만 하드커버 벽돌책이라 많이 무겁기 때문에 이건 꼭 전자책으로 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
이건 정말 시대별 정치사상사 요약본 같은 책이라, 앞에 있던 그 어떤 책들보다 메모는 많이 해 가며 읽었지만 블로그에 발췌해 올 만한 건 없다. 이거 읽고 나면 19세기 배경 대체역사소설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했는데 슬프게도 그런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웨트 : 땀, 힘겨운 노동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에 가서 우리를 파괴하는 게 죄책감이나 막연한 분노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건, 우리가 아주 사라져버릴 때까지 우릴 갉아먹는 건 수치심이라는 거야.
당신 이 일에 엄청 시간을 썼어. 그런데 지금 봐봐. 여태 이 얘기를 해왔잖아. 그리고 얘기는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어. 그런데, 자네가 지금 있는 그 자리에 대해서는 무엇을 할 건가 말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작가의 완성도 높은 희곡이라는 설명과 책 제목만 보고 바로 구매했다. 요즘 희곡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다. 똑같이 캐릭터가 등장하는 장르지만 서술자가 기교를 부릴 여지가 아주 많은 소설과 달리 인물이 직접 말로 해야만 이야기가 전개되는 희곡 특유의 매력이 있다. 특히 『스웨트』의 경우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공장 노동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인물의 사회적 계급을 드러내기 위해 대사가 많이 거친 편이고, 그로 인해 텍스트에서 전해지는 현장감이 대단하다. 두 시간선을 오가는 비선형적 전개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몰입해서 읽었다. 짧지만 강렬하고, 비극적이다.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인천공항 정규직은 좋은 일자리다. 왜 좋은 일자리인가? 왜 다른 일자리는 그럴 수 없는가? 공기업이 우리 사회에서 좋은 일자리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 펜으로 진입하는 안온한 세계와 나머지 허허벌판으로 구성된 이 체제는 지속 가능한가? 너무 많은 울타리 밖 동료 시민을 배제하지는 않는가? 정규직의 사전적 의미는 사측과 직접, 기한의 정함이 없는 근로 계약을 한 풀타임 노동자다. 한국 사회에서는 가파른 호봉 상승과 후한 복리 후생, 그리고 간판이자 신분이다. 문제는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현대차 노조 정도 되면, 기업 내부의 플레이어로서가 아니라 산업의 전환기를 책임지는 주체로서 나서야 한다. 쓰러져 가는 부품사들을 위해 정부의 개입과 지원을 어떻게 끌어낼지 고민했다면, 정년 연장은 나올 수 없는 요구다. 그야말로 등 따신 사람들이 난로까지 껴안겠다는 얘기다. 한국 노동자들의 비극이다.
나는 진보가 싸워야 하는 전장이 있다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경쟁의 결과가 똑같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격차가 너무 크면 모두가 경쟁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경쟁 자체가 사람들을 구속하는 힘이 커진다. 이러면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기 어렵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격차를 그대로 둔 채 일부만을 성벽 안으로 밀어넣는 방식이다. ‘결과의 평등’까지는 아니어도 결과가 구속하는 힘을 줄일 필요가 있다.
시사인 기자였던 저자가 취재 생활동안 만났던 노동 현장에 대한 책을 썼다.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부터 쿠팡, 배민, 우버 등의 플랫폼 노동자, 프랜차이즈 점주와 아르바이트 직원의 관계 등 그동안 제도 내의 노동자로 집계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책이 정말 잘 읽히고 (독서모임에서 읽었는데, 책이 잘 읽힌다는 건 나뿐만 아니라 모두의 의견이었다) 이 주제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입문서로 권할 만하지만 연공급을 없애고 직무급으로 나아가자는 마지막 결론 부분은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나는 직무의 전문성에 가치를 매길 수 있다는 것에 굉장히 회의적이라… 그건 결국 시장의 판단에 맡기자는 말과 다르지 않고, 연공급의 대안으로 나올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디 임플로이
지금부터 몇 달, 몇 년, 몇 세기가 지나면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게 누구더라? 잊고 있었네. 신경 쓰지 마. 가방에 집어넣고 예비 부품은 보관해.’ 저도 이젠 알았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느끼기 시작하면 당신들이 얼른 우리를 밀어넣고 싶은 곳에 넣는다는 사실을요. 그런 다음 우리를 샅샅이 다시 점검하지요. 그런 점검에 반대하는 건 저 혼자가 아닙니다. 저는 사실 그 점검을 완전히 중단시키고 새로운 업데이트 일정이 정해질 때마다 우리를 대표해 회의에 출석시키라고 요구하는 이들을 상당수 알고 있습니다.
이 협의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으시다? 나는 당신들이 나를 내려다본다고 생각해.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집을 한 채 지은 어떤 가족이야. 지금 당신들은 그 집의 따뜻한 방 안에서 쏟아지는 비를 내다보고 있지. 위험에서 안전하게 비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당신들은 젖지도 않았고 아늑해. 당신들은 오랜 개선 과정의 보상을 누리고 있어. 폭풍이 친다 해도 즐거움만 더해질 뿐이지. 나는 당신들이 스스로 절대 맞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그 빗속에 서 있고 그 비와 하나가 돼. 내가 바로 당신들이 피하고 있는 그 폭풍이야. 당신들은 오로지 날 피하려고 이 집 전체를 지은 거야. 그러니 나한테 와서 내가 인간의 삶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하지 마.
2021년 부커상 최종 후보였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수상 후보에 올랐던 SF 소설. 저자가 소설가이자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 아- 납득되는 부분이 있었다. 책의 장르가 소설과 희곡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느껴지는데, 텍스트 구성 자체가 마치 인터뷰집처럼 되어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우주선의 배경과 상황을 구체적으로는 끝까지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많은 것이 모호함과 상징 속에 남은 채로 끝난다. 물론 그래서 더 강력해지는 이야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