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비창작

우리가 스크린 세계에서 그래픽, 소리, 움직임이라 여기는 것은 한낱 얇은 외피일 뿐이고, 그 아래에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언어가 존재한다. 내가 비행기에서 겪었듯 때로 외피에 구멍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잠시나마 그 덮개 밑을 엿볼 기회를 얻어 디지털 세계, 즉 이미지, 영화와 동영상, 소리, 글 정보가 언어에 의해 작동함을 목격한다. 음악, 동영상, 사진 같은 모든 바이너리 정보는 언어, 즉 끝도 없는 로마자와 숫자 코드로 구성된다. (중략) 그것은 모두 글이다. 우리가 바로 그 코드를 문학 비평이라는 시점으로 구성하고 읽는다면, 지난 수백년동안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 글쓰기가 코드처럼 임의적으로 보이는 문자 배열이 지닌 예술적 가치를 보여줬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일상의 동선을 그려보면, 우리는 거의 벗어남 없이 아는 것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집에서 일터로, 거기서 체육관으로 대형 마트로 이동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다음날 일어나 같은 일과를 반복한다. 상황주의의 주요 인물인 기 드브르는 그런 일과에서 벗어나 표류 형식의 휴가를 보내자고 제안한다. 표류는 특정한 의도 없이 도시공간을 의도적으로 돌아다니면서 스펙터클이자 극장, 즉 도시에 자신을 맡김으로서 도시적 경험을 회복하려는 행동이다.

심리지리는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누군가는 특정한 감정에 따라 대안적 도시 지도를 만들 수 있는데, 예컨대 파리를 구가 아니라 자신이 눈물을 흘렸던 모든 장소에 의거해 지도화할 수 있다. (중략) 우리의 도시적 이동 행위가 친숙한 만큼이나 우리의 사이버 말잔치도 똑같이 규정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는 같은 웹페이지, 블로그, 소셜 미디어 사이트를 보고 또 본다. 그러나 웹 서핑 시간을 표류로 본다면, 우리는 무작위로 하나의 링크에서 다른 링크로 연결해 이런 습관을 깰 수 있다.

지난 10년동안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출현하고 계속해서 연출된 시트콤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라. 우리의 온라인 삶도 강박적인 기록화를 통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초창기의 웹캠부터 오늘날의 속사포 같은 트윗까지, 미미해 보이고 덧없는 몸짓과 표시를 축적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특정한 개념을 구사하고 투사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와 모종의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강박적 속성을 지닌 자서전 작가가 됐다.

대충 어떤 내용이 나올지 알고 있었고 그 방향대로 유려하게 잘 흘러갔기 때문에 좋았던 책이 있는 반면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고 내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결과적으로 마음에 드는 책이 있다. 전자의 대표 격이 『짐을 끄는 짐승들』이라면 후자의 대표가 『문예 비창작』이다. 서점에서 제목만 보고 샀는데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이 하고자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현대 미술에서는 앤디 워홀이 등장해 기성 이미지를 복제하고 재창조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주장했고, 현대 음악에서는 존 케이지가 등장해 우연한 소리의 집합도 음악이 될 수 있음을 주장했는데, 문학은 왜 그런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가? 어째서 문학은 여전히 생성자와 소비자라는 낡은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텍스트에 고유한 진정성을 요구하는가? 저자는 대학에서 『비창조적 글쓰기』라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고 학생들에게 최대한 비창조적으로 - 그러니까 오로지 존재하는 텍스트의 짜집기와 전유만으로 - 글을 써 보라고 한다. 이 책은 그런 저자가 그동안 쌓아온 비창조적 글쓰기의 방법론, 그리고 유사한 시도를 하고 있는 여러 작가들의 작품 소개와 비평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의 주장 중에 “로마자와 숫자로 이루어진 코드도 일종의 글이므로, 문학 비평의 시점으로 구성하고 읽을 수 있다”는 말이 꽤 재밌었는데 그 말에 따르면 내 직업도 작가가 되기 때문이다(ㅋㅋ) 하지만 멋진 타이틀을 달고 싶은 개인적 허영을 내려놓고서라도 재밌는 주장이라고 생각했다. 개발자가 코드를 만들 때 쓰는 프로그래밍 언어도 ‘언어’이긴 하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가 아니라 사람이 기계에게 말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라는 점이 다를 뿐, 문법 체계도 있고 단어도 있고 버전별로 발전도 한다. 때론 이 언어에도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구사 방식이라는 게 생긴다! 또 코드는 저자가 말하는 ‘기성 텍스트를 복제해서 재창조하는’ 현대 예술의 기조에도 아주 잘 들어맞는다. 그 어떤 레퍼런스도 복사하지 않고 자기만의 코드를 짜는 사람은 아마도 세상에 없을 뿐더러 그런 방식이 권장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코드 작성에 있어서 독창성은 그다지 유의미한 요소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 코드가 오로지 복사 붙여넣기 만으로 완성이 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각 함수의 역할이나 코드 전체의 흐름, 숲은 한눈에 안 보이는 대신 나무 하나하나를 간결하게 만들지 나무는 좀 지저분할지언정 숲이 한눈에 보이게 할지 등은 작업자가 결정하는 부분이다. 그런 일련의 결정들을 보며 우리는 이 코드가 좋은 코드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비평한다. 그리고 그 비평의 틀 역시 트렌드의 흐름에 많은 부분이 좌우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의외로 문학 비평과의 공통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이어리에 필사한 문장을 다 가져오진 못했는데 대안적 지리 지도 얘기도 좋았다. 일단 누가 독립출판 북페어에서 ‘내가 눈물을 흘렸던 모든 장소에 의거해 만든’ 지도책을 판다면 나는 좀 관심 갖고 볼 거 같기 때문에… 나한텐 그저 스쳐지나가는 길목이었던 곳이 누군가에겐 너무나 의미 있고 깊은 감정이 고여 있는 장소라면,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아주 잠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거 같아서 그 순간을 체험해보고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랬다. 겨울에 읽은 책 중 가장 신기했던 책.

우리는 언제나 타지에 있다

농촌의 국제결혼 가정에서 태어난 이주배경청년의 회고록. 다문화 가정, 이주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20년 전에 비해 썩 발전하지 못했는데 그 가정에 속해 있던 사람은 어느덧 청년이 되어 자신에 대한 책을 쓴다. 책의 내용보다는 이 책의 존재가 더 많은 말을 해준다고 느꼈다.

다른 방식으로 듣기

다이어리에 이 책 읽으면서 필사한 문장이 단 하나도 없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아마 이 책이 동명의 팟캐스트에서 6화 분량에 걸쳐 얘기했던 내용을 책의 형태로 옮긴 결과물이라, 진행자들의 대화 사이에서 필사할 만한 특정 문장을 골라내기 어려웠던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소리를 듣는 행위가 ‘시간/공간/사랑/돈/권력/신호 및 소음’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다루며 듣기의 본질을 탐구한다. 음악을 듣는 여러 가지 경험, 지하철에서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 끼고 음악 듣기부터 침묵이 음악의 첫음이 되는 곳에서 공동체 경험으로서 음악 듣기, 보컬과 세션만 남기고 모든 잡음을 제거하는 음악부터 의자 끄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등의 주변음까지 포함하는 음악, 아날로그 전화기로 전달되는 음성과 휴대폰으로 전달되는 음성, 라디오로 전해지는 음성과 TV로 전해지는 음성, 음악에 꼭 가격이 있어야 하는가? (자본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상호작용이 될 수는 없나?) 등등 아주 다양한 측면을 소개한다. 듣는 행위에 관심이 많고 듣기의 방식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아마 더더욱 재밌게 읽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책의 디자인이 아주 멋지다. 표지와 내지 전반을 구성하는 파란색 컬러도 그렇고 무엇보다 팟캐스트 ‘듣기’의 경험을 텍스트로도 최대한 살리려는 여러 시도들이 좋았다. 예를 들어 진행자와 멘트와 멘트 사이에 [SFX: 1920년대 뉴욕의 길거리 소리] 같은 캡션을 삽입하고, 라디오 소리의 이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그 부분만 다른 폰트를 사용하고 소리의 빠르기를 강조할 때는 자간을 늘이거나 줄이는 등의 편집이 마주칠 때마다 감탄스러웠다. 편집자로서 편집하는 재미가 있는 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읽는 독자로서도 경험하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고.

문자 살해 클럽

때로는 문장이든 이미지든 오로지 딱 한 부분 때문에 책 전체에 의미가 생기는 책들이 있다. 프롤로그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본문이 프롤로그의 힘을 압도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주인공과 제즈의 대화, 텅 비어버린 서가에서 마치 책이 여전히 그곳에 있는듯 보이지 않는 글자를 읽어내려가는 제즈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다. 문자를 살해하고자 모였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는 (왜냐면 이 책이 ‘쓰여’버렸으므로) 구성도 인상적이었다.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 책인지 이해했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긴 어렵지만…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

작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샀던 듀나 작가의 초기 단편집. 책이 하드커버인데다 듀나의 소설을 읽어본 적도 많지 않아서 머리 아픈 내용이 나오진 않을지 지레 겁먹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겨울에 읽은 책 중 가장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서문에서 “김보영 작가님의 초기 작품을 캐보면 『다섯 번째 감각』 같은 게 나오겠지만 저는 이런 게 나온다구요 이걸 왜 지금 굳이 책으로 내자고 하시는 걸까요” 같은 말이 나올 때 무슨 뜻인지 잘 이해를 못했는데 첫 번째 단편을 읽어보고 바로 이해했다. 단편들의 길이가 대부분 짧고, 무엇보다 지금 이 텍스트를 140자 단위로 쪼개 트위터에 업로드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듯하다. 실제로 90년대 PC통신에 연재했던 소설들이라 그런지 구구절절 긴 문단의 종이책, 각 잡고 읽어야 하는 문-학보다는 가타부타 없이 바로 핵심으로 넘어가는 디지털의 문법, 베드타임 깔깔 유머집에 훨씬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기억의 몽타주

여행길에 들린 헌책방에서 샀는데 다음날 다 읽고 친구에게 절절히 호소했다. 어떡해 너무 재미가 없어…

1988년의 서울,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쩌다 보니 마르크스의 『자본론』 초판 번역에 참여하게 되어버린 저자의 에세이인데 이 책을 사겠다고 집었던 이유는 독특한 구성 때문이었다. 책이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고 1부는 그 당시에 대한 저자의 회고, 2부는 1부에 자기가 쓴 텍스트에 대한 이중 회고다. 어쩌다 이런 구성을 쓰게 됐는지도 궁금했고 2부에서 대체 무슨 얘기를 들려줄지도 궁금해서 쉽게 쉽게 읽히는 1부를 빠르게 넘기고 2부로 향했는데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저자 개인에겐 무척 의미 있는 책이었겠지만 저자의 경험 너머에 있는 독자에게도 의미가 가닿으려면 2부는 완전히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