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대학교 1학년 때 가을부터 2학년의 여름까지 내 마음엔 늘 K 가 있었다.

K 와 나는 온종일 카톡을 주고받았다. 새벽까지 휴대폰을 붙들고 서로에게 카톡을 보내다 까무룩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어, 어제 잠들어서 답장 못 보냈네’ 하고 다시 톡을 이어나가는 게 일상이었다. 하루종일 이야기를 하는데도 우리 사이엔 이야기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로의 대학생활,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들, 술 먹고 친 자질구레한 사고들. 정말 별 것 아닌 일도 K 에게 전하다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유쾌했다. 수업에 들어왔는데 교수님이 무언가 실수를 하면 ‘아, 대박. 지금 나 수업 중인데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로 또다른 대화가 이어졌고, 이상한 사람들 때문에 마음고생한 이야기도 K 에게 일러바쳐 ‘그 새끼가 정신 나갔네’ 하는 답장을 받으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개운했다. 거기다 우린 전공도 같았다. 그리고 둘다 술을 좋아했고, 락 음악에 약간 미쳐있었다. 내 일상 중 K 와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은 아무 것도 없었다.

K 를 좋아했다. K 에게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건 딱히 신경쓰이지 않았다. 나는 늘 상대를 독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친구든 연인이든 관계의 타이틀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고, 그저 오래오래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관심사가 이 정도로 잘 맞는 친구를 어디 가서 또 찾기는 힘드니 일시적인 애정 쯤은 평생 묻어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좋아하는 티는 또 다 내고 다녔다는 게 웃기는 점이다. 세상에 어떤 친구가 술주정을 핑계로 하트 이모티콘을 보내고, 서로의 시간표를 줄줄이 꿰고 있어 아침에 톡을 안 보면 모닝콜을 해 준단 말인가? 상대방 역시 이 관계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K 의 친구들은 그에게 저 분 얼른 잡으라고 재촉을 해 댔고 K 는 그걸 또 자신의 일상처럼 내게 전달했다. ‘내 친구들이 얼른 너 잡으라고 난리야.’ 그 이야기를 톡으로 하는 풍경은 얼마나 웃긴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린 사는 지역이 제법 멀어 얼굴 보고 만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리고 둘 다 연애보단 공부를 더 잘했다.

이도저도 아닌 관계는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채 해를 넘겼다. 관계의 타이틀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상관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수학 문제를 주고 받으며 ‘이거 어떻게 풀 수 있을 거 같애?’ 같은 아이디어 교환을 하고, 술 마시면 톡으로 미친 소리 다 하고, 올해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 나온 밴드 중에선 누가 제일 사운드가 끝내주는지 열변을 토하고, 나는 정말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그런데 우리 관계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틀어졌다.

문제의 그 일은 평범한 어느 주말 오전에 일어났다. 기숙사 침대에서 늦잠을 청하며 뒤척이는데 카톡 알림이 울렸다. ‘나 지금 정신이 없는데.. 뭔가 엄청난 사고를 친 거 같아.’ 나는 그 카톡에 한참 낄낄댔다. 우리 대화에서 언급되는 사고는 늘 술 먹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술 먹고 꽐라가 되어 모르는 집에서 눈을 떴다, 또는 간밤에 술값을 자기가 다 내겠다고 허세를 부린 탓에 카드값에 정신나간 액수가 찍혀있다, 뭐 그런 것들. 오늘은 또 무슨 신선한 사고를 치고 오셨나. 나는 ㅋ 를 잔뜩 칠 준비를 하고 이어지는 메세지를 봤다. 그런데 그 다음 이어지는 내용은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친구 J 와 둘이서 술을 진창 마시다 필름이 끊겼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자기가 J 에게 강제로 스킨십을 시도했던 거 같다고. 그런 장면 몇 개가 기억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K 는 내게 털어놓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J 는 나도 이름을 몇 번 들어본 사람이었다. K 의 동아리 친구이자 그에게 고백해서 차였던 사람. K 는 종종 자신이 J 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껄끄러움에 대해 나에게 토로하곤 했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와 같은 처지의 J 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아, 그건 진짜 어색하겠다. 네가 고생이네.’ 따위의 말로 K 를 위로해주곤 했는데. 그 이름이 여기서 언급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쳐야 하는 거지? 나는 K 에게 화를 냈다. 이걸 나에게 털어놓는 저의가 뭐냐. 지금 나한테 고해성사 하듯이 내뱉고 너는 마음 편해지고 싶었느냐. 생각 나는대로 쏟아냈다. K 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에게 미안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그와중에 이 대화를 어딘가 기록으로 남겨두어야겠다는 데에 생각이 닿았다. 혹시 쓰일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법적 효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하나하나 캡처를 했다. 아, 아닌가? J 는 나의 존재조차 모를 텐데, 되도록 아무도 이 일을 몰랐으면 하는 거 아닐까? 어느 쪽이 더 몹쓸 짓이지? 나는 힘겹게 K 에게 되물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건데? K 는 대답했다.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앞으로 너랑 만나도 술은 못 마시겠네.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

B-side.

있잖아.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내가 여전히 너를 좋아한다면 그건 끔찍한 일일까?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십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생각해. 그 시절에 네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너도 알다시피 나 고등학교 때 정말 힘들었잖아. 한 학년에 40명 밖에 안되는 소규모의 학교. 모든 학생이 기숙사에 사는데 선생님의 허락 없이는 학교 밖으로 외출조차 할 수 없었던 폐쇄적인 환경. 그래도 1학년 때는 성적도 잘 나왔고 그당시 남자친구와의 연애도 즐거웠는데, 가을학기 중간고사 즈음에 룸메이트가 방에서 자살하는 일이 생기면서 톱니바퀴가 엉망이 됐지. 그 일로 중간고사가 일주일 연기되자 다른 동기들 몇몇이 공부할 시간 더 생겨서 다행이라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나. 정작 진짜 힘겨워하던 사람들은 그저 힘겹게 공부해야 하는 시간이 일주일 늘었을 뿐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 고등학생에게 대입이란 그런 거니까. 우리 엄마도 나한테 ‘너 시험 공부하는데 그런 일이 생겨서 어떡하니’ 하고 걱정했던걸.

엉망이 된 톱니바퀴는 졸업할 때까지도 고쳐지지 않았어. 그때 여실히 깨달은 거야. 죽지 못해 산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성적이 떨어지면서 선생님들의 동정어린 시선과 관심도 함께 사라졌어. 그분들은 힘겨운 역경이 있어도 끝까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학업의 본분을 다하는 학생을 기대했던 거 같아. 난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 오히려 그런 기대에 알러지 반응이라도 일으키듯 더더욱 망가졌어. 생활이 무너졌고, 벌점이 쌓였고, 기숙사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말이 나왔고, 나중엔 몽유병이 생겨 기억이 자주 끊기곤 했어. 분명 자습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독서실에 들어갔는데 문득 눈을 떠보니 내가 기숙사 바닥에 누워있고 사감 선생님이 나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는 거야. “너 왜 여기 있니?” “어…. 지금 몇 시인데요?”

그렇게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인 내게 네가 있었지. 우리 관계는 그때도 좀 이상했어. 내가 너와 친하다는 걸 학교 내의 그 누구도 몰랐잖아. 우린 직접 마주보고 앉아서 얘기하며 친해진 게 아니라, 블로그를 통해서 대화를 했으니까. 그때 네이버 블로그에는 최근 방문한 사람들 목록을 보여주는 기능이 있었지. 내가 이 학교와, 공부와, 엄마와, 죽은 친구에 대해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오물을 블로그에 마구 쏟아내고 나면 꼭 그다음날 방문 기록에 네 닉네임이 찍혀 있었어. 그게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네가 알까. 누군가는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것. 내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 알아주는 사람이 이 학교에 한 명은 있다는 것. 네가 대체로 아무 댓글도 안 남기는 편이라는 것도 좋았어. 아무런 판단 없이 그저 나를 봐주고 있다는 것. 그게 내겐 구원이었어.

블로그를 통한 비밀친구 시절을 지나 제대로 친해지고 나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지. 내겐 여전히 자살한 그 친구의 이야기가 응어리처럼 남아있었고, 넌 가끔 예전에 돌아가신 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어. 한 학년에 40명 정원인 고등학교에서 너희 기수만 41명이 있었으니 네가 국가유공자 전형으로 학교에 들어왔다는 건 도무지 숨길 수가 없었거든. 물론 룸메이트가 죽은 것과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신 건 절대 같은 무게의 일이 아니었을거야. 그러니 우리가 서로를 이해했다고 말하는 건 좀 성급하지. 그래도 난 네가 있어서 좋았어. 주위 사람들은 내가 그 친구 얘기를 꺼내면 겁부터 먹었단 말이야. 난 그저 해소되지 않는 헛헛함을 술안주 삼고 싶었을 뿐인데, 그 애매한 무게를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까.

고등학생 때부터 너를 좋아했어. 그게 연애감정이 되었던 건 대학교 때 뿐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너를 좋아하는 거 같아. 그래.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말이야. 내가 어떤 ‘만약’까지 상상해봤는지 너는 모르겠지. 하지만 어떤 상상의 끝에도 내가 너를 싫어하게 되는 결말은 없었어. 너는 내게 은인인걸.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고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았던 시기에 네가 유일하게 내 말을 들어줬는걸.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건 네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걸. 너마저 적으로 돌리면 나에겐 대체 뭐가 남니? 나는 널 미워할 수 없었어. 우습지. 이건 딱히 너를 위한 일도 아냐. 성범죄를 저지른 거 같다고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어떻게 그 사람을 위한 일이겠어?

대답해 봐. 이런 내가 끔찍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