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준비를 하던 당시, N사 본사와 계열사 여러 군데에 지원서를 냈지만 최종으로 붙은 건 계열사 한 군데였다. 대부분 필기 시험에서 떨어졌다. 시험 대비는 커녕 어떤 유형의 문제가 나오는지 알아볼 길조차 없었기 때문에 예상하던 바였다. 내가 유일하게 최종합을 받았던 계열사는 당시 필기시험을 수학 문제로 냈다. 오랜만에 보는 하노이의 탑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수학 공부를 안 한지 오래 됐어도 하노이의 탑 문제를 못 푸는 이가 여기 있을까 했는데, 시험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의외로 많았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계열사로 입사를 했고, 지금은 본사를 잠깐 거쳤다가 또다른 계열사로 들어와 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문제를 출제했던 분이 수학과 출신이었다고 한다.

​입사 초기엔 누가 회사 이름을 물어보면 멈칫 했었다. N사라고 해야 하나, 아님 계열사 어디인데 무슨 무슨 일을 합니다, 하고 부연 설명을 붙여야 하나. 요즘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이름 대면 다 알만한 곳에 다니고 있고, 내 스스로 내 회사와 팀에 매우 만족하고 있고, 컨텐츠를 서포트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진짜로 내 꿈이었으니까. 지금 하는 일이 너무 좋고 잘 맞는 것 같다는 말엔 거짓이 없다. 그런데 내가 자신있게 회사 얘기를 꺼내고, 다른 사람들이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올 때면 이따금씩 나 자신이 무언가를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아 서늘해 진다. 뭐랄까,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요소를 모두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행복함을 전시해 놓은 기분. 와 좋겠다, 진짜 너무 부럽다, 거기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등의 질문에 잘 포장된 답을 내놓고 있자면 나 자신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연극의 주연 배우가 된 것 같다. 저는 이렇게 성공했어요, 그래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같은.

내가 지금에 도달하기 까지의 과정은 결코 간결하지 않았다. 내가 지원하던 해에 필기 시험을 출제한 분이 수학과 출신이 아니었더라면 난 백수가 됐을 테고, 그게 N사의 마지막 공채였으므로 다음을 노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 팀에서의 회식 자리가 아니었다면 이직을 여전히 망설였을 수도 있다. 컨텐츠를 서포트하는 게 내 꿈이긴 했지만 그건 최근 몇 년의 꿈이었을 뿐이다. 그 전엔 사회물리학과 네트워크 이론에 빠져 있었고, 더 이전엔 수학을 연구하고 싶었다. 그런데 남들 앞에 서면 이런 구불구불한 여정들은 자취를 슬 감추고, 덕업일치를 위해 지금 내 자리를 늘 목표해 왔고 결국은 도달한 성공적인 직장인의 표본 같은 연기를 하고 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관통해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의미의 줄기를 찾아 인생을 일정한 이야기로 구성하는 일에 능숙한 것 같다. 삶에서 발생하는 우연하고 예상치 못한 개별 사건들을 날줄과 씨줄로 꿰어 자신이 지내온 인생 전체로 통합하는 데 뛰어나다는 뜻이다. 나를 한 권의 책처럼 생각해 보는 일은 재밌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며 기승전결의 서사를 쓰고 나면 내가 뭔가를 성취한 듯한 뿌듯함도 느껴볼 수 있고 남에게 더 나를 쉽게 설명할 수도 있다 (자기소개서 쓸 때를 생각해 보자). 하지만 사실 내 인생은 커튼콜을 받긴 커녕 아직 시작조차 못한 일이 산더미인데 나는 왜 자꾸 해피엔딩의 아이콘이 되어가는지. 남이 나를 그렇게 대하는 것과 내가 나를 그렇게 대하는 것, 둘 중 어느 게 먼저인지를 따지자면 닭과 달걀 같은 관계가 되겠지만 이제 행복과 불행을 자랑하는 소모적인 이야기는 그만두고 싶다. 그보다 좀 더 건설적인, 아니면 차라리 세상 쓸데없는 수다를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