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친구와 저녁을 먹었다. 우리 몇 년 만에 본 거지, 하는 말에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10년 전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와 만나면 자연스레 그 10년 전을 돌아보게 된다. 이제는 단어마저 지겹게 느껴지는 고등학교 얘기도 새삼 꺼내보고 (‘근데 이젠 진짜 기억이 안 난다 야’) 근황 얘기도 주고받고. 그러다 문득 그 친구가 반지를 끼고 있는 걸 발견했다.

​카페에서 긴 수다까지 끝내고,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내내 그 반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 친구는 오른손 중지에 검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손 중지의 검은 반지는 무성애자의 상징 중 하나였다. 나도 집에 검은 반지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걸 나 혼자 집에서 고민하는 시점에 이미 뭔가가 잘못됐다. 1년도 아니고 10년을 알고 지낸 친구인데, 조금 어색할지언정 가볍게 물어봤으면 되는데. 하지만 실제 친구와의 1:1 수다 자리에서 무성애를 화두로 꺼내는 건 단순한 용기 이상을 필요로 했다. 최근에 재밌게 본 영화를 묻듯이 무성애에 대한 의견을 물을 순 없었다. 지뢰찾기 게임을 할 때처럼, 한번 퀴어에 대한 얘기를 나눠본 친구에게 얘기를 꺼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런 대화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친구 앞에서 커밍아웃을 하려면 지뢰를 밟을 확률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생각한 그 의미가 맞다고 하면, 그 다음 대화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거야? 아이고 깜깜해..)

​그래서 집에 와서 애써 합리화했다. 설령 걔가 나랑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 해도 뭐가 달라지진 않잖아? 내가 그 친구한테 연애 감정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이거 다 자의식 과잉이야. 나 이런 생각하고 있는 거 알면 그 친구가 엄청 비웃을 지도 몰라. 그렇게 나를 어르고 달랬다. 그런데 문득 나를 이렇게 어르고 달래는 과정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울고 싶을만큼 멍청하게 느껴졌다.

​무성애자로 정체화한 이후엔 연애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내 정체성을 속이고 유성애자와 연애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자니, 그러고 있는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죽기 보다 싫었고 같은 성향의 사람을 찾자니, 그런 사람 중에 나랑 취향 잘 맞는 사람을 찾기란 로또 맞기보다 힘들 것 같았다. 차라리 요즘 유행하는 비혼공동체를 알아보는 게 더 쉽지 않을까? 나도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해보는 거지. 내 생각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즉 나는 단 한 번도 나머지 만약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정말 정말 만약에, 나와 같은 성향의 잘 맞는 사람이 만약에 있다면?

​긴 밤 내내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그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성애자의 연애는 참고할 수 있는 레퍼런스가 정말 많다. 책 만화 드라마 영화 정말 무궁무진한 참고 자료가 있다. 이렇게 하더니 실패하더라, 저렇게 하니 성공하더라, 주로 요런 것들을 하더라 등등의. 나도 예전엔 그런 걸 보면서 연인 간의 일반적인 제스쳐가 어떤 것인지 학습할 수 있었다. 무성애는 그게 불가능하다. 무성애는 이제 겨우 가시화 운동을 하는 단계니까. 레퍼런스를 찾아다닐 게 아니라, 서툴더라도 내가 그 레퍼런스를 써야 하는 세대니까. 그런데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할 용기가 내게 있나? 난 나 자신의 내적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평생 쫄보로 살 운명인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