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얼굴들
며칠 전 교보문고에 들렀다가 우연히 신유진 작가의 신간을 발견했다. 전에 읽었던 그녀의 산문집 ‘열 다섯 번의 낮’과 ‘열 다섯 번의 밤’이 인상적이었고, 작가가 프랑스에 살면서 만났던 평범한 사람들의 인터뷰 모음집이라는 책 소개도 마음에 들어 망설임 없이 집어들었다. 요즘은 소설보다 시나리오, 희곡 등 대화로 이루어진 장르에 더 관심이 간다. 가끔은 인물이 직접 내뱉는 말과 숨이 줄글의 설명보다 더 많은 걸 내포하기도 하는 것 같다.
완독한 결과 예상한만큼 멋진 책이었다. 친구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질 수 있는 어린아이부터 들려줄 인생 드라마가 잔뜩인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담겨 있어 대화의 풍경을 상상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나로선 만나본 적도,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런 이름과 기억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괜시리 위안이 되기도 한다.
또 인터뷰 앞엔 그/그녀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어떤 느낌을 주는 사람인지에 대한 설명과 작가의 감상이 한 편의 글로 함께 실려있다. 어떤 인물을 대할 때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고, 또 어떨 땐 ‘내가 당신과 비슷했더라면 좀 더 나았을까?’ 하는 회한이 담겨있다. 처음에는 작가로부터 인터뷰이를 소개받는 제3자의 입장으로 이 글들을 읽었는데, 끝으로 갈수록 작가의 내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총 아홉 명의 사람. 아홉 개의 미지라고 할 수도 있을 이 사람들을 마주하고 앉았지만 작가의 시선은 여전히 자기 안을 향해 있다. 자신의 가족, 자신의 삶, 자신의 공허함에 대해 돌아보며 인터뷰이를 바깥 풍경처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신유진 작가의 가장 큰 매력이 바로 이런 쓸쓸함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의 내용은 한없이 포근하지만, 그들을 들여다보는 그녀 본인은 여전히 내면의 흔들림을 느끼고 자신의 ‘없음’으로 ‘있음’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점이 꼭 거울을 보는 것 같다. 사랑과 그리움을 사랑과 그리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부끄러운 일이다. 그녀의 책을 통해 나만 이런 주름진 마음을 갖고 사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될 뿐이다.
멋지고 열정적이고 매력 넘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거쳐 나는 또 나의 ‘없음’으로 돌아와버렸다. 마지막 에필로그를 읽으면서도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있음’을 말할 용기를 얻었다니, 당신은 나의 동지가 아니었던가. 그녀가 ‘있음’의 세상으로 먼저 건너가서 여행기를 들려줬으면 하는 마음과 ‘없음’으로 회귀하는 사람들의 든든한 친구가 되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든다. 어느 쪽이든 난 그녀의 신간을 또 읽게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