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전하는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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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의 문제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친구들이 화이팅 한마디를 해준 게 어쩐지 오래 뇌리에 남는다. 내 입장에 서서 응원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구나. 상담 선생님이 ‘저는 아주 확실하게 ㅇㅇ님 편에 있는 사람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ㅇㅇ님 편을 들 거에요.’ 라고 말씀하셨을 땐 낯부끄럽게 무슨 소리신가 했는데 음. 혼자라는 곽 속에 나를 가두어 둔 건 나 자신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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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 앞에 ‘눈치있게’ 라는 부사가 붙는 게 이렇게나 기억에 남다니. 내가 이상하리만큼 자신이 없는 분야는 모두 엄마가 한소리씩 얹었던 것들이다. 노래를 부르면 좀 시원시원하게 하질 못하고 늘 저렇게 히바리가 없다고 한숨, 사진을 찍으면 넌 좀 신경 써서 제대로 못 찍겠냐고 한숨, 눈치도 없고 둔해터진 곰탱이라고 한숨. 그런 말 하나하나를 전부 진짜 나라고 믿었던 시간이 길긴 길었나보다. 아직도 그런 분야들 앞에선 살얼음 위를 딛듯 조심스럽다. 실은 아직도 이러이러한 행동을 했을 때 엄마에게 무슨 말을 듣게 될지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머릿속 한켠에 자동으로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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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前を呼ぶよ. 이름을 부를게. 제주여행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공허했다. 분당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출근하기 싫다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회사에 가고 싶었다. 나를 가장 외롭게 하는 건 이 동네에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나 개인을 인식하는 사람이 없다. 도피처로 삼을 근사한 서점도 없다. 그게 너무 쓸쓸해서 글방 식구들과의 춘천 여행이 캔슬되자마자 속초 3박을 새로 예약했다. 무언가를 읽고 쓰는 동안에는 외롭지 않으니까. 바다를 보고 있으면 좀 괜찮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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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언제까지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고, 기획서에 쓰인 말을 코드로 번역하며, 혼자서 분당 판교에서 버틸 수 있을까. 난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긴장하고 어색해 하지만 그래도 사람과 함께 있는 걸 더 즐거워 한다는 걸 요즈음에야 깨닫고 있다. 그런데 내가 공부한 것도, 현재 직업도, 사는 곳도 도저히 사람 냄새라곤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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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프를 해야 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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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는데 문우당서림에 와서 의도치 않은 답을 찾았다. 나 여기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살고 싶은데.. 검색용 컴퓨터 없이 서림인에게 물어봐서 원하는 도서를 찾는 시스템도 좋고, 문제집이나 참고서 등의 실용서도 있으면서 다양한 책들을 구비해 놓은 것도 좋다. 문구류도 예쁘고, 모두가 원하는만큼 머물다 갈 수 있는 곳이어서 좋다. 속초는 좋은 곳이구나. 나 속초 처음 와 보나? 기억이 잘 안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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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보호를 위한 게스트하우스의 냉방 지침 덕분에 후끈후끈한 밤을 보냈다. 취직한 이후로는 회사건물은 물론 식당이나 카페도 추울 정도의 온도를 유지해서 생각이 없었는데 이런 후텁지근함이야말로 여름의 특산물이었지. 쾌적한 업무환경이라는 우산 아래서 계절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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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은 버스 안에 두고 내리자. 창밖 풍경을 센치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 순간에 박제시켜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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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불러주는 서비스가 필요하다. 공중에 떠올라 그대로 흩어질 것 같은 존재감을 하루에 한 번 정돈 고정시켜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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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테이블에 앉은 청소년 친구들이 일본 영화와 만화에 대해 얘기하는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한번도 끝까지 본 적이 없고 ‘너의 이름은’의 여운이 너무 강렬했으며 웹툰은 뭐가 엄청 재밌다, 같은 말들이 오가는 것에서 충격을 받았다. 이게 바로 세대차? 이게 바로 요즘 청소년..? 아니, 일반화는 하면 안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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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데이터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하고 여행을 다니는 게 가능할까? 요즘은 어디에 여행을 가도 그 지역의 맛집, 그 지역의 괜찮은 카페를 검색해 보게 된다. 검색 결과가 항상 훌륭함과 만족을 보장하는 것도 아닌데, 검색 결과에 나오지 않는 식당이나 카페는 애초에 후보지가 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이러면 블로그에 올라온 여행 후기를 읽는 것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지 않나. 그러면 일절 정보조사 없이, 발길이 이끄는 대로 들어가면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내가 데이터를 모른 척해도 이미 이 근방에, 눈에 띄는 자리에 정착한 가게는 모두 자본과 데이터를 잘 활용해서 살아남은 거니까. 불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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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보는 건 좋다. 바다에 대해 상상하며 파도 소리 ASMR 을 듣는 건 실제로 바다를 보는 체험을 대체하지 못한다. 그게 기술의 한계인지 자연의 위대함인지는 차치하고, 현재 사실이 그렇다. 하지만 카페와 음식점은 잘 모르겠다. 서점? 문우당서림은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기 힘든 공간인 거 같긴 하다. 그렇다면 대체 가능과 불가능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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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에 있다. 분당 판교에 살고 대기업을 다니고. 4차 산업 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개발자 직군에 종사하고 있고. 내가 만드는 건 철저히 무형이다. 스마트폰이 있는 사람만이 네트워크 망에서 다운로드 받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걸 만드는 수단 역시 무형이다. 인류의 생존에도, 환경 보호에도, 소수자 인권 향상에도 하등 도움을 주지 못하는 0과 1의 데이터를 만드는데 연봉은 꽤나 높게 받는다. 이 무형의 데이터에 이만한 가치가 있다는 건 누가 결정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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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요리가 너무 귀찮다. 평생 급식 먹으면서 살았으면 싶다. 가끔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밥 한 그릇을 먹고 나면 더더욱 내 연봉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내가 하는 일이, 내가 한 시간동안 만드는 0과 1이 정말 이 밥보다 몇 배 더 큰 가치를 지니는 걸까? 가격이 꼭 그 가치를 말하는 건 아니라는 말은 너무 낡아 그 효력을 잃었다. 그런 도덕과 윤리, 명예의 시대는 지나간 게 아닌가 싶어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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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나라에 사는 지나가는 시민1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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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잉크 사고 싶다. 운동 배워보고 싶다. 서핑하고 싶다. 글쓰고, 책읽고, 티알 하는 동안엔 공허하지 않다. 당분간 술은 안 마셔야겠다. 기쁨의 영역보다 권태의 영역에 치우쳐 있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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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의 세상엔 개개인이 없다. 숫자만이 있다. 나는 나만의 취향이 있는데, 성별과 나이에 따른 추천 시스템 안에서 나는 기록했는지 안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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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보다는 망각이 인간의 본능이고 습관이기 때문에 ‘너를 평생 잊지 않을 거야’ 같은 말은 대단히 실천하기 어려운 선언이다. 매번 새로운 파도가 밀려와 모래사장에 자국을 만들 때, 굳이 예전의 파도를 복제해 와서 현재의 자국 위에 덮어쓰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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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J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고 살았다. 간혹 술기운에 이야기한 날도 있었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그것도 딱 한번 뿐이고, 난 그 한 번을 실수로 정의했었다. 내가 추슬러야 할 내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 못해서 괜한 폐를 끼쳤다고. 그랬던 내가 J에 대한 글을 썼다. 블로그에 올라간 글은 지금이라도 지울 수 있고, 그 글을 읽었던 사람들의 기억에도 그리 오래 남진 않겠지만, 아마 나 자신은 내가 그 글을 썼다는 사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건 비가역적이다. J는 더 이상 내 인생에 중요한 키워드가 아니라고, 나는 이제 많은 걸 잊었다고 공식 선언하고 무언가가 바뀌었다. 아니, 사실 나 자신의 변화에 명확한 - 단 하나의 - 계기가 있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 글을 쓰면서 J와 함께였던 시절의 나에 대한 감상이 바뀌었다. 과거를 떠나보낸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심층적인 뜻이 있었던 게 아닐까.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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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의 ‘발견’을 읽어보고 싶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인용에 따르면 1886년, 26세의 체호프가 쓴 단편인데 5등 문관이자 기술자인 바흐롬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52세의 바흐롬킨은 우연한 계기로 자신에게 화가로서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어느 집에서 연 무도회에서 옛 사랑을 만난 그는 씁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그림을 그린다. 그는 지금의 나이든 그녀도, 예전의 아름다웠던 그녀도 모두 자기 손으로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다. 이때부터 바흐롬킨은 자신이 화가나 시인이 되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한다. 자유로운 삶, 명예, 명망.. 이런 상상이 모이면서 구체적인 화면이 연속해서 펼쳐진다. 그런데 그 꿈 같은 상상의 끝에서, 존중과 명예만 있을 뿐 돈도 없고 근사한 훈장도 없는 삶이었겠다는 결론을 내고 ‘재능을 늦게 깨달아 다행이야…’ 하고 읊조리며 잠이 들고 끝이 나는. 그런 내용이라고 한다. 그치만 요약 말고 전체가 읽어보고 싶다. 구글 검색이여 제발 저를 한국어 번역본으로 인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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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내내 코딩에 대한 생각은 한톨도 안했다. 개발자라는 직업이 아이덴티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나는 아니네. 근데 내가 그런 부류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면서 이렇게 마음이 편한 건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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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여러 권의 책을 샀다. 동네서점 전국 가이드북 비슷한 책도 있고, 회사를 때려치고 제주도로 이사 가서 서핑하며 소소하게 사는 사람의 에세이도 있고, 아무튼 시리즈의 ‘아무튼, 여름’도 있다. 셋 다 여름에 북스테이로 휴가 가서 살만한 무난한 책이지만, 동시에 내가 요즘 하는 생각을 대변하는 책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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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퇴사하고 자아를 찾아 떠나는’ 부류의 책이 싫었다. 그런 코너에 편견이 있었다. 아직 진행 중인 인생에 그런 해석을 갖다 붙이는 게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너무 평가하는 위치에 서서 오만하게 봤던 게 아닌가 싶고. 해석은 마케터가 붙이는 거고 알맹이는 다를 수 있지. 무엇보다 평생 한 직업으로 먹고 살기는 힘들 거라고 모두가 말하는 21세기에 그 분들은 나름 선구자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