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액션이 컨텐츠화 되는 게 끔찍하다.

전에 친구와 댓글 기능의 득과 실에 대해 얘기해본 적이 있다. 웹툰과 웹소설에 댓글 기능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친구는 아예 댓글을 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가끔 댓글창을 열어본다. 오늘차 내용이 잘 이해가 안 될 때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보고 싶어서도 있지만, 대체론 이미 그 댓글창에 어떤 내용이 있을지 짐작하면서 관성적으로 열어본다. 남자주인공에 대한 주접, 악역에 대한 저주, 이젠 그 안에도 어떤 유행이 생겼다. 유투브에서 봤던 드립 네이버웹툰에 가면 또 볼 수 있고 카카오페이지에 가면 ‘이제 그 드립 좀 그만 치자’는 반응까지 간간히 볼 수 있다.

내가 무언가를 소비하는 모습 자체가 컨텐츠가 됐다. 음식을 먹으면 맛있게 잘 먹었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이걸 맛있게 잘 먹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인스타그램에 남긴다. 물론 음식에 대한 평가도 조금은 있겠지. 하지만 그조차 ‘이것을 평가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바깥 시선을 의식한다. 셀카와 비슷하다고 느낀다. 모두가 매순간 셀카를 찍고 있는 것 같다.

컷툰 포맷의 웹툰에선 컷별로 댓글을 따로 달 수 있다. 대표적으론 유미의 세포들이겠지. 유미의 세포들에서 컷별 댓글창을 열어보면 거의 유머 컨테스트의 장이다. 베스트 댓글이라는 제도가 더 그걸 부추긴다. 누가누가 이 컷 이미지를 가지고 더 유쾌하고 자극적인 드립을 완성할 것인가. 음식 리뷰를 기깔나게 쓰는 사람에겐 상금을 주겠다고 보상을 걸어버리면 그 시점에서 음식의 맛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음식을 만들어온 셰프의 역할도 함께 퇴색된다. 왜냐면 그곳의 진짜 크리에이터는 댓글 쓰고 있는 사람이고 음식과 작품은 그 댓글의 땔감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2차 연성 소재?

페이스북에 올라온 누군가의 부고 소식에, 마치 복사해서 붙여넣은 듯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댓글들을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그 댓글의 목적은 무엇인가? 정말 그 댓글을 쓰면서 명복을 빌고자 했는가, 아니면 내가 이 글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찍는 인감인가? 그 댓글을 쓰는 게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추천과 댓글이 많은 게 미덕인 시대에, 아무 반응도 못 얻고 덩그러니 타임라인에 놓여있는 쪽이 더 쓸쓸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삼가고인 댓글들의 대행렬은 싫다. 그 댓글들은 내 자기확신을 갉아먹는다. 어떤 방식으로 애도를 하든, 또 얼마나 슬퍼하든 그건 내 자유인데 저곳에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내 마음은 애도로 인정받지 않을 것 같아 어지럽다. 컨텐츠와 리액션의 위치가 주객전도 되어도 그 전까진 이게 요즘 유행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 컨텐츠의 자리에 누군가의 죽음이 놓이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올해 몇 건의 부고를 들었다. 내가 요즘 가장 활발히 하는 SNS 가 트위터라, 주로 트위터를 통해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 타임라인엔 ‘세상에 이거 진짜야?’ 같은 텍스트와 함께 뉴스 링크를 퍼트리면서 수천 RT 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게 너무 끔찍하다. 요즘은 뉴스 기자라는 인간들도 그런 짓을 한다. 정확한 진실을 알리되 예의 있게 알리길 바랐는데 예의는 옛저녁에 내다버렸고 이젠 확인도 안 된 정보를 유포한다. 연예인 ㅇㅇ 사망 으로 기사 제목을 뽑아놓고 본문에 아직 신원 확인이 안됐다고 쓴 걸 보고 정말 울고 싶어졌다. 어떻게 이렇게 무례할까. 누군가의 죽음이란 건 또다른 누군가를 죽고 싶게 만드는 사건인데. 그걸 퍼트리는 게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가지는 일인데 그 책임은 다 어디로 망각하고..

편히 쉬시라는 말을 하는 것도 무섭고, 안타깝고 슬프다고 말하는 것도 무섭다. 그 말을 내뱉는 ‘나’를 의식해 버리는 게 너무 끔찍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