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날들
새해 첫날, 하루종일 침대 위에서 뒹굴거렸다. 몸이 무거워서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점심은 회사에서 연말 선물로 보내준 쿠키 세트에서 머핀을 집어 대충 욱여넣었다. 저녁은 멸치쌈밥을 파는 식당에서 다슬기국을 배달시켜 먹었다. 별게 다 배달되는 세상이다. 다슬기는 하나하나 껍질을 까는 데에 말도 안되는 수고가 드는데, 이걸 팔천원 내고 먹어도 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음식에 값이 매겨지는 원리를 여전히 잘 모르겠다.
지난 며칠간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다. 바깥의 날씨는 영하 11도. 사람이 나다닐만한 기온이 아니었기에 내내 밖에 나가지 않았다. 덕분에 신발장 한켠에는 배달업체 로고가 그려진 비닐봉투가 층층이 쌓여있다. 저걸 버릴 겸 한번쯤은 바깥 공기를 마시고 와야 기분전환이 되고 에너지가 날텐데, 바로 그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도 지난 날들에 비해 발전한 점이 있다면 그렇게 끝모르고 늘어져있는 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게 생각의 답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전만큼 자주 망각하지 않는다.
밤 열한시가 되어서야 배터리에 초록불이 들어왔다. 남들은 잠자리를 준비할 시간에 이불을 박차고 나와 겹겹이 쌓인 비닐봉지를 버리고, 설거지를 하고, 지난 며칠의 무기력을 씻어내듯이 샤워를 했다. 밖에 나가 산책도 했다. 공기가 얼어붙게 싸늘한 대신 밤하늘은 간만에 맑았다. 오피스텔 단지 안에 위치한 공원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면 아무리 각도를 달리 해도 오피스텔 건물을 시야에서 내보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늘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별도 드문드문 보이고,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덕에 지긋지긋한 마스크를 벗고 입김을 있는 그대로 내뱉을 수 있었고,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샤이니 노래는 상큼했으니까. 생각지 못한 조합이었지만 이만하면 1월 1일의 기억으로 나쁘지 않았다.
어릴적 내 기억 속에 행복의 상징처럼 남아있는 한 장면이 있다. 아마 초등학생 무렵, 나는 무슨 과목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옆에 있는 라디오에선 당시 좋아하던 sg워너비의 노래가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작은 볼륨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초여름이었다. 살짝 후텁지근하지만, 그 더위가 온몸의 감각과 정신을 더 돋궈주는 정도의 온도. 반쯤 열어둔 차운으로 선선히 불던 바람. 정말 별거 아닌 것들의 조합이었는데 그 순간 머릿속에 반짝였다. 나 지금 되게 행복한 거 같아, 하는 정확한 문장. 이게 바로 나를 결정짓는 행복이라는 확신. 구태여 분해해 보자면 그건 아마 무언가에 온전히 집중한 순간과 그 순간을 빛내주는 음악의 덧셈이었겠지.
밤 열한시에 뽀득뽀득 샤워를 하다가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사흘간 8평짜리 벽을 보고 지낸 반동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눈에 담고픈 충동이 일었다. 바로 숙소와 왕복버스를 예약해서 속초에 왔다. 왜 하필 속초였냐면, 지난 여름에도 혼자 3박4일로 속초에 와본 일이 있기 떄문이다. 나는 갔던 곳에 또 가는 여행을 좋아한다. 예측불가능한 요소가 너무 많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아예 낯선 곳은 잘 가지 않는다. 똑같은 장소여도 다른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길을 걸으면 충분히 다른 빛깔의 여행이 되니까. 그런 식으로 다른 색채를 만드는 것에 나는 꽤 괜찮은 재능을 갖고 있다.
1박2일의 짧은 여행이니만큼 목표는 간략하게 잡았다. 1. 물회 먹기. 2. 파도 보면서 멍때리기. 3. 문우당서림 들르기. 그리고 이 세 목표는 첫째 날에 모두 클리어했다. 더는 남은 일이 없다. 맥주 마시면서 일기만 쓰고 나면 오늘은 끝이다.
홀로 여행을 자주 다녔다. 충동적으로 배낭 둘러메고 여행을 오면 나는 늘 걷는다. 정말 하-염-없-이- 걷는다. 유명하다는 맛집도 이 동네에서 꼭 가봐야 한다는 핫플레이스도 가지 않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채 계속계속 걷는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나는 길치다. 뚜벅뚜벅 걷다보면 웬 주거지역에 와있을 때도 있고, 큼직큼직한 대교를 건너 외딴 섬에 와있을 때도 있다. 그러면 다시 180도 돌아서 온 길을 되돌아 간다. 그게 내 여행이다. 여행을 이따위로 하다보니 누구한테 같이 가자고 하기도 뭣하다. 아무튼 나는 걷는다. 걷고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떤 식당을 발견한다. 이전까진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없었던 주제에, 간판을 보는 순간 내가 먹고 싶었던 게 바로 저거였다는 걸 깨닫는다. 혹은 어떤 음악을 재발견한다. 그냥 따뜻한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겨울 바다의 추위에 곁들여 들어보니 옛날의 누군가가 생각난다던지. 오늘 처음 들어본 노래인데 이런 멋진 곡이 있다는 걸 왜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는지 갑자기 억울해진다던지. 그럴 때면 아주 작고 귀여운 느낌표가 튀어오른다. 가끔은 느낌표와 함께 내 텐션도 덩달아 튀어서 길에서 혼자 리듬을 탄다. 둠칫둠칫.
지난 여름에 이어 이번에도 “완벽한 날들”이라는 이름의 숙소에 머물고 있다. 이곳은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서 걸어서 1분 거리에 위치해 있고, 서점을 겸하는 북스테이 게스트하우스다. 북스테이라는 카테고리는 언제나 약간의 감성적인 느낌을 준다. 책과 가까운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 하지만 실제로는 북스테이에서 ‘북’을 활용할 일이 잘 없다. 나는 책 취향이 확고해서 여행을 가도 내가 직접 가져간 책을 읽지, 게스트하우스에 꽂혀있는 책을 읽지 않는다. 더구나 이번엔 파도를 보는 게 여행의 1순위 목적이었기에 가져간 책도 두시간 남짓밖에 읽지 않았다. 북스테이가 아니라 그냥 ‘스테이’ 였다. 그래도 다시 이 ‘스테이’를 고른 이유는, 겨울에 가면 모든 침대에 전기장판을 깔아준다는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그정도면 100점짜리 스테이지.
나의 행복을 정의하는 한 장면, 느낌표가 떠오르는 순간을 얻기 위해 여행을 간다. 초여름의 바람을 맞으며 문제집을 풀던 순간, 엄마 몰래 베개 밑에 핸드폰을 숨기고 그 조명으로 일기를 쓰던 순간. 처음으로 페소아의 ‘불안의 책’을 읽었던 날. 천문동아리 캠프를 가서 그제껏 본적 없이 별이 눈부시도록 빼곡한 하늘을 마주한 날. 어린날 서러움에 펑펑 울면서 sg워너비와 빅마마의 카세트 테이프에 위로받던 밤. 그외 기타 등등. 파란만장한 청소년기는 지나갔으니 나를 새로이 정의하는 순간이 이전만큼 자주 오진 않겠지만, 지금 내 위치가 여기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계속 여행을 간다. 2010년에 나를 결정짓던 가수가 radwimps 라면 2021년의 나는 샤이니와 태민이 결정지을 거 같고. 네 시간동안 파도만 보면서 멍때리는 스스로를 용인하는 걸 보니 28살의 나는 27살의 나보다 더 너그러운 성미인 거 같고. 그와중에 맥주 한 캔은 포기를 못하는 걸 보니 술은 앞으로도 좋아할 거 같고.
이런 사소한 것에 더없이 즐거워할 수 있는 지금의 여기가, 나는 마음에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