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의 공간
나는 퀴어공간에 대한 약간의 로망을 갖고 있다. 비록 홍대 입구는 우리 집에서 너무 멀고 나는 겁쟁이라 여태 퀴어 바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그곳에 가면 나의 외로움이 한방에 해소될 것만 같다. 마치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주인공 해리가 지긋지긋한 프리벳 가 4번지를 떠나 호그와트에 향하면서 진정한 친구들과 가족을 만난 것처럼. 그런 극적인 소속감을 기대하게 된다. 실은 퀴어 퍼레이드에도 비슷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친구 없이 홀로 돌아다니며 부스의 상품 구경만 하다가 얌전히 돌아온 이후론 퀴어 바에 대한 환상을 대체품으로 키우게 됐다.
극적인 소속감, 내가 나로서 등장할 수 있는 세계를 꿈꾸는 게 나뿐만인 것 같지는 않다. 큐큐퀴어단편선 ‘언니밖에 없네’에 수록된 단편들은 이런 마음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퀴어의 공간과 그 외부를 대조하여 보여 준다. 대한민국과 캐나다, 실제 세계가 아닌 SF 가상 세계관, 행성 간 이주, 엘리제 바의 내부와 외부, 타운의 내부와 외부 등이 이러한 예시가 된다. 캐릭터들이 드나드는 공간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한쪽은 퀴어가 퀴어로서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이고, 다른 한쪽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잔여물이 남은 듯한 공간이다.
퀴어의 공간으로 향하는 일은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는 일”의 은희와 영지는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함께 가겠다’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캐나다를 그린다. 그리고 여기에는 은희의 어머니가 함께한다. 나는 너희 엄마를 사랑했다고 눈물을 글썽이는 아버지는 뒤에 남겨 둔다. 은희는 어머니 때문에 캐나다에 가는 건 아니라고 부연 설명을 붙이지만 그래도 이 여정은 가부장제의 잔재에서 탈피하고 새 시작을 도모하는, 오롯이 여성들만의 시도로 읽힌다. “아미 오브 퀴어”는 아예 지금의 현실과 분리된 근미래 세계관을 제시한다. 인터섹스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 자신을 아미 오브 퀴어로 지칭하는 주인공들을 보면 통렬한 쾌감이 느껴진다. 최근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냈던 한 명의 군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군대와 퀴어의 결합은 해방감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명의 레즈비언 바를 배경으로 하는 “엘리제”를 보면 이러한 공간 구분은 더욱 명백해 진다. 혜주의 손길 덕에 엘리제는 잠시 ‘힙한’ 공간으로 변모하는데 이 과정에서 진짜 퀴어들을 아늑하게 보듬어 주었던 예전의 정체성은 잃어버린다. 결국 종업원인 페페가 마음을 굳히고 총대를 메고서야 엘리제는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진짜’ 퀴어공간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러한 퀴어공간이 조성되어도 모든 퀴어가 그곳에 머물기를 택하지는 않는다. “깃발”의 유나가 그렇고, “가장 큰 행복”의 그가 그렇다. “깃발”에서 유나는 하정을 사랑하는 레즈비언이지만 퀴어로서의 면모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농기술을 배웠고 새 행성의 개척 세대가 되고 싶어한다는, 전근대사회의 남성에 가까운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욕망을 퀴어로서의 사랑보다 우선시한다. 그러나 소설의 묘사는 유나보다 하정에게 더 중점을 두고 있다. 하정의 감정에 더 많은 묘사를 할애하고 있고, 이 둘 사이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는 미나가 하정과 함께 남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장 큰 행복” 역시 마찬가지로, 나와 그라는 게이 커플이 등장하지만 그는 이혼한 전처와의 딸을 만나기 위해 타운 안으로의 이주를 결심한다. 딸이 병에 걸려 아파한다는 불가항력의 이유가 있지만 어쨌든 그는 연인인 ‘나’를 떠나 정상가정의 품으로 돌아간다. 당연히 묘사는 퀴어공간에 남겨진 ‘나’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처럼 퀴어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을 온전히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의 존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퀴어의 공간으로 향하는 일은 곧 행복으로 가는 것이며 정상가족의 공간으로 향하는 일은 쓸쓸하거나, 매정하거나, 최소한 극의 주인공이 할 만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퀴어공간에 남는 사람과는 그 모습이 대조된다. 공간은 경계선을 만들고, 이들은 서로 분리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퀴어공간에서 벗어난 퀴어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퀴어공간에 머무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공간 바깥에 머무는 이들을 타자로 바라보는 시선은 어쩌면 또다른 종류의 소외감을 만들어낼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공간 외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공간이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수록된 단편 대부분에서 퀴어공간은 모두에게 열린 곳으로, 정상가족의 공간 - “깃발”의 행성, “가장 큰 행복”의 타운 - 은 선별된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곳으로 그려지고 이는 현실에 대한 비유로서 제 기능을 하지만, 캐나다 이주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레즈비언 바 역시 홍대나 신촌 등 특정 동네에 밀집되어 있어 비-수도권에서는 찾아오기 쉽지 않다.
둘째는 퀴어공간이라고 모두를 동등하게 끌어안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레즈비언 바의 경우 시스 젠더 여성 동성애자 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아지트일 수 있으나 바이섹슈얼, 인터섹스, 트랜스젠더도 함께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크고 작은 갈등이 늘 있어왔다. 또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유-로맨틱 성향의 캐릭터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무-로맨틱 퀴어들에게는 공감의 경험을 안겨주는데 실패한다. 하지만 모두를 수용하는 공간이란 단어 그 자체로 이미 모순이다. 공간은 경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공간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퀴어공간은 내부의 퀴어를 더 단단하게 끌어 안을수록 외부의 퀴어를 더 외롭게 만든다는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
셋째는 퀴어가 항상 퀴어로서만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단편 “숨”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숨”에서는 퀴어의 공간과 비-퀴어의 공간이 하나로 겹쳐진다. 정희와 해옥은 둘다 외로움을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의지하고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버렸으며, 이제껏 달려온 레일의 바깥을 꿈꾸기에는 나이가 들었다. 정희는 해옥의 권유로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하는데, 덕분에 물 속이 얼마나 아늑한 지를 노년에 배운다. ‘이제 정희의 인생에 이토록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순간은 별로 남지 않았다.’ 해옥은 자식이 있지만 자식들은 해옥을 한 명의 독립된 인간으로 대하지 못한다. 정희는 자신이 옛 연인에 대한 미련을 해옥에게 겹쳐보는 것일까 경계한다. 하지만 말미에 이르면 둘은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이때 이 둘이 이루는 공간은 퀴어의 공간도 비-퀴어의 공간도 아닌 노년 여성의 공간으로 보여진다.
물론 퀴어공간에는 분명한 의의가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성소수자에게 위협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안전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은 당연히 중요하고 또 필수적이다. 하지만 공간은 하나의 시작점일 뿐 해피엔딩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어떤 공간을 상정하든 퀴어는 그 내부와 외부 모두에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공간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서사는 해방적이고 동시에 따스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록된 단편 “나의 아나키스트 여자친구”는 벽이 허물어 진 자리에서 재건의 가능성을 말한다. 이 소설에서 ‘나’는 서울에, 수호는 양산에 머물고 있어 여전히 공간이 나뉘어져 있지만 이 때의 공간 분리는 서사의 종착점이 아닌 관계의 재정의를 위한 일종의 거리두기로 보인다. ‘나’는 퀴어 당사자가 아니지만 여전히 수호를 좋아해서 그를 좇아 양산에 오고, 수호는 예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지만 ‘나’의 방문을 허락한다. 그리고 ‘나’와 연인이던 시절에 했던 오토바이 배달 일을 다시 양산에서 시작한다.
아래층 아저씨의 수작에서 드러나듯 양산은 아직 완성된 공간이 아니다. 하지만 양산은 서울에서 온 ‘나’를 거부하지도, 성 확인 수술 이전의 수호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시도는 새로운 공간을 건설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지 않을까. 경계선을 섣불리 긋지 않는 동시에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면 더 많은 퀴어를 느슨하게 보듬을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이 ‘이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외로움 중 어떤 외로움은 덜어내며’ 살 수 있게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