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는 걱정이 가득한 부부가 등장한다. 그들의 딸인 베서니는 시종일관 3D 마스크 뒤에 숨어 자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부부가 말을 걸면 이모티콘으로 대답한다. 가족 간의 대화를 하자고 불러내면 온라인 캘린더에 ‘대화 일정’을 만들어 링크를 전송한다. 딸이 대체 왜 이러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 화도 내보고 진지하게 설득도 해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베서니의 인터넷 검색 기록을 몰래 들여다 보고서야 실마리를 찾는다. 기록은 온통 트랜스, 어떻게 하면 트랜스가 될 수 있는가의 내용으로 가득하다.

부부는 안심한다. 우리 딸이 트랜스젠더여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거였구나. 트랜스젠더는 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에 속한다. 정확히는, 트랜스젠더 자녀를 너그럽게 수용하는 것이 좋은 부모의 자질이라고 배웠다. 때마침 베서니가 가족 간의 대화를 먼저 제안한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커밍아웃을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온 부부에게 베서니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자기는 트랜스휴먼이라고. 인간의 육체를 벗어나 데이터로서 살고 싶다고. 부부는 베서니에게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이는 관객이 베서니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기도 하다. 육체를 벗어나서 정확히 “무엇”이 되고 싶다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의 기술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끝에, 인류가 기어코 스스로를 재정의 할 수 있는 순간이 와 버렸다는 사실 뿐이다.

드라마 속에서 이 기이한 트렌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 베서니만이 아니다. 베서니의 고모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이디스는 마지막 화에서 세계 최초로 자신의 의식을 클라우드에 업로드하는 수술을 받게 된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은 인공지능 스피커 앞에 앉아 기다리다가, 수술이 끝났을 무렵 스피커에게 묻는다. ‘이디스, 거기 있니?’ 비록 이디스는 자신이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클라우드에 옮겨진 정보 덩어리는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가족 구성원들은 클라우드에 있는 무언가를 기꺼이 이디스로 맞아들일 준비가 된 듯하다.

베서니는 ‘데이터가 되고 싶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기로 데이터는 그저 쌓여있는 정보더미일 뿐 의식을 가지고 움직이지는 않는다. 베서니의 염원이 도서관의 먼지쌓인 장서가 되는 것이었다고 보기는 힘든데, 이는 우리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번더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작중에서 베서니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수술을 받는 장면을 지나면 이 간극이 더욱 커진다. 이 수술 덕분에 베서니는 거리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자기 눈처럼 활용하며 각종 사건들에 관여할 수 있게 되는데, 그녀가 희열을 느끼는 지점은 바로 이 ‘관여’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디스가 얼스트와일에 대한 기밀 문서를 빼돌릴 때 베서니의 역할은 일개 데이터보다는 케이퍼 무비의 해커에 훨씬 가깝다. 또 수용소의 실체를 손짓 한 번에 전세계로 퍼트리는 장면은 마치 디지털 월드의 신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베서니의 욕망은 물리적 한계를 느끼지 않는 삶보다는, 자신이 절대자로 군림하면서 모든 것을 뜻대로 통제할 수 있는 쾌감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디스의 클라우드 이식 수술 역시 기술적 측면에선 대단하지만 그 결과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만약 이디스에게 일기장이 있었다면, 클라우드 속 데이터 덩어리와 그 일기장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후자가 좀 더 생동감 있긴 하겠지만 본래 주인의 파편만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결국 다르지 않다. 오히려 클라우드의 데이터는 지능을 갖고 계속 발전하며 가족들이 기억하는 이디스의 모습과는 점점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이디스의 성장/변화로 볼지 이디스와 별개의 지성체로 볼지는 남겨진 사람들이 해석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2050년까지 가지 않아도 이미 이런 구조에 굉장히 익숙한데, 이것이 동양에서 내세우는 환생/윤회 사상과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2016년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 『도깨비』 등을 보면 전생을 기억해 낸 주인공이 지금의 삶과 전생의 기억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서사가 계속 등장한다. 어떤 인물들은 전생에서 쌓은 인연을 부정하며, 또 어떤 이들은 전생의 과업을 현재로 끌어오며 두 자아를 교차시킨다.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속도의 기술 발전을 목격하고 있다. 유선 전화기에서 스마트폰까지, 흑백영화에서 AR 기술까지 단숨에 달려왔기 때문에 모두가 이 변화에 발 맞추지는 못했다. 지금의 기술도 따라잡기 벅찬데 이 다음 기술은 또 얼마나 우리를 골치 아프게 할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걸 활용하는 인간이 여전히 인간인 채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절대자가 되어 모든 걸 통제하려는 욕망도, 죽음의 뒤를 꿈꾸는 상상력도 모두 인류가 오랫동안 갖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역사를 완전히 망각하지 않는 이상 인류는 여태껏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또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할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정체성과 재정의 같은 거창한 질문은 일단 접어둬도 될 것이다.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가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