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없음
월요일에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렇게까지 슬픈 죽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는 아흔 넘게 사셨고, 손주 열댓 명에 증손주 까지 보고 가셨다. 할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이야기는 이십년 전부터 했다. 가족들은 모두 대비가 되어있었다. 다만 그렇게 집에 오고 싶어하셨는데 결국은 요양원에서 돌아가셨다는 것,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말년에는 면회도 자주 못했던 것 정도가 아빠에게 남은 죄책감 일까. 어쨌건 아빠에게 있어선 당신의 엄마가 돌아가신 일이었으니 나와는 감정의 깊이가 다르겠지.
나는 자꾸 다른 생각을 했다. 장례식에 와 본 일은 이번이 네 번째로, 5년 전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것과 직장 동료의 모친상에 가본 것이 각각 두 번째와 세 번째였다. 할아버지 역시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아흔 넘게 사셨다. 생전에 매일매일 소주를 각 1병 따셨던 걸 생각하면 아주 건강하게 장수하셨다. 직장 동료의 어머니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예상할 수 있는 죽음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는 그렇지 않았다. 첫 번째는 친구의 장례식이었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죽음.
아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그는 엄마 있지, 아빠는 이제 엄마 없다’ 하고 허탈하게 말했다. 실제로 아빠는 장례식에서 여러 번 우셨다. 동생은 ‘아빠가 진짜로 슬픈가봐’ 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아빠는 진짜로 슬프겠지. 그렇지만 나는 잔인하게도 아빠가 부러웠다. 좋겠다 아빠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릴 때 더 잘해드릴걸 하는 아쉬움과 따뜻한 그리움 그 두 가지만 있어서. 소중한 마음을 끌어안고,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아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결론만 남아있어서. 남겨진 사람들에게 아쉬움과 그리움만 남길 수 있는 마지막은 행운이 아닐까. 그렇지 못한 죽음도 있잖아. 잔여물이 남는 죽음도…
내가 뭐라고 남의 마음을 이렇게나 마음대로 추측하는지, 속으로 생각만 해도 아빠에게 미안해지는 말을 혼자 삼키지 못하고 결국 글로 남기는 건, 할머니 돌아가신 다음 날이 친구의 기일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벗어날수가 없어서, 할머니의 제사상을 눈앞에 두고도 십여년 전의 풍경을 떠올려 버렸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