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주말
지난주 주말은 월요일 대체공휴일까지 끼워 혼자서 즐거운 연휴를 보냈다. 토요일은 인사동 구경을 잔뜩 하고, 마음에 드는 찻집을 발견해 녹차 호로록 하며 읽던 책을 끝냈고 일요일-월요일은 전에도 갔던 호텔에 1박을 예약하고 서울숲과 동대문 일대를 뺀질나게 돌아다녔다. 호캉스 용으로 들고 간 두 권의 책도 아주 재미있었고, 서울숲의 어느 팝업 스토어에서 사온 방향제와 섬유유연제도 좋았고, 동대문에서 사온 러시아 과자는 술안주로 더할 나위 없었으며 호텔에 딸린 온천도 원없이 즐겼다. 뜨뜻한 물에 푹 지진 후에 머리 대충 말리고 새하얀 호텔 침대에 다이빙하는 기분은 최고였다.
-
이번주 주말은 회사 휴양시설이 당첨돼서 부모님과 이모들과 함께 1박 2일 제천 여행을 다녀왔다. 제천은 처음 와봤고, 이모들은 코로나 때문에 여행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며 잔뜩 들떠 있었고 휴양시설은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았다. 근사하고 아늑한 별장이 생긴 기분을 오후 3시부터 다음날 오전 11시까지 누릴 수 있었다. 산자락에 위치한 곳이라 리조트 안에 올레길 코스가 있었는데 간만에 맑은 공기 마시면서 걷는 것도 좋았고 그다음날 새파란 하늘에 따뜻한 커피 한잔 들고 발코니에서 아침을 즐긴 것도 행복했다.
토요일에 점심으로 먹은 우렁 쌈밥도, 저녁으로 먹은 처갓집 양념치킨도, 지역 특산물이라던 박달재 막걸리도, 그다음날 점심으로 먹은 (무슨 맛집 프로그램에 출연했다던) 중국집도 아주 맛있었다. 사실 우렁 쌈밥이 최고였다. 노상에서 판매하던 홍옥 사과와 옥수수도 맛있었다. 소주 맥주 막걸리를 잔잔하게 걸치고 새벽 한시까지 어른들 얘기 들은 것도 재밌었다. 비록 아빠는 술이 들어가면 말이 좀 많으시지만…
-
여행 짐을 싸면서 실수로 휴대폰 충전기를 빠트렸다. 식구들 중에 아이폰을 쓰는 사람은 나뿐이라 다른 사람 충전기를 빌려 쓸 수도 없어서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휴대폰을 꺼놓고 지냈다. 필요할 때만 가끔 켜서 버스 승차권 확인하고, 백신 접종 이력 확인하고 그랬다. 근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웹툰도 안 보고 유투브도 안 보고 카톡도 안하고 트위터도 안해도 주말을 보내는데 이상이 없었다. 수다 떨 사람이 옆에 있으면 핸드폰 없이도 심심하지 않다는 걸 주말동안 배웠다. 그리고 좀 슬퍼졌다.
요즘은 카페에 책을 읽으러 가도 핸드폰이 없으면 심심하다. 혼자 책 읽으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이거 얼른 찍어서 트위터에도 얘기해야지 하는 마음은 점점 뗄레야 뗄 수 없어진다. 이거로라도 소통을 하지 않으면 내 일상은 너무 조용하다. 평일은 더 심하다. 아이폰의 통계에 따르면 나의 평일 휴대폰 이용 시간은 8시간이다. 일하는 내내 핸드폰 화면은 옆에 켜져있다. 유투브든 트위터든.
심심해서 켜놓는 거지만 하루 8시간씩 켜놓다 보면 그 SNS 가 나를 잡아먹기도 한다. 내가 말하는 ‘최근에 어디서 들었는데-‘는 다 트위터에서 들은 거다. 극우 유투브 채널만 보고 돌아와요 박끄네~ 하는 사람이랑 내가 알고리즘 적으로 다른 게 뭐지. 요즘은 세상이 너무 여러 갈래라는 생각이 든다. 아빠가 당신 일터에서 보고 듣는 세상, 지상파 뉴스에서 이야기하는 세상,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얘기하는 세상, 더민주가 페미정당이라서 국힘을 지지한다는 우리 사촌동생이 보는 세상, 하루종일 집에서 트위터 켜놓고 일하는 나의 세상은 너무너무 달라서, 가끔은 우리가 그냥 다른 TV 채널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수학과 개발과 내가 관심 가지는 여러 분야들 - 영화, 철학, 케이팝, 글쓰기, 뭐 기타 등등 - 에 대해 어느 게 나의 진정한 적성인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bgm : god - 길) 로 머리가 정말 뱅글뱅글 했는데 최근엔 갑자기 깨달음이 왔다. 아. 안 때려치고 할 수 있음 대충 적성이네. 이거 할 때가 더 흥미진진했고 재밌는 게 많았고 하는 건 생각보다 별로 안 중요한지도 몰라.
-
어제 어른들 술 마실 때 인생의 지루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아빤 원래 인생은 좀 지루한 거라고 했다. 순간 내가 ‘아빠 진짜? 원래 그래?? 나 요즘 사람도 안 만나고 집에서 맨날 일하니까 삶에 아무 변곡도 없고 너무 잔잔하고 이대로 육십까지 갈까봐 겁나는데 원래 그런 거야?’ 했더니 아빠가 ‘니는 재택이 좀… 니 나이엔 좀 더 겪어야지. 도전도 하고 좌절도 하고… 근데 마흔쯤 넘어가면 어쩔 수 없어! 원래 그래!’ 하셨다. 두둥.
근데 오히려 원래 그런 거라고 하니까 기분이 좀 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