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독도서관
오늘은 정독도서관을 다녀왔다. 정독도서관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아마 대학생 때, 서울에 가볼만한 도서관 TOP 10 목록에서 봤던 것이다. 서울에 환상이 많을 때였고 도서관 투어에도 진심이었다. 그런데 정작 취직한 이후론 그 목록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문송안함』에서 정독도서관이 장소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걸 보고 한번 가봐야겠다 싶었다.
『문송안함』에서 정독도서관은 주인공 정진이 서울에서 가장 애정하는 장소였다. 첫사랑이었던 민산과 함께 조별 과제도 하고, 마음 붙일 곳 없던 정진이 유일하게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었던 공간. 하지만 그 소설 속에서 역사의 세계는 이미 핵으로 멸망했고 - 그래서 챕터 이름도 ‘재와 강의 도시’였고 - 정진은 마음 속에서 서울을 완전히 떠나보내는데, 그 전에 마지막으로 정독도서관을 찾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래서 정독도서관이 궁금해졌고, 오늘 드디어 다녀왔다. 내가 느낀 감상은 정진의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우선 코로나 때문에 입구 대부분을 폐쇄하고 하나만 열어두고 있었다. 넓은 부지를 종횡무진 돌아보고 싶은데 그러기는 어려웠다. 또 첫사랑이랑 조별 과제하다가 잠깐 벚꽃길을 걷는 멜랑콜리를 간접 체험하기엔 시기도 안 맞았다. 벚꽃은 아직인데다 오늘은 심지어 좀 추웠다.
하지만 장서는 멋졌다. 새로 들어온 책이 카트 세 개를 꽉 채우고 있었는데 이런 흥미로운 책은 어떻게 찾아서 픽하시는지 너무 궁금했다. 알라딘 장바구니에 넣어뒀던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 도 꽂혀있길래 이것도 읽어보고, 토마스 불핀치의 『원탁의 기사』 개정판도 꽂혀있길래 후닥닥 읽어 보고, 무려 세로쓰기로 쓰인 『명정사십년』 은 느릿느릿 읽다보니 너무 재밌어서 돌아오는 길에 아예 구매를 했다. 김현화의 『조생의 사랑』 이라는 소설도 읽었다. 제목이 상당히 밋밋하지만 고전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땄다는 저자 이력을 보고 기묘한 궁금증이 생겨 픽했다. 결과적으로 소설은 꽤 재밌었다. 오랜 티가 나지만 조용하고 단정한 도서관의 정취도 좋았다. 난 앞으로도 종종 정독도서관에 갈 거 같다. 무엇보다도 토마스 불핀치의 『원탁의 기사』 지금 알라딘에 품절인데 성남의 어느 도서관에도 구비되어 있지 않아서… 그거 읽으러 가야 한다.
정독도서관에서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즐기면서 최근에 읽었던 책이 생각났다. 레비나스의 사상에 대한 책이었는데, ‘사랑하는 감정과 대상은 독립적이지 않다. 사랑받는 대상은 사랑하는 감정이라는 지향적 정서 안에서만 존립한다’는 문장이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정독도서관과 정진이 사랑했던 정독도서관은 아마 다를 것이다. 아니, 다르다는 표현도 쓸 수 없다. 다르다고 말하려면 먼저 ‘같다’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불가능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정독도서관은 내 감정 안에서만 존립하고, 어느날 변덕이 일어 도서관에 무심해지면 ‘나의 정독도서관’은 사라질 것이다. 나는 영원히 ‘나의 정독도서관’을 감정과 독립적으로,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비교도 할 수 없고, 같은지 다른지 말할 수도 없다.
옛날이었다면 이런 류의 주장에 냉소적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역시 커뮤니케이션은 다 부질없어, 연인끼리 서로 사랑한다 말해도 사실 전달되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거야, 기타 등등. 하지만 오늘은 ‘나의 정독도서관’을 정립하고도 여전히 ‘정진의 정독도서관’을 소설 속 환상의 장소로 남겨둘 수 있어서 좋았다.
레비나스 얘기 더 하고 싶은데 이건 다음 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