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1학기 종료
이렇게 또 한학기가 끝났다.
요즘은 생각이 별로 없다. 열심히 생각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는 그런 루틴이 너무 지겹다. 왜 그런 루틴이 지겨워 졌는지 스스로를 돌아본다음 기록을 텍스트로 남긴다던지 신자유주의 사회가 어쩌구, 성장이 어쩌구, 이제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지겹다. 사실은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를 글로 쓰는 것도 은은하게 지겹다.
친구와 방통대 얘기를 한참 하다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인생은 과거의 나와 하는 지옥의 조모임이다.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나를 배려할 생각이 없고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내가 외치는 메시지를 들을 생각이 없다. 으휴 이 이기적인 것들. 다 지 말이 옳지. 아마 둘은 영원히 짝짜꿍이 맞지 않을 거라고.
지금의 내가 어떤 기록을 남겨놔도 미래의 나는 그걸 자기 멋대로 읽거나 이건 과거의 내가 그랬던 거고 지금의 나는 다르다며 가볍게 폐기할 텐데, 이게 정말 기록으로서 가치가 있나 하는 지점도 회의적이고 무엇보다 내가 딱히 미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없다. 아 뭐. 니 알아서 사십쇼. 제 탓하지 마시구요. 어쩌면 역사 기록이란 것도 이런 거 아닐까. 기술의 한계로 기록을 못한게 아니고, 그냥 과거의 조상은 우리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던 거야.
펜을 놓고서야 알게 되는 지점이 있었다. 아. 글이라는 건 결국 자기를 애타게 알리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 사람이 쓰는 거구나. 남에게 인정받고픈 욕구가 없으면 글을 쓰지 않겠구나. 그럼 우린 영원히 ‘남을 딱히 신경쓰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겠네. 그렇구나. 독서 시장이란 사실 나를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집합이구나.
얼마 전에 서점에서 책 구경을 하면서 책의 방향이 작가의 내면을 향하지 않는 책은 없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백과사전 같이 작가의 자아가 드러나지 않는 책은 빼고. 텍스트에 작가가 등장하는데, 텍스트의 방향은 작가의 내면으로 향하지 않는 책. 시집과 에세이 코너를 뒤졌는데 그런 책은 찾기가 꽤 어려웠다. 대부분은, 길에 지나가는 개미를 봐도 개미에 대해 쓰는 게 아니라 개미를 본 그날의 자기에 대해 쓴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글감으로 쓰면 상대에 대해 쓰기보다 그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에 대해 자기가 고찰한 바를 쓴다. 아무래도 단행본 책을 쓸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작가는 다른 무엇보다 자기자신이 제일 궁금한 걸까. 아니면 이게 21세기의 고유한 유행인가. 사실 나도 내가 뭘 찾는 건지는 잘 모르겠더라.
그러다 발견한 책을, 지금까지 꽤 소중하게 읽고 있다. 마크 헤이머의 『두더지 잡기』. 표지에 쓰인 문구가 ‘노년의 정원사가 자연에서 배운 것들’인데 이 문구만 봤을 땐 이것도 지겨울 뻔했다. 아, 식물과 자연. 그것도 참 유구한 내면 탐험용 키워드지. 그런데 읽어보니 내가 근래 찾고 있던 것에 가장 근접한 책이었다.
이런 글을 어떻게 썼을까 궁금했는데. 작가 이력이 특이하다. 책에 실린 내용을 좀 옮겨오자면 이렇다.
10대 초반부터 50여 년을 채식주의자로 살았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반강제적 권유로 열여섯에 집을 나왔다. 그리고 2년에 가까운 시간을 홀로 걸으며 숲에서, 생울타리 밑에서, 강변에서 홈리스로 살았다. 그 기간동안 그는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위험한 어른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부랑자 생활을 끝내기로 결심한 뒤엔 철도역 신호소에서 일했고, 예술대학에서 미술과 문학을 공부했으며, 그 후에도 아주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 지금은 정원사로 20여 년째 일하고 있다. 생계를 위해 겨울마다 두더지 잡이를 병행했으며 이 책은 그의 데뷔작이고, 긴 시간을 정원사로 살았지만 자기 정원을 가져본 적은 한번도 없다.
작가 소개와 표지 문구까지 봤을 때 예상할 수 있는 여러 방향이 있었는데
- 채식주의자 이지만 생계를 위해 동물을 죽여야 하는 일상에 대한 고찰
- 2년간 부랑자 생활로 얻은 성찰은 무엇이었고 지금의 소소한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지 홍보
- 자연이 주는 가르침과 식물 예찬
놀랍게도 셋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이 책엔 그런 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없었다. 신변잡기를 늘어놓는 척하면서 유머를 시도하는 부류도 아니었고 뭐랄까. 이거야말로 타인과 엮이지 않은채 살아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는 느낌이었다. 남 시선 신경 쓰지 말자고 말함으로써 ‘남 신경 안 쓰는 쿨한 나’를 보여주고자 하는 거 말고, 자연으로 떠나자고 하지만 결국 도시로 돌아와 ‘자연이 얼마나 멋졌는지’ 말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도 말고, 정말 자기 삶에 ‘남’이란 글자조차 쓰여지지 않은 채 자연과 자기 사이에 어떠한 경계선도 없는 채로 살아본 사람만이 쓸 수 있을 것 같은 글.
이 책 전체에서 어떤 텍스트만 잘라내서 인용을 하면 도리어 책의 매력을 반감시킬 거 같아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딱 그만큼 책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므로… 제일 ‘맞아맞아 제가 요즘 그래요’ 싶었던 페이지를 남기고 오늘의 일기는 끝.
오래 걷다 보면, 예전의 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길 스스로 멈추게 되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유를 묻게 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질문도 따라서 멈추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그저 발걸음과 숨이 되었다. 걷기와 휴식. 모든 것들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예전에는 정말로 커 보이던 인생의 모든 자그마한 넌센스들이. 나의 정체성은 파괴되었다. 내가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됨에 따라 나의 개체성은 죽임을 당했다.
내가 어린 시절 학습해서 세상에 내보인 ‘자아’는 상실됐고, 이제 나는 그것을 뒤에 남겨두고 떠나온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 어떤 종류의 견고하고 변치 않는 ‘자아’도 구축할 수 없게 돼버렸다. 그것을 어떻게 구축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면 뒤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바로 그 침묵이야말로 그곳에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경이롭고도 가장 완벽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인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