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을 땐 복잡했으나 알고 나면 쉽다
운동을 배우다 보면 생뚱맞게 레비나스의 스승-제자론이 생각난다. 모든 제자는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스승에게 이해가 닿지 않는다고 했던가. 선생님의 말은 그 말을 듣는 시점엔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 요가 강사님이 골반 닫으세요- 같은 멘트를 하시면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신기한 건, 내가 ‘골반 닫으세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그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뭘 하라는지 모르겠어도 대충 따라하다 보면 어느 날 아, 그게 이거 얘기한 거였나? 하고 알게 된다. 그리고 내가 어느 순간부터 골반 닫으란 지시를 안 들었다는 것도 알게 되지.
요즘은 클라이밍을 배우는데 이것도 매한가지다. 팔 힘이 아니라 다리로 밀면서! 다리에 힘을 줘야지! 집중! 대체 다리로 뭘 어쩌라는 건지 그 순간엔 알 수가 없다. 솔직히 집중하라는 멘트는 좀 억울할 때도 있다. 제가 지금 안 떨어지려고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집중하라는 말은 달리기 할 때 런데이 앱한테서도 자주 들었기 때문에, 뭘 말하려는 건지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 국지적인 목표에 시선을 빼앗겨 남은 힘을 모조리 쏟아내는 건 집중이 아니라는 거지. 이뤄야 할 최종 목표,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한 체력 분배와 전략을 마지막까지 생각하는 의지와 정신력. 근데 그게 말이 쉽죠. 암벽에서 내려와서 벤치에서 루트 파인딩 할 땐 이 쉬운 걸 왜 못했을까 싶은데 암벽 올라가보면 10초 만에 머릿속이 흐려진다. 오마이갓. 왓 이즈 해프닝.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던 내가 달리기와 클라이밍을 병행하게 된 건 솔직히 슬램덩크 영향이 8할은 된다. 영화를 여섯 번을 봤는데도 여전히 태섭이가 존 프레스 당할 때는 심장이 떨리고 이명헌이 플로어 슬래핑 하면 그렇게 압박감이 들 수가 없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땐 그냥 태섭이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무섭고 떨려도 센 척 여유로운 척 해서 끝까지 이겨내는 주인공 멋지잖아. 그런데 보면 볼수록, 저 심정을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들여다볼수록 아득하게 느껴진다. 코트 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등학생이다. 송태섭 이명헌 정대만 모두 고등학생. 와… 팔 들어올릴 힘도 없이 터덜터덜 뛰다가 후반전 5분도 안 남았을 때 3점슛 작두 타고 파울 유도까지 하는 정대만이 고등학생이라구요. 그게 고등학생들의 기세란 거죠.
위기의 순간이 오면 사람은 없던 힘도 솟아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클라이밍을 해보니 믿기지가 않는다. 이걸 놓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순간이 와도 난 아마 ‘아 홀드 거지 같네 망했다’ 하고 손에 땀 차서 미끄러지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완등 같은 건 못할 거다. 거기서 마지막까지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아주 멀리 있는 건 아니다. 클라이밍 강사님이 암벽 타는 거 1분만 구경해도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가볍고 우아한 동작으로 45도 경사 오버행에서 점프를 할까 감탄할 수 있다. 다만 그 ‘어떻게’가 아주 깊을 뿐이지.
그런 날카로운 집중력을 난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가진 집중력은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는 소위 엉덩이 싸움, 지루함에 무뎌지기, 뭐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자아성찰. 글쓰기. 그런데 퍼슬덩을 보고 운동을 시작하면서 내가 가지지 못한 저쪽 집중력이 훠어어어어어어얼씬 멋있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작년부터 꾸준히 갖고 온 화두인데, 자아에 대해 생각하는 게 정말 지겹다. 뭐 나의 진정한 적성? 흥미? 내면? 그런 거 생각할 시간에 밥 먹고 보드게임이나 하면 좋겠다. 그러고도 모르겠으면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잠을 자고, 그냥 다음 날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태섭이가 방공호 동굴에서 울다가 바다 한번 봐주고 농구공 튀기는 씬이 정말 좋았다. 한번 엉엉 운 걸로 결코 다 털어낼 수 없는 깊은 상실과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에 매몰되는 게 아니라 ‘아 나 꼴사납네 이제 농구하자’ 하고 공을 튀기고 달리기를 한다는 게 말도 못하게 강해 보였다. 나는 그 비슷한 상실을, 혼자 곱씹고 되뇌고 생각하고 성찰하는 걸로 해결했었다. “생각” 외에 에너지를 쏟을 만한 다른 출구를 몰랐어서 더 그랬다. 신체를 움직이는 것에 에너지를 쏟으면 저렇게 시원하게 돌파할 수도 있구나. 그땐 그걸 몰라서 참 복잡했고, 알고 나니 쉽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 가오 잡고 강한 척 하는 사람들을 좋아했었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