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에 흥미가 없다. 그런 지 좀 됐다.

이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무기력이라는 단어를 쓰게 된다. 왜 이렇게 일이 하기 싫으까? 요즘 좀 무기력한가봐. 뭐 그런 식으로. 하지만 생각해 보면 너무 다양한 층위의 감정을 무기력이라는 단어 하나로 퉁쳐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상승과 확장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회라 현재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는 단어를 너무 적게 쥐여준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전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무기력했으면 퇴근하고 매일매일 3천자씩 글쓰기를 어떻게 해. 책은 무슨 수로 만들고 남의 책은 또 무슨 수로 읽어. 단지 회사에 흥미가 없을 뿐이지.

흥미가 없는 건 어떻게든 티가 난다. 평소라면 훨씬 더 빠릿하게 익혔을 변경 사항들을 이젠 코앞에 닥칠 때까지 손대지 않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던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회사 사람들에게서 ‘이제 저 사람은 열정이 식었어. 예전만큼 적극적이지 않아’ 로 여겨지는 건 뼈아픈 일이긴 하다. 변명을 붙이려면 물론 붙일 수 있다. 가끔은 책 열심히 읽고 생각 열심히 하며 쌓은 경험치를 죄다 자기방어에 쓰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정도니까. 일 열심히 하는 게 도대체 저한테 무슨 결과로 남나요? 그래봤자 회사가 잘되는 거지 제가 잘되는 건 아닌데 어쩌구저쩌구. 하지만 그 말이 진실하지 않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가령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는 건 제게 있어 분명히 이로운 일이겠죠. 내가 잘되는 일이겠지. 근데도 관심 갖지 않잖아… ‘하기 싫다 흥미가 없다’는 감정이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근거는 모조리 사후에 붙는 합리화다. 감정이 선행하고 논리는 그다음이야.

그래서 뭐다? 일이 하기 싫다.

세상의 모든 일하는 사람들을 모으면 정규분포가 나오겠죠. 일 잘한다 싶은 사람은 30%, 평균이 40%, 그리고 일 못하는 사람이 30%. 납작하게 보자면. 지금 제게 필요한 이야기는 어떻게 하면 더 일을 잘할지 일에 긍지를 가질지 말하는 것들이 아니라 저는 일잘알로 인정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대충 삽니다 라고 말하는 것들인데 2024년 3월의 대한민국은 ‘그래도 대충 삽니다’가 좀처럼 성립되지 않아서 그런 이야기를 찾기가 힘든 걸까요. 그냥 내 풀이 좁은 건지. 다들 SNS 로 자신을 포장하는 일에 완벽 적응한 세대라 못난 이야기를 못난 형태로 내놓는 법을 까먹은 건가. 는 써놓고 보니 미친 듯이 오만한 말이다. 내가 뭐라고 이런 소리를. 그냥 못난 이야기 듣고 싶다구. “지금도 지구 반대편에선 전쟁으로 사람이 죽는데 우린 여기서 뭘하는 걸까요?” 같은 범지구적 멘트 말고 “저 사실 분리수거할 때 비닐 대충 버려요” 같은 멘트.. 예시가 왜 이따위지.

요즘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퀴어, 신경다양성, 암튼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봅니다. 이상하지. 저는 제가 퀴어 정체성이 그렇게 뚜렷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운동가 타입도 아니고. 평화롭고 잔잔한 세계에 저를 톡 떨궈 놓으면 저는 그냥 책이나 읽고 영화나 보고 살았지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에 아주 큰 관심 가지지 않았을 거 같은데.. 귀찮아 하면서.. 결국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내가 생각하기에 나와 세상 사이에 요철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걸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가 무엇인가. 누군가는 퀴어로 가고 누군가는 신경다양성으로 가고 책과 영화의 세계로 빠지는 사람도 있겠고. 어떻게든 이 요철을 메꿀 언어를 갖고 싶어서 회사 일은 등한시하고 다른 영역에서 발버둥을 치는 게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회사와 팀이었다면 일을 대하는 태도가 또 달랐을까.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네 정말로.

하지만 전 무기력하지 않아요. 어떤 면에선 아주 불성실하고 어떤 면에선 또 아주 진실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