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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크롤러
블루레이를 한 달 전에 사놓고 드디어 봤다. 우울하고 무력한 이야기일 거란 건 충분히 예상했지만 정말 무력해지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보고 들은 전쟁엔 늘 무언가의 의미가 있었다. 땅을 찾기 위해, 우리의 신을 위해, 민족의 정체성을 위해. 하지만 이젠 모두가 조금씩 알고 있다. 그런 건 다 만들어진 명분에 불과하고 폭력은 어딘가에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미래의 인류는 그러한 ‘의미’를 완전히 제거해 버리고 순수한 폭력만을 남겨 놓는다. 그게 『스카이 크롤러』의 세계관이다.
이 만화 안에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회사가 있고, 이 회사에서 일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이들, 킬드런 (kill + children) 이 있다. 킬드런은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는 이상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모두 과거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고, 어차피 내일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래는 그리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는 건 현재 뿐이다. 그렇기에 킬드런은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나머지 인류에게 자기 세상을 믿고 살 수 있는 안정감을 주기 위한 존재로 영원히 소모된다. 사람들은 킬드런의 회사에 견학을 가서 ‘당신들이 있기에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어요. 정말 고마워요!’ 라고 말하고 킬드런이 죽으면 눈물을 흘리며 너무 안타깝다고 말하지만 다 소모의 한 방식일 뿐이다. 마치 20대 몇 명 끼워넣음으로서 ‘우리 그렇게까지 꼰대 집단 아니에요’를 표방하려 할 뿐 변화다운 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어떤 기성 세대들처럼.
이 작품은 진짜 무서웠다. 어떻게 하면 저 무한반복을 빠져나올 수 있지? 최선을 다해서 맡은 바를 수행하고 있는데 (킬드런의 경우, 성실하게 전투에 임하는데) 사실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면. 심지어 킬드런은 전투 중에 전사해도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기억만 잃고 그대로 다시 킬드런이 된다. 그러니 우리가 어설프게 기성 세대의 질서를 빠져나가봤자 바뀌는 건 없는 것이다. 그래서 2의 책과 정확히 일맥상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똑같은 날의 계속인데, 우리는 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
신세기 에반게리온
옛날 옛적에 다 봤지만 문득 다시 생각나서.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 작가는 자크 라캉의 ‘절대적 향락’이라고 설명을 한다. 사실 라캉에 대한 서술이 전혀 이해가 안 돼서 서양철학사를 읽기 시작했는데, 라캉까지 가려면 올해 안엔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이걸 향락이라고 표현한 의미는 알 것 같았다. 종말과 동반 자살은 묘하게 감성적인 단어니까.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에서 인류는 원래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였다. 그런데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무수한 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고, 그래서 한 조각조각(=개인)은 불완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안정감과 거부감을 동시에 느끼는 것도 역시 여기에 기인한다. 그래서 작중 과학자가 만든 플랜이 ‘그럼 우리 다시 하나가 되자! 그럼 완전한 생명체도 될 수 있고 더 이상 외로울 필요도 없어!’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이 플랜은 참 혼란스럽다. 그걸 완전한 생명체가 ‘된다’고 생각해야 할지 아님 나라는 개체는 죽었고 나와 어딘가 비슷한 새로운 객체가 ‘태어난다’고 생각해야 할지. 가령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 친구들과의 사이에 숨기는 게 전혀 없어지고 완전히 동일한 정신을 공유하게 된다면 그건 행복한 일일까 끔찍한 일일까?
미드소마가 생각나기도 하고, 공각기동대가 생각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