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나는 약간의 콰로맨틱 성향을 지닌 에이섹슈얼이라, 성애 장면을 정면에 내세우는 로맨스 영화는 사실 공감이 잘 가지 않는다. 퀴어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의리를 지킨다는 마음으로 보러 가지만 늘 떨칠 수 없는 불편함을 달고 나온다. 영화 제목의 어디에도 ‘불’이 들어가지 않건만 불초상으로 명칭이 정해진 이 영화도 그 부분에선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연기래도 나체는 보기 싫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만이 주는 압도적인 장점들이 있었다. 첫째는 남성 캐릭터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정도로 남성을 배제한 영화는 처음 접했는데, 내가 실은 이런 영화를 원하고 있었다는 걸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남성 없이도 잘 살 수 있다’와 ‘그렇지만 외롭다’ 사이에서 양가적 감정을 지니는 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남성 캐릭터에게 관심이 없는 듯한 연출이라 더 매력적이었다. 둘째는 주인공이 영화의 제목대로 ‘타오르는 여인’이 되는 장면이다. 여성들만이 모인 축제에서 캠프파이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라틴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 분위기가 너무 고요하고 장엄해서 노래라기보다는 모종의 의식을 위한 주문처럼 들린다. 그 기이한 분위기 속에서 두 주인공이 캠프파이어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보다가, 엘로이즈의 치맛단에 불이 옮겨붙고 마리안느가 그걸 홀린듯 바라보는 장면. 이게 로맨스의 시작인지 대서사시의 시작인지, 넘치는 긴장감에 숨도 못 쉬고 지켜보게 된 장면이었다.

작은 아씨들

일단 플로렌스 퓨는 하얀 드레스+화관 조합의 코디를 더 이상 하면 안 될 것 같다. 무슨 대사를 해도 미드소마로 보여서 집중이 안 돼.

따뜻한 유년기를 그려내는 소설을 어릴 땐 꽤 좋아했던 것 같다. 소공녀, 소공자, 작은 아씨들, 비밀의 화원 등등. 따뜻한 모닥불와 벨벳 드레스로 상징되는, 가난하지만 올곧고 행복한 이야기들. 비록 지금 보면 참 작위적인 행복이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필요한 법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영화를 예매했다. 파란 약을 먹고 따뜻한 유년기를 간접 체험할 마음으로 영화관에 갔는데 내가 뭔가 잘못 생각했다는 건 영화를 1/3 지점쯤 봤을 때 깨달았다. 내가 어린 시절 읽었던 그 작은 아씨들은 3부작 소설 중 1부만을 간추려 놓은 버전이었고, 내가 모르는 뒷 이야기가 훨씬 길었다.

작은 아씨들을 좋아라 하던 그 시절로부터 10년이 넘게 흘렀듯 마치 가의 자매들도 나이를 먹었다. 이제 따뜻하고 멋모르던 유년기는 끝났다. 허영심 많고 한심해 보였던 메그는 자신의 선택을 올곧이 감당하는 어른이 되었고 소금에 절인 라임 때문에 세상 떠나가라 울던 에이미는 자매 중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반면 1부에선 둘도 없는 감초였던 로리는 등장할 때마다 한숨을 유발하는 캐릭터가 되었다. (티모시 샬라메가 아니었다면 분명 미워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 동경하고 감정이입 했던 조는, 지금의 우리를 대변하는 인물이 되었다. 당차게 살고 싶었는데 현실은 녹록치 않고, 사랑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 살고 싶었는데 내면의 나는 끝없는 외로움을 호소한다.

1부에서 마치 자매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은 것처럼 보였다. 베스의 성홍열은 무사히 나았고 아버지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3부까지 오고 나니 1부의 해피엔딩은 무색해졌다. 언젠간 3부의 해피엔딩도 무색해질 것이다. 내가 기억하던, 내 유년기 속 훌륭한 마침표 같았던 마치 일가는 어른이 되어 떠났다. 나도 이젠 여기에 머물러 있는 나를 털고 일어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