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톰보이

어린 아이들밖에 나오지 않는데 서스펜스가 압도적이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이 생각났다. 이 작품을 두고 레즈비언의 서사로 볼 것이냐 트랜스젠더의 서사로 볼 것이냐로 갑론을박을 하는 데에 화가 난다. 나한텐 그냥 내 서사였다. 치마나 화장이 죽기보다 싫은데 부모의 폭력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던 사람들의 서사.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남성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남성들에게까지 생각거리를 던져줄 수 있는 이런 멋진 영화를 두고, 자기들 진영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건 욕심이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1917

줄거리는 별 게 없다. 임무를 받고 수행하는 이야기인데 그 임무가 실패로 끝나버리면 영화가 안되겠지? 하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 사용은 제법 신기했다. 종종 RPG 게임에서 몰입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캐릭터의 시야를 그대로 플레이어의 시야에 끌고 와 버리는데 - 슈팅 게임이라고 하면 플레이어의 스크린에 조준 장치의 시야만을 보여준다거나 - 영화가 그렇게 하고 있단 느낌이었다. 따로 역할을 배정받지 않았을 뿐 관객 역시 저 영화 안에 있고 두 주인공과 함께 움직이는듯한 감각. 심지어 맡은 임무가 전쟁의 흐름을 좌지우지 할만큼 중대한 거라니 얼마나 짜릿해.

서사 위주로 즐기는 내 취향에 쏙 들어맞진 않았지만 영화관에서 보기엔 좋은 작품이었다.

애니메이션

이윽고 네가 된다

주위에 GL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SNS 에서 이 작품 이야기로 열을 올리길래 궁금해서 찾아봤다. 흔히 동성애 로맨스 작품에 대해 사랑이 맞다 아니다 갑론을박은 많이들 하니까 - 19금 묘사가 없으면 특히나 더 -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그냥 적당히 잘 만든 로맨스 애니메이션인가 보다 했지. 설마 주인공이 ‘저는 연애감정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하고 첫 회차부터 에이로맨틱 정체화를 하는 만화인 줄은 몰랐다. 에이젠더,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 등 수많은 A-umbrella 아래의 정체성들이 있지만 이게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일은 정말 드물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나는 내가 에이섹슈얼일뿐 에이로맨틱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연애를 안 한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인지 로맨틱 끌림이 뭐였더라 좀 가물가물하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고 더 가물가물해졌다. 흔히 사랑은 아무 이유 없이 자기도 모르게 사랑에 빠졌다고 묘사되는데 이 작품엔 ‘자기도 모르게’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잔뜩이다. 그냥 그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는 주인공1, 뭔진 알지만 서로를 내맡기는 관계를 하고 싶진 않은 주인공2, 로맨스가 재밌다고는 생각하지만 자기가 그 당사자가 되고 싶어하진 않는 조연1 등등.. 에이-계열의 성적 지향을 다루는 애니메이션이 있는 것도 신기한데 오토코리스 로맨틱까지 등장할 줄은 몰랐다. 주류에 끼지 못하는 여러 캐릭터들이 자기들의 생각과 욕망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 구경하고 있자면, 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로맨스와 사랑에 그렇게까지 확신을 가지는지 좀 궁금해 질 정도다.

사라잔마이

감독님 진짜 대단한 사람이다. 세일러문도 대단했고 소녀혁명 우테나는 제 영원한 원픽이겠지만, 어떻게 이런 걸 만들지⋯.

시리즈의 전반적인 구성은 많은 시청자들이 익숙하게 여길 ‘마법소녀물’ 포맷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 셋이 어느 날 세계관의 절대자에게 능력을 하사받고 잘못을 저지르는 악당을 무찌르는 이야기의 반복.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마법소녀 포지션에 세워진 게 모두 남성 캐릭터이며 그 어디에도 이성애는 등장하지 않고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적 요소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또 통상적인 마법소녀 전투가 악을 뚜까패고 선한 쪽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끝난다면 여기서는 악당이 가진 욕망을 해방시키고 그 대신 본인(마법소녀)의 욕망도 드러나 버린다는 점도 독특하다.

덕분에 우리는 매 회차가 끝날 때마다 주인공 캐릭터들이 절대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아했던 속마음을 하나씩 보게 되는데, 이런 장치가 선사하는 쾌감이 아주 묘하다. 나오는 비밀 하나하나가 시청자로 하여금 ‘지금 저 얘기가 친구들 앞에서 강제공개가 된 거라고? 나 같음 벽에 머리 박고 저승으로 도망가고 싶을듯;;;’ 하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치명적인데, 나도 가끔은 말도 안되게 더러운 속마음을 누군가한테 고백하고 싶다고 느끼니까? 모두가 철저히 걸어잠그는 금고를 와장창 깨부수는 것에서 오는 대리만족…? 여튼 보는 내내 묘한, 아주 묘오오오한 위안을 받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감히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할 순 없을 거 같다. 감독님이 만드는 것마다 문제작으로 유명하신 분이라, 이 작품 역시 충격적이고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싶은 장면이 잔뜩이다. 이걸 추천했다간 ‘너.. 그런 만화 봐…?’ 하는 답신을 받게 될 거 같아 두렵다.